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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탈십육지(解脫十六地) ] 청화큰스님 법문

김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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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탈십육지(解脫十六地) ] 청화큰스님 법문

오늘 마무리하려고 생각하니 시간이 너무나 짧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심오(深奧)하고 범위가 넓어서 말씀하고자 하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문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고 또는 심청정시불(心淸淨是佛))이라, 마음이 청정하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줄이면 몇 말씀으로 줄일 수가 있는 것이고 퍼뜨리면 끝없이 확장하여 부연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마무리를 해보겠습니다.

수행의 위차(位次)인 해탈 십육지(解脫十六地)가 있습니다. 수행을 하려면 어떤 과정을 밟아서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위차이기 때문에 실수(實修)하는 수행자로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위차를 모름으로서는 암중모색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아만심이 있는 사람들은 증상만(增上慢)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수행위차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옛부터 번쇄하게 논의가 많이 되어 왔습니다.

밀교(密敎)에서는 십지(十地)를 말하고 유가(瑜伽)는 십칠지(十七地)를 말하며 또는 성문승(聲聞乘)도 나름대로 십지(十地)를 말하고, 연각승(緣覺乘)도 역시 십지(十地)를 말하고 또는 보살승도 역시 화엄경에서 십지(十地)를 말하고 또한 그와 동시에 오십오위(五十五位), 오십일위(五十一位), 오십육위(五十六位)…… 등등의 여러 가진 수행론이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가운데서 어떻게 서로 연관이 될 것인가?

달마(達磨) 대사께서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傅)을 말씀한 것도 무엇인고 하면, 복잡한 문제들을 따지다 보면 소중한 마음도 못 닦고 말아 버리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큰스님들이 '분별시비하지 말라, 경을 보지 말라'고 하는 것도 지극히 노파심절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위차 문제만 해결하려고 해도 오랜 시일과 정력이 소모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금타 스님께 대해서 감사를 느끼는 것이 이런 성문십지, 연각십지, 보살십지 또는 오십오위나 오십육위나 그런 여러가지 위차에 관해서 대비(對比)시켜 가지고 회통(會通)하여 하나의 체계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석존(釋尊) 이후에 그렇게 하신 분이 현대에까지 아직은 없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 저도 사실 젊어서는 상당히 교만한 편이었습니다마는 이런 공부를 할 기회가 없었다면 엉뚱하게도 '공부가 다 되었다'고 아만심에 젖어서 무거운 죄를 범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승려가 된 뒤 법화경(法華經)을 보고서 '내 공부가 이제 다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교학 공부를 그만두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불교라는 것이 상대와 절대와 성상체용(性相體用)이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본래 둘이 아닌 법을 알고 우주법계 그대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도리를 알았으면 앞으로 인연 따라 증오(證悟)를 위하여 닦아나가면 되는 것이지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인가?' 이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런 수도의 위차(位次) 법문을 보고서 '우리 범부가 공부해 간다는 것이 지극히 멀고도 먼 길을 가야 하는 것이구나'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해탈십육지(解脫十六地)는 금타 스님께서 성문십지, 연각십지, 보살십지 또는 오십오위라든가 여러 가지 밀교의 계위를 합해서 비교해 가면서 보살 10지를 근간으로 하여 회통을 시킨 수행 체계입니다. 물론 이 작업이 완전무결한 것인지 아닌지는 제가 그 경계가 못되기는 하나,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내용이 확실한 전거(典據)를 인용(引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두고두고 수행자나 선지식들이 연구하고 검토할 소중한 문제입니다.

처음에는 삼보에 귀의하는 초삼귀지(三歸地)라, 그 다음 신심과 원력을 확립하는 신원지(信願地) , 다음은 선택한 수행법을 닦아서 익히는 습인지(習忍地), 거기에 따라서 자기의 수행을 보다 더 맹렬히 지속적으로 정진하는 경지가 가행지(加行地)입니다. 이 4가행지까지는 범부지(凡夫地)입니다.

다음 5의 금강지(金剛地)는 금강불성(金剛佛性) 곧, 자성불성(自性佛性)을 직관적으로 견증(見證)할 때 이른바 증오(證悟)할 때요, 6은 희락지(喜樂地)라, 금강지를 성취해서 법락(法樂), 선정락(禪定樂)이 더욱 증장(增長)되어서 무한불멸의 희락을 느낄 때이고, 7에 리구지(離坵地)라, 금강지를 성취해서 욕계 번뇌를 대부분은 털어 버렸지만 아직도 제거되지 못한 욕계 번뇌의 습기를 완전히 제거할 경계입니다. 8에는 발광지(發光地)라, 진여 곧 진여불성(眞如佛性)의 모든 공덕의 광명이 현발(現發)할 때이고, 9에 정진지(精進地)라, 그래도 습기가 아직 남아 있으니 정진을 더욱 가속화하고, 10은 선정지(禪定地)라, 이른바 아(我)를 멸진(滅盡)하는 멸진정(滅盡定)이라, 수(受)와 상(想)과 행(行)과 식(識)의 4온(蘊)을 멸진해 버려야 누진통(漏盡通)을 하는데 그런 선정을 여기서 닦는 경지입니다. 물론 앞에서도 닦기는 하였지만 완전한 것은 못되었고 깊은 선정으로써 습기(習氣)를 떼어버리니 11에 현전지(現前地)로서 일진법계(一眞法界)의 현상이 앞에 나타나는 경계입니다.

12는 나한지(羅漢地)라, 아라한과를 성취하고 13에 지불지(支佛地)라, 독각승(獨覺乘) 즉 연각승(緣覺乘)의 자리로 모든 인연 관계를 모두 통달해 버리는 자리입니다. 그 다음 14에 보살지(菩薩地)라, 자기도 깨달을 뿐 아니라 무량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願)을 세우는 경지요, 그리고 부동지(不動地)라, 번뇌의 습기가 없기 때문에 조금도 후퇴가 없고, 임운등등(任運騰騰) 등등임운으로서 조작이 없이 자연적으로 모든 공덕을 할 수 있는 경계를 성취하였고, 15에 유여지(有餘地)라, 그래도 아직은 불지(佛地)와 같이 완전하지 못하나, 16에 무여지(無餘地)라, 부족함이 조금도 남지 않은 완전무결한 경지라, 따라서 우리 범부가 초삼귀지에서 삼보(三寶)에 들어가고, 차근차근 공부해서 무여지에서 정각묘각(正覺妙覺)을 성취하는 자리 입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렇게 점차로 차근차근 올라가는 분도 있고, 또는 비약적으로 뛰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가는 분도 있고, 또는 중간에 2․3지를 뛰어 넘어서 가는 분도 있고, 근기 따라서 구구합니다. 근기가 수승한 분들은 과거 숙세 선근도 많이 있고 용맹정진할 정력도 수승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뛰어 넘을 수가 있으나, 그렇지 못한 분들은 올라 갔다가 내려오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금강지를 성취하면 성자의 경계이기 때문에 범부로 내려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에 대해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고 후퇴가 없는 완전한 부동지를 성취함은 14보살지입니다.

다음에 금타 스님의 해탈십육지 원문을 보겠습니다.

解脫十六地

初. 三歸地

一切의 佛陀는 佛寶, 佛陀께옵서 說하신 敎法은 法, 其 敎法에 依하야 修業하는 者는 僧寶라 云하니라 佛이란 覺知의 義요 法이란 法軌의 義요 僧이란 和合의 義며 寶란 其性의 明淨함과 勢力의 偉大함이 最上 無比하야 能히 世間을 莊嚴하되 永久不變하야 世界에 希有한 故라

三寶에 六種 義가 有하야

一에 同體三寶를 一體三寶 又는 同枏三寶라고도 云하니 三寶一一의 體에 三寶의 義가 有하야 佛의 體上에 覺照의 義가 有함은 佛寶, 軌則의 義가 有함은 法寶, 違諍의 過가 無함은 僧寶며 乃至 僧에 觀智가 有함은 佛寶, 軌則이 有함은 法寶, 和合함은 僧寶일새요

二에 別相三寶를 化相三寶 又는 別體三寶라고도 云하니 諸佛의 三身을 佛寶, 六度를 法寶, 十聖을 僧寶라 云함은 大乘三寶며 丈六의 化身을 佛寶, 四諦․十二因緣의 法을 法寶, 四果․緣覺을 僧寶라 云함은 小乘三寶요

三에 一乘三寶란 究竟의 法身을 佛寶, 一乘의 法을 法寶, 一乘의 菩薩衆을 僧寶라 云하니 「勝?經」「法華經」 等의 義요 四에 三乘三寶란 三乘者를 爲하사 現하신 佛의 三身을 佛寶, 三乘의 法을 法寶, 三乘의 衆을 僧寶라 云함도 亦是 「勝?經」과「攝論」等의 義요

五에 眞實三寶란 佛의 三身을 佛寶, 一切 無漏의 敎理行果를 法寶, 見諦 以上의 三乘聖衆을 僧寶라 云함이오

六에 住持三寶란 佛滅後 世間에 住하는 三寶로서 木佛․畵像 等을 佛寶, 三藏의 文句를 法寶, 剃髮染衣를 僧寶라 云함이니 一․三․五의 三種은 大乘에 局限하고 二․四․六의 三種은 大小乘에 通하니라

비록 三歸戒를 初受할지라도 解脫을 目的 할진댄 반다시 大乘三寶에 歸依할진져

戒란 入道方便이라 不可缺이니 戒相으론 律儀를 攝하고 戒德으론 大道에 通할새 五戒는 戒經의 首位로서 爲先 第一 不殺生戒에 있어 無生의 理를 證하면 大乘이오 不然하면 小乘이니라

일체의 불타(佛陀)는 불보(佛寶)요, 협소한 사람들은 부처님도 꼭 석가모니 부처님만 믿는다거나 또는 같은 정토신앙을 하더라도 꼭 아미타불만 숭상합니다. 이렇게 되면 참 협소합니다. 역사적으로 필요하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지 부처님의 경계가 어느 한 부처님이 있고, 두 가지 부처님이 있다면 참다운 불교가 못됩니다. 그야말로 무장무애(無障無碍)라, 조금도 거리낌이나 한계가 없는 것이고 천지 우주가 바로 불타이기에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法界)를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에 대해서 이부처 저부처로 따로 생각하면 대승적인 생각이 못되는 것입니다. 불타께서 설하신 교법은 법보(法寶), 그 교법에 의하여 수업하는 자는 승보(僧寶)라 말합니다.

불(佛)이란 각지(覺知)의 뜻 즉, 깨닫는다는 뜻이요, 법(法)'이란 법궤(法軌) 곧 우주의 규범이란 뜻이요, 승(僧)이란 화합의 뜻이며, 보(寶)란 기성(其性)이 밝고 청정함과 동시에 그 세력의 위대함이 최상무비(最上無比)하여 능히 세간을 장엄하되 영구불변하여 세계에 희유(希有)한 때문이라.

삼보에 6종의 뜻이 있어서 1에 동체삼보(同體三寶)를 일체삼보 또는 동상(同相)삼보라고도 말하니 삼보 일일의 체에 삼보의 뜻이 있어 불(佛)의 체상(體上)에 각조(覺照) 곧 깨닫고 비춘다는 뜻이 있음은 불보(佛寶)요, 궤칙(軌則)의 뜻이 있음은 법보(法寶), 또는 다투는 허물이 없음은 승보(僧寶)며, 내지 승(僧)에 관찰하는 지혜가 있으면 불보요, 규범이 있음은 법보, 화합함은 승보입니다.

2에 별상삼보(別相三寶)를 화상(化相)삼보 또는 별체(別體)삼보라고도 말하니 제불의 삼신(三身)을 불보, 육도(六度)를 법보, 십성(十聖)을 승보라 말함은 대승삼보며 장육(丈六)의 화신을 불보, 사제(四諦) 십이인연(十二因緣)의 법을 법보, 사과(四果) 연각(緣覺)을 승보라 말함은 소승삼보요.

3에 일승삼보(一乘三寶)란 구경(究竟)의 법신을 불보 일승의 법을 법보, 일승의 보살중을 승보라 말하니 이는 승만경,법화경 등의 뜻이요,

4에 삼승삼보(三乘三寶)란 삼승자를 위하여 현(現)하신 불의 삼신(三身)을 불보, 삼승(三乘)의 법을 법보, 삼승의 중을 승보라 말함도 역시 승만경, 섭론 등의 뜻이요,

5에 진실삼보(眞實三寶)란 불의 삼신(三身)을 불보, 일체 무루(無漏)의 교리행과(敎理行果)를 법보, 견체(見諦) 이상의 삼승성중(三乘聖衆)을 승보라 말함이요,

6에 주지삼보(住持三寶)란 불멸후(佛滅後) 세간에 주(住)하는 삼보로서 목불․화상 등을 불보 삼장(三藏)의 문구를 법보, 체발염의(剃髮染衣)를 승보라 말함이니 1, 3, 5의 삼종은 대승에 국한하고 2, 4, 6의 삼종은 대소승에 통(通)하니라.

비록 삼귀계를 초수(初受)할지라도 해탈을 목적할진댄 반드시 대승삼보에 귀의해야 합니다.

계(戒)란 입도방편(入道方便)이라 불가결이니, 우리가 방편이라 하면 안해도 무방하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보통 세간적인 방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일체경론(一切經論)은 따지고 보면 다 방편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방편은 꼭 지켜야 합니다. 방편에 의지해서 통하고 방편에 의지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계상(戒相)으로는 율의(律儀)를 섭(攝)하고 계덕(戒德)으로는 대도(大道)에 통할새 5계(五戒)는 계경(戒經)의 수위로서 위선 제일 불살생계(不殺生戒)에 있어 무생(無生)의 리(理)를 증하면 대승이요, 그렇지 않으면 소승이니라, 진여불성 자리에 입각해서 계를 지키면 대승인 것이고, 불쌍하니까 안 죽인다는 정도는 계를 지켜도 소승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삼보(三寶)를 풀이하는 것은 모두가 다 불경에 있는 것이니까 보다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승만경이나 법화경이나 경론을 보면 되겠습니다마는 아무튼 이와 같이 육종삼보(六種三寶) 곧 여섯 종류로 삼보를 말해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이 소승삼보는 일차 참고로 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결국은 대승삼보를 의지해야만이 대승적인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승삼보의 요체는 무엇인가? 이것은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이고, 법보는 천지우주의 도리라, 따라서 어떤 것도 불보 가운데 안 들어가 있는 것이 없고, 어떤 도리도 법보 가운데 안들어가 있는 것이 없습니다. 승보는 바로 현상계 모두가 승보입니다. 특히 오늘날은 부처님 도리 곧 우주의 법칙대로 바로 믿을 때입니다. 바로 못 믿으면 필요 없는 갈등과 정력의 소모를 많이 합니다.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공산주의나 따지고 보면 법보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네들은 법보를 제대로 온전히 모르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해서 집착하는 것이지 그것이 법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진실된 법보로 인도하면 되는 것이지 적으로 몰아세워서 싸울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二. 信 願 地

證前엔 迷信이오 證後엔 正信이니 願도 迷信에 根據하면 俗人의 願이오 正信에 立脚하면 道人의 願이며 비록 正信의 發願이라도 小法 에 止하면 小乘이오 다시 大願을 發하야 動搖가 無하면 大乘이니 信과 願에 있어 其 宜를 得하야 거듭 成就할지니라

聲聞十地에 있어 初受三歸地가 곧 初 三歸地며 二 信地와 三 信法地가 곧 信願地와 等하나 信法에 있어 生滅四諦나 無生四諦에 局하지 않고 無量四諦 又는 無作四諦를 信하야 藏․通․別․圓의 四敎義를 會通하야 벌써 此地에서 會三歸一의 理를 達하고 究竟 成就를 目的하야 먼저 信心과 願力을 成流하니라 ,

2에 신원지(信願地)라, 신심과 원력을 세우는 경지입니다.

증전(證前)에는 미신(迷信)이요, 증후(證後)에는 정신 (正信)이니, 사실 견성오도를 못할 때는 항시 회의가 남습니다. 자기 스스로 불성을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을 안다고 해도 마음속에는 의심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원(願)도 미신에 근거하면 속인의 원이오, 정신에 입각하면 도인의 원이며, 비록 정신(正信)의 발원이라도 소법(小法)에 그치면 소승이요, 다시 대원을 발하여 동요가 없으면 대승이니, 신과 원에 있어 그 참뜻을 터득하여 거듭 성취해야 합니다.

성문 10지에 있어 초수삼귀지(初受三歸地)가 곧 초 삼귀지며, 2. 신지(信地)와 3. 신법지(信法地)가 곧 신원지(信願地)와 등(等)하나, 이것은 각 계위를 회통하여 대비한 것입니다. 신법(信法)에 있어서 생멸사제(生滅四諦)나 무생사제(無生四諦)에 국집하지 않고 무량사제(無量四諦) 또는 무작사제(無作四諦)를 신(信)하여 장․통․별․원(藏通別圓)의 사교의(四敎義)를 회통(會通)하여 이 자리에서 회삼귀일(會三歸一)의 리(理)를 달하고, 구경성취를 목적하여 먼저 신심과 원력을 성취하여야 합니다.

三. 習 忍 地

伏忍․信忍․順忍․無生忍․寂滅忍 等 五忍 中 前 四忍에 各有上․中․下 三品하고 後 一忍에 有 上․下 二品하니 特히 伏忍에 있어 上을 道種忍, 中을 性忍, 下를 習忍이라 稱하는 바 聲聞乘의 四內凡夫地(五停心觀을 修하는 位) 五 學信戒地(三學 成就의 位)에 屬하고 緣覺乘의 一苦行具足地(戒行을 修하는 位) 二 自覺甚深十二因緣地(十二因緣의 觀法을 修하는 位) 三 覺了四聖諦地(四諦觀을 修하는 位) 等에 屬하나 三 習忍地란 小乘의 修法에 局하지 않고 無量法門으로써 隨機應量하야 修習安忍을 成就함이니라

제3은 습인지(習忍地)라,

복인(伏忍), 신인(信忍), 순인(順忍), 무생인(無生忍), 적멸인(寂滅忍) 등 5인(忍) 중 전 4인에 각각 상, 중, 하 삼품(三品)이 있고 후 일인(一忍)에 있어 상, 하 이품(二品)이 있으니 특히 복인(伏忍)에 있어, 복인은 번뇌를 다 끊은 것이 아니라 번뇌를 눌러 억제하는 경지입니다. 따라서 범부지에서는 강인하게 번뇌를 억제해야 합니다. 요사이 개방주의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보는대로 자유롭게 하려고 합니다만 그래버리면 수행도 못하고 불교가 안되어 버립니다. 마땅히 부당한 것은 버리고 눌러야 합니다.

복인에 있어 상(上)을 도종인(道種忍), 중(中)을 성인(性忍), 하(下)를 습인(習忍)이라 칭하는 바, 복인을 이렇게 셋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상품은 도종인으로서 이미 도(道)의 종자가 심어져서 범하려고 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고기를 먹으려해도 먹을 수 없습니다. 중품은 성인(性忍)이라, 성품에 종자가 깊어가는 것이고 하품은 습인(習忍)이라, 습인은 강한 의지로 공부를 익혀가는 것입니다.

성문승의 4. 내범부지(內凡夫地) 곧 오정심관(五停心觀)을 닦는 자리나, 5. 학신계지(學信戒地) 곧 삼학(三學) 성취의 자리에 속하고, 연각승의 1. 고행구족지(苦行具足地) 곧 계행을 닦는 자리 2. 자각심심십이인연지(自覺甚深十二因緣地) 곧 십이인연의 관법을 닦는 자리 3. 각료사성제지(覺了四聖諦地) 곧 사제관을 닦는 자리 등에 속하나, 습인지란 소승의 수법(修法)에 국집하지 않고 무량법문으로써 근기에 따라서 잘 익혀 편안하게 감내하는 경즉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보통 초심 수행자는 습인지에 있습니다. 기회를 만들어 근본불교도 공부하고 율장도 공부를 해야 합니다. '자기 스승이 말했다고 해서 꼭 한 가지만 생각하고 말아버리면 그만치 국량이 좁아져서 법집(法執)하기 쉽습니다. 불교란 천치 우주를 통섭(通攝)한'것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확 열어서 좋은 것은 모조리 받아들여 조도(助道)로 삼아야 합니다. 특히 이조(李朝) 때는 불교가 중국과 교류되지 못하고 고려말(高麗末) 불교 그대로 산중에서 국집하게 되였습니다. 또한 8․15 해방 뒤에도 제대로 발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四. 加 行 地

어느 修法이든지 得正하면 可하니 習忍을 成就한 後 依法 結制하고(冬安居가 絶好함) 親驗者의 外護指導下에서 一心不亂하야 三密을 守하며 勇猛精進으로써 間斷없이 加行하면 반다시 煖位에서 明得定, 頂位에서 明增定, 忍位에서 印順定, 世第一法位에서 無間定을 次第 成就하나니 이를 五相成身位에 配하면 明得定은 通達心의 前相이오 明增定은 곧 第一通達菩提心位며 印順定은 第二修菩提心位며 無間定은 第三 成金剛心位니 곧 四禪을 通貫한 一心支로서 그 極點이 滅盡定일새 無間道의 直後가 解脫道니라

그리고 明得定과 明增定에서 性忍을 成就하나니 이가 共十地의 第二 性地요 印順定에서 道鐘忍을 成就하나니 이가 共十地의 第三 八忍地인 同時에 聲聞乘의 第六 八忍地(聲聞見道의 位며) 性忍과 道種忍이 아울러 緣覺乘의 第四 甚深利智地(甚深의 無相智를 生하는 位)와 第五 八聖道地(八聖道를 修하는 位)와 第六 覺了法界虛空界衆生界地(이의 三界를 覺了하는 位) 等에 該當하니라

4에 가행지(加行地)라, 어느 수법(修法)이든지 득정(得正)하면 곧 본체를 여의지 않고 정당성을 얻으면 되는 것이며, 습인을 성취한 후 법대로 결제(結制)하고, 동안거(冬安居)가 절호(絶好)합니다. 인도 지방은 우기(雨期)가 있으므로 하안거(夏安居)이지만 동북아시아 지방은 겨울이 되어야 훨씬 긴장도 되고 잡연(雜緣)도 적게 됩니다.

경험자의 외호(外護) 지도 하에서 정진하는데, 역시 스승이 있어야겠지요. 마장 때문에 공부가 막히거나 무슨 경계가 나와서 산란할 때는 적절한 지도를 못 받으면 안됩니다.

일심불란(一心不亂)하여 삼밀(三密)을 지키며,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본질적으로 삼밀이라 합니다. 용맹정진으로써 간단없이, 꼭 수행은 간단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습인도 성취가 되고 업장의 습기가 녹아지는 것이지 하다말다 하면조금 나갔다가도 다시 후퇴해버립니다. 한철 공부하고 나서 해제철에 그렁저렁 방만해 버리면 공부 기운이 간 곳이 없게 됩니다. 가행정진(加行精進)하면 반드시 난위(煖位)에서 명득정(明得定) 곧 마음이 밝아오는 경지입니다.

그리고 정위(頂位)에서 명증정(明增定)으로 밝음의 정도가 증가되고 또 안 쉬고 닦아나가면 참으로 '모두가 비었구나 이 몸뚱이도 별것이 아니구나' 나도 공(空)하고 만법이 무상함을 사무치게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느끼면 함부로 망동할 수가 없겠지요 이 자리가 인순정(印順定)입니다.

인위(忍位)에서 인순정(印順定), 다시 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에서 무간정(無間定)인데 이 자리는 세간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입니다. 번뇌가 낄 간격이 없고 오직 청정한 정념만 지속되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차례로 성취하는 것이니,

이를 오상성신위(五相成身位) 곧 단계로 공부해가는 밀교의 법상인 오상성신위에 배치한다면 명득정은 통달심(通達心)의 전상(前相)이요, 명증정(明增定)은 곧 제1 통달보리심위(通達菩提心位)라, 명증정을 얻으면 마음이 밝아져서 무슨 경전이든 문자 해석만 되면 그 뜻이 술술 풀이가 되므로 통달보리심위라 합니다. 따라서 강원 교육을 받고도 참선을 못하면 제대로 소화를 못하는 것입니다. 강사가 되려는 분은 더욱 꼭 참선과 같이 병행해야, 견성오도는 미처 못한다 하더라도 통달보리심이 되어 경전을 바르게 지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순정(印順定)은 제2 수보리심위(修菩提心位), 곧 통달보리심을 더욱 닦아 익혀지는 자리입니다.

무간정(無間定)은 제3성금강심위(成金剛心位)니, 아직 금강심을 확실히는 못 증(證)한다 하더라도 금강심을 어렴풋이 증(證)하니 곧 4선(四禪)을 통관한 일심지(一心支)로서, 일심지는 4선정을 통관합니다. 일심지(一心支)란 동요되지 않는 맑은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초선 들어가나 2선, 3선, 4선 들어가나 일심지는 그대로 지속이 되는 것입니다. 일심지가 안되면 선정이 못되는 것입니다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마음이 흐트러뜨리지 않는 경계입니다. 지금 세간에서 주체의식(主體意識)이라는 말을 하지마는 사실은 일심지(一心支)가 되어야 참다운 주체의식이 됩니다. 그전에는 항시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마음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 극점이 멸진정(滅盡定)이며 무간도(無間道)의 직후가 해탈(解說)입니다. 따라서 금강지(金剛地)부터는 모두가 해탈도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명득정과 명증정에서 성인(性忍)을 성취하는데 이자리가 공십지(共十地)의, 공십지는 성문․연각․보살 등의 계위(階位)를 다 합하여 이루어진 계위를 말합니다. 제2 성지(性地)요 인순정에서 도종인을 성취하닌 이가 공십지의 제3 팔인지(八忍地)인 동시에 성문승의 제6 팔인지 곧 성문 견도(見道)의 자리인데, 성문 견도(見道)는 대승의 참 견도(견성)가 아니며 수자(修者)가 인순정(印順定)에 들어가면 마음이 밝아서 기분이 쇄락하고 지견(知見)이 발하여 일체법을 헤아려 알 듯한 경계이므로 아만심을 내어 참 견성했다고 날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인(性忍)과 도종인이 아울러 연각승의 제4 심심이지지(甚深利智地), 곧 심심의 무상지(無相智)를 생하는 자리와, 제5 팔성도지(八聖道地), 팔성도를 닦는 자리와, 제6 각료법계허공계중생계지(覺了法界虛空界衆生界地), 삼계를 각료(覺了)하는 자리 등에 해당합니다.

五. 金 剛 地

菩薩이 將登正覺할새 皆坐 金剛座라 說하신 金剛座란 곧 金剛地로서 五相成身位次의 第四 成金剛身位니 解脫道에 第一步를 印한지라 共十地의 第四 見地요 또 聲聞乘의 第七 須陀洹地(預流果의 位)며 緣覺乘의 第七 證寂滅地(緣覺 見道의 位)인 同時에 第八 六通地 (六神通을 得하는 位)의 初步니

換言하면 五 金剛地란 地層의 最低인 金剛輪이 獨露한 境地로서 ★★525의 去★함 같고 籠鳥의 說出함 같이 生死網을 出離하야 衆生身中의 金剛佛性을 見證한 者니 진실로 本格的 肉眼을 成就할새 漸次하야 天眼․法眼․慧眼․佛眼을 得할지라 修者는 此地를 成就하야사 비로소 金剛薩?라 名하니라

5에 금강지(金剛地)라, 보살이 장차 정각(正覺)에 오르려 할때, 금강불성(金剛佛性) 곧 자기자성(自己自性), 우주의 실상(實相)을 깨닫는 것이므로 정각이라 하는데 온전한 정각은 습기를 다 없앤 보살십지를 거쳐야 합니다. 그러니까 정각의 초보인 셈입니다.

개좌(皆坐) 금강좌(金剛坐)라 설하신 금강좌란 곧 금강지 (金剛地)로서, 금강좌라고 하는 것은 자기 생명의 본질이 훤히 빛나서 금강불성으로 화(化)해 버린 경계입니다.

밀교의 수행차서인 오상성신위차(五相成身位次)의 제4 성금강신위(成金剛身位)니 해탈도에 제일보를 자리하였으며 그 자리가 공십지(共十地)의 제4견지(具地)요, 또 성문승의 제7 수다원지(須陀洹地) 곧 예류과의 자리며, 연각승의 제7 증적멸지(證寂滅地) 곧 연각 견도(見道)의 자리인 동시에 제8 육통지(六通地) 곧 육신통(六神通)을 얻는 자리의 초보니, 육신통을 하려면 필수적으로 금강지를 먼저 성취해야 합니다.

다시 바꿔말하면 5 금강지란 지층(地層)의 최저인 금강륜(金剛輪)이 나타난 경지로서 무쇠의 녹을 제거함과 같고 새장에 갇혀있는 새가 새장을 탈출함과 같이 생사(生死)의 그물을 떠나야 합니다. 범부 중생은 새장의 새처럼 생사(生死)의 그물에 갇혀 있습니다. 공부를 좀 했다 하더라도 금강불성을 증명하지 못하면 모두가 다 번뇌의 새장에 갇혀 있는 신세입니다.

중생 몸의 실상인 금강불성을 깨달아 증명하였고 진실로 본격적인 육안(肉眼)을 성취하였으니, 우리 육안은 탐진치에 어두워져 바로 보지 못하니 온전한 육안이 못됩니다. 금강지를 성취해야 바로 보게 됩니다. 점차로 천안(天眼), 법안(法眼), 혜안(慧眼), 불안(佛眼)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 금강지를 성취하여야 비로소 금강살타(金剛薩?) 곧 금강지를 성취한 보살이라 이름하게 됩니다.

六. 喜 樂 地

三界를 九地로 區分할새 欲界는 五趣가 不同하나 同 一의 散地(欲界의 果報에 定心이 無함으로 써라) 임으로 一地로 合하고 色界와 無色界를 各 四地로 分하야 一에 欲界五趣地니 欲界내에 地獄․餓․鬼․畜生․人․天의 五趣(阿修羅는 天에 攝함) 가 有한바 이를 合하야 一地를 成한 者며 二에 離生喜樂地니 欲界의 生을 離함에 因하야 喜受와 樂受가 生하는 地로서 限․耳․身․意의 四識만이 有하고 鼻․舌 二識이 無함으로 無分別의 樂受가 相應하야 意識에 有分別의 喜受가 相應하니 곧 色界의 初禪天이며 三에 定生喜樂地니 初禪定의 喜樂을 因으로 하고 更히 勝妙의 喜樂이 生하는 地로서 此地 已上엔 總히 五識(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을 離하고 但 意識만이 有함으로 或 喜受가 相應하고 或 樂受가 相應하니 곧 二禪天이며 四에 離喜妙樂地니 喜受 오히려 鹿心이므로 二禪의 喜를 離하고 獨히 靜妙無分別의 樂에 住하는 地로서 곧 三禪天이며 五에 捨念淸淨地니樂受 오히려 粗心임으로 이를 離하고 淸淨無爲한 捨受의 念에 住하는 地로서 곧 四禪天이며(以上 四地는 色界임) 六에 空熱臺處地니 色界의 色을 厭하야 空을 思하되 空에 邊際가 無한 覇解를 作하는 者가 生하는 地로서 卽 無色界의 第一天이며 七에 識無邊處地니 前의 外空을 厭하야 內識을 思하되 識에 邊際가 無한 顯解를 作하는 者가 生하는 地로서 卽 無色界의 第二天이며 八에 無斫有處地니 前의 內識을 厭하고 無所有를 思하야 無昕有의 顯解를 作하는 者가 生하는 地로서 卽 無色界의 第三天이며 九에 非想非非想處地니 前地와 如한 處楣이 無(非想)하고 極히 微細한 想念(非非想)은 有하는 地라 卽 無色界의 第四天으로서 三界 中 第一의 果報니라 蓋 無色界를 識界, 色界를 根界, 欲界를 境(塵)界로 區分할 수 있으나 各界가 各具 三界하야 橫으론 區分할 수 얼고 縱으로 分位한다면 欲境界를 島塵三界, 色根界를 細塵三界, 無色識界를 極跋三界라 稱할가, 何如閭 三界란 根境識의 別稱으로서 相的으로 境이오 性的으론 根이며 分別的으론 識일새 五蘊이 各具 五蘊하야 區別키 難하나 一如한 中에 性相이 分明하니 了別이 不無니라 修者는 金剛座에 坐하야 空無邊處를 觀念하면 離生喜樂地에 到하 고 識無邊處를 觀念하면 定生喜樂地에 無昕有處를 觀念하면 離喜妙 樂地에, 非想非非想處에 住하면 捨念淸淨地에 到할새 六 喜樂池란 離生喜樂과 定生喜樂이 生하는 地로서 聲聞乘의 第八 斯陀含地(-來果의 』刻와 共+地의 第五 薄地에 該當하고 五 金剛池와 六 喜樂地를 合해서 菩薩讀치 初 歡喜地에 當하니라

6에 희락지(喜樂地)란 삼계(三界)를 9지(九地)로 구분하여 욕계(欲界)는 5취(趣) 즉 지옥․아귀 ․축생․천상․인간이 같지 않으나 동일한 산란심의 경계이므로 다 합하여 산지(散地)라 하고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를 각각 4지(地)로 구분합니다.

1에 욕계오취지(欲界五趣地)니, 욕계 내에 지옥․아귀․축생․ 인(人)․천(天)의 오취(아수라는 천(天)에 포섭함)가 있는바 이를 합하여 일지(一地)를 이룬 것이며,

2에 리생희락지(離生喜樂地)니, 욕계의 생을 떠남으로 말미 맘아 회수(희受) 곧 의식에 나오는 기쁨과, 락수(樂受) 곧 몸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생(生)하는 지(地)로서 안․이․신․의의 4식(識)만이 있고, 비․설(鼻舌) 2식(識)이 없으므로 무분별의 락수가 상응하며 의식에 유분별의 희수가 상응하니 곧 색계의 초선천이며, 초선에 들어가면 냄새도 모르고 맛도 모르는 것입니다.

3에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니, 초선정의 희락(喜樂)을 인(因)으로 하고 다시 승묘(勝妙)한 희락이 생하는 경지로서 이 지(地) 이 상에는 모두 오식(五識: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을 여의고 곧 눈으로 봐도 안 보이고 귀로 들어도 안 들리고, 코로 냄새 맡아도 냄새가 안 나고, 입맛도 모르고, 몸에 촉감도 모르고 다만 의식(意識)만이 있으므로 2선천 이상은 의식뿐이고 5식은 없습니다. 혹 희수가 상응하고 혹 락수가 상응하니 곧 2선천이며, 희수나 락수가 서로 교차한다는 말입니다.

4에 리희묘락지(離喜妙樂地)니, 기쁨을 여의고 신묘한 안락인 묘락을 얻는 경지니 희수도 오히려 추심(추★528心)이므로, 추심은 거치러운 마음으로 기쁨도 공부로 보아서는 거치러운 번뇌입니다. 2선의 희(喜)를 떠나고 오로지 정묘한 무분별의 안락에 머무는 경지로서 곧 3선천이며, 5에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니, 모든 번뇌 망상을 떠나 청

정한 경지니, 락수(樂受)도 오히려 거치러운 마음이므로 이를 떠나고 청정하고 조금도 조작이 없고 고나 락을 받는 것이 전혀 없는 생각에 머무는 경지로서 곧 4선천인데 이상 4지(地)는 색계입니단

6에 공무변처지(空無邊處地)니, 색지(색계)의 색을 싫어하여 공(空)을 생각하되 공에 한계가 없다고 관찰하는 지혜를 짓는 자가 생하는 경지로서 즉 무색계의 제 1천이며.

7에 식무변처지(識無邊處地)니, 앞의 외공(外空)을 싫어하여 내식(內識)을 생각하되 식(識)에 한계가 없다고 관찰하는 자가 생(生)한 경지로서 무색계의 제 2천이며,

8에 무소유처지(無所有處地)니, 앞의 내식(內識)을 싫어하고 무소유를 생각하여 무소유를 관찰하는 지혜있는 자가 생하는 경지로서 즉 무색계의 제 3천이며,

9에 비상비비상처지(非想非非想處地)니 앞의 경지와 같은 거치러운 추상(★想)이 없고〔非想〕, 극히 미세한 상념〔非非想〕만 있는 경지 곧, 삼계의 꼭대기인 비상비비상처도 아직은 생각인가 아닌가 하는 미세한 생각은 남아 있다는 경지입니다. 이러한 경계가 무색계의 제 4천으로서 삼계 중 제일 수승(殊勝)한 과보(果報)입니다.

그런데 무색계를 식계(識界), 색계를 근계(根界), 욕계를 경(境:塵)계로 구분할 수 있으나 각계 (各界)가 각각 삼계(三界)를 갖추어서 다만 현상적인 상(相)만 차이가 있을 뿐이지' 성품 차원에서는 다 일여평등(一如平等)합니다.

그래서, 횡(橫)으로는 구분할 수 없고, 횡으로는 하나가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구분할 수 없습니다. 우주란 따로따로 뿔뿔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로 다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사, 김씨 박씨가 따로 따로 있다고 알지만 현대 물리학으로만 보더라도 산소나 수소 등의 원소로 구성된 몸이기에 산소나 수소 등의 원소 차원으로는 결국 다 붙어 있는 것입니다. 원소의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다 붙어 있는 것인데 하물며 원소를 구성한 근본 성품인 불성(佛性)차원에서는 나나 너나 공간이나 모두가 다 동일한 불성뿐입니다. 근래서 횡으로 보아서는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근본에서, 진여불성 자리에서 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지금은 더욱 그럴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괜히 네 문중 내 문중, 네 종파 내 종파, 내 종교 네 종교로 부질없는 소모와 갈등만 할 뿐입니다.

종(縱)으로 나눈다면 욕경계(欲境界)를 추진삼계(추★530塞三界), 번뇌가 거치로운 경계, 색근계(色根界) 세진삼계(細塵三界) 번뇌가 좀 미세한 경계, 무색식계(無色識界)를 극미삼계(極微三界) , 번뇌가 아주 미세한 경계로 나눌 수 있겠으나, 하여튼, 삼계란 근(根), 경(境), 식(識)의 별칭으로서, 우리 마음의 번뇌로 본다면 6근, 6경, 6식이 맑아 들어가는 정도를 별칭한 것입니다. 그래서 상(相)적으로는 경(境)이오, 성(性)적으로는 근(根)이며, 분별적으로는 식(識)일새, 오온(五蘊)이 각기 오온을 갖추어 구별하기 어려우나 평등일여한 가운데 성상(性相)이 분명하니 또한 구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행자는 금강지를 성취하여 공무변처를 관념(觀念)하면 리생희락지에 이르고, 식무변처를 관념하면 정생희락지에, 무소유처를 관념하면 리희묘락지에, 비상비비상처에 머물면 사념 청정지에 이르는 것인데, 6 희락지란 리생희락과 정생희락이 생하는 경지로서 성문승의 제8 사다함지(斯陀含地) 즉 일래과(一來果)로, 욕계 번뇌가 마저 녹지 못해서 욕계에 한번 오는 위(位)와 공십지(共十地)의 제5 박지(薄地)에 해당하구 5 금강지와 6 희락지를 합해서 보살승의 초환희지에 해당합니다. 여기까지가 보살초지에 해당합니다. 금타 스님께서는 보살십지를 표준하고 여러 가지 계위를 대비(對比) 회통(會通)시킨것입니다.

七. 離 垢 地

離喜妙樂의 境界를 거쳐 捨念淸淨地에 到하는 池니 聲聞乘의 九阿那含地(不還果의 位)에 當하고 菩薩乘의 第二地에 合하며 共十地의 第六 離欲地에 當하니라

7. 리구지(離垢地)라, 거치러운 희수(喜受)를 여의고 묘락(妙樂)을 얻는 경계를 거쳐서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에 이르는 경지니, 성문승의 9 아나함지 즉 불환과(不還果)의 위(位)로 욕계 번뇌를 떠났으니 욕계에 다시 오지 않는 자리에 해당하고, 보살승의 제 2지에 합(合)하며 공십지(共十地)의 제6 리욕지(離欲地)에 해당합니다.

八. 發 光 地

加行功德으로 一時的으로 三界를 出離하매 心光이 發하야 九次第定의 極位인 滅受想定(滅盡定)을 비로소 吟味하는 地니 菩薩乘의 第三地에 合하니라

8. 발광지(發光地)라, 수행자는 가행공덕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간단(間斷)없이 공부해야 앞으로 나가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면 안됩니다. 따라서 게으름이라는 것이 수행자로서는 큰 원수입니다. 혼침(?沈)과 도거(掉擧)도 가행공덕으로서 사라지는 것인데 가행을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할 별도리가 없습니다. 정진을 않고서 말로만 알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가행공덕으로 일시적으로 삼계를 출리(出離)하니 심광(心

光)이, 마음의 광명이 발하여 구차제정(九次第定) 곧 4선정(四禪定), 4공정(四空定), 멸진정(滅盡定)이 구차제정입니다.

구차제정은 세존께서 보리수 아래서 성도 하실 때도 구차제정에 의거하고, 열반드실 때도 구차제정에 의거했습니다. 아함경(阿含經)이나 성도기(成道記)에 다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인도지방의 도인들은 대체로 이와 같이 구차제정에 의거했고, 현재 우리도 공부하는데 있어서 이 4선정, 4공정, 멸진정의 한계를 알아야 자기 공부를 정확히 점검할 수가 있고 우리 번뇌 습기를 온전히 여읠 수가 있습니다.

현대 과학만능 시대에 있어서 구차제정(九次第定) 법문은 부처님께서 몸소 실천하시고 역설한 가장 합리적인 선정(禪定)의 차서이니 우리 수행자는 깊이 참고해야 할 것입니다.

이 발광지(發光地)에서 삼계(三界) 번뇌를 소멸함에 따라 심광(心光)이 발하여 구차제정의 마지막 자리인 멸수상정(滅受想定) 곧 멸진정(滅盡定)을 비로소 음미하는 경지이니 보살승(菩薩乘)의 3지(三地)에 해당합니다.

九. 精 進 地

菩薩十地에서 十波羅蜜을 成就하고 十眞如를 證하니歡喜地에서 施波羅蜜을 成就하고 遍行眞如(我․法 二空의 所顯으로서 諸法에 通行함으로)를 證하며 離垢地에서 戒波羅蜜을 成就하고 最勝眞如(無邊의 德을 具足하야 一切法에서 最勝함으로)를 證하며 發光地에서 忍辱波羅蜜을 成就하고 勝流眞如(此 眞如 所流의 敎法이 至極히 殊勝함으로)를 證하며 ?慧地에서 精進波羅蜜을 成就하고 無攝受眞如(繫屬한 바 無하야 我執 等에 依하고 또 取하는 바 않임으로)를 證하며 難勝地에서 禪定(靜★532) 波羅蜜을 成就하고 無別眞如(差別의 類가 無하야 眼 等의 異類가 有함과 如함이 않임으로)를 證하며 現前地에서 般若波羅蜜을 成就하고 無染淨眞如(本性이 無染한지라 後에 다시 淨해진다고 說할 수 없음으로)를 證하며 遠行地에서 方便善巧(廻向方便善巧와 拔濟方便善巧)波羅蜜을 成就하고 法無別眞如(多數法에 種種으로 安立하되 別異가 無함으로)를 證하며 不動地에서 願(求菩提願과 利樂他願波羅蜜을 成就하고 不增減眞加(增減의執을 離하야 淨染에 따라 增減됨이 아님으로)를 證하는 同時에 또 相土在所依眞如를 證할 수 있으니 이를 證得已하면 身相을 現하고 國土를 示함에 自在하며 善慧地에서 力(修習力과 思擇力) 波羅蜜을 成就하고 智(受用法樂智와 成熟有情智)自在所依眞如를 證하니 이를 證得已하면 無得解에 自在를 得하며 法雲地에서 智波羅蜜을 成就하고 業自奠所依眞如를 證得已하면 普히 一切 神通의 作業陀羅尼定門에서 皆 自在를 得하니라

眞如性은 實로 差別이 無하나 勝德에 따라 十種을 假立하나니 菩薩初地 中에서 이미 一切에 達하야 能히 證行할 수 있지만 아직 圓滿치 못함으로 圓滿하기 爲함인져,

9에 정진지(精進地)라, 보살십지에서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성취하고 십진여(十眞如)를 증험하게 되는데, 환회지(歡喜地)에서 시바라밀(施波羅蜜)을 성취하고 아(我) ,법(法), 이공(二空)의 경계에서 제법에 두루 통하므로 변행진여(遍行眞如)를 증험하며, 리구지(離垢地)에서 계바라밀(戒波羅蜜)을 성취하고, 리구지가 되어야 과거 지었던 죄를 소멸합니다. 단순히 참회한다고 해서 과거에 지었던 죄가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은 녹아지나 이른바 4바라이(四波羅夷)죄는 리구지에 들어가야 없애는 것입니다. 리구지를 성취 못하고서는 파계의 습기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무변(無邊)의 덕을 구족하여 일체법에서 최승함으료 최승진여(最勝眞如)를 증험하며, 발광지(發光地)에서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을 성취하고, 이 진여(眞如)에서 유출(流出)되는 교법이 지극히 수승하므로 승류진여(勝流眞如)를 증험하며,

염혜지(?慧地)에서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을 성취하고, 걸리는 바 없어서 아집 등에 의하고 또 취하는 바 아니므로 무섭수진여 (無攝受眞如)를 증험하며,

난승지 (難勝地)에서 선정 (禪定: 靜★534) 바라밀(波羅蜜)을 성취하고, 차별의 종류가 없으니 안(眼)․이(耳) 등의 구별이 없으므로 무별진여(無別眞如)를 증험하며,

현전지(現前地)에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성취하고, 본성이 본래 오염됨이 아니니 후에 다시 맑힌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무염정진여(無染淨眞如)를 증험하며,

원행지(遠行地)에서 방편선교바라밀(方便善巧波羅蜜) 곧 모든 공덕을 회향(廻向)하는 방편과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바라밀을 성취하고, 다수법에 종종으로 안립(安立)하되 다름없으므로 법무별진여(法無別眞如)를 증험하며, 부동지(不動地)에서 원바라밀(願波羅蜜) 곧 구보리원(求菩提願)과 이락타원(利樂他願)바라밀을 성취하고, 증감(增減)의 집착을 떠나서 정염(淨染)에 따라 증감됨이 아니므로 부증감진여(不增減眞如)를 증험하는 동시에, 또 상토자재소의진여(相土自在所依眞如)를 증험할 수 있으니 이를 증득(證得)하게 되면 몸을 나타내고 국토 자연을 나타내는데 자재하며, 이 경지는 자기 몸을 마음대로 작게도 크게도 할 수 있고 또는 다른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통지혜입니다. 지금 원자력이 무시무시한 재주를 부리고 있지만 그런 것은 불성 가운데 들어있는 능력의 일단에 불과합니다. 불상은 대소, 시비, 선악의 차별이 없는 무한공덕이기 때문에 크다 작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겨자씨 속에다 삼천대천 세계를 다 집어넣는다 해도 조금도 줄어지게 안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도리를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선혜지(善慧地)에서 력바라밀(力波羅蜜) 곧, 수습력(修習力)과 사택력 (思擇力)바라밀을 성취하고, 지(智:受用法樂智와 成熟有情智) 자재소의진여(自在所依眞如)를 증험하니 이를 증득(證得)하게 되면 거리낌없는 지혜에 자재하게 되며,

법운지(法雲地)에서 지바라밀(智波羅蜜)을 성취하고 모든 업(業)을 자유자재하는 진여를 증득하면 일체 신통 경계에 자재하게 됩니다.

진여성(眞如性)은 실로 차별이 없으나 원만하고 수승한 덕(德)에 따라 십종(十種)을 잠시 구분하여 세운 것인데 보살초지 중에서 이미 일체에 달(達)하여 능히 증험하고 행할 수 있으나 아직 원만치 못함으로 원만케 하기 위하여 부연 설명한 것입니다.

解脫十六地에 있어 七․八․一 의 三地는 菩薩 十地의 二․三․六의 三地名 그대로, 九․十의 二地는 十波羅蜜 中 四․五의 冠詞를 引用하고 十二․十三․十四․十五․十六의 五地는 瑜伽七十地 中 十三 聲聞地 十四 獨覺地 十五 菩薩地 十六 有餘依地 十七 無餘依地 等과 共十地의 七 聲聞地 八 支佛地 九 菩薩地 佛地 等을 參酌한者니 對照할진져

해탈십육지에 있어 7, 8, 11의 3지(地)는 보살십지의 2, 3, 6의 3지명(地名) 그대로이고 9, 10의 2지는 십바라밀중 4, 5의 관사(冠詞: 머리말)를 인용하고 12, 13, 14, 15, 16의 5지는 유가십칠지(瑜伽十七地) 중(유가는 밀교의 유가사지론인데 굉장히 훌륭한 론장입니다. 유가사지론은 무착보살이 미륵보살의 감응을 받아서 저술한 것입니다.) 13 성문지, 14 독각지, 15 보살지, 16유 여의지, 17 무여의지 등과 공십지(共十地)의 7 성문지, 8 지불지, 9 보살지, 10 불지(佛地) 등을 참작한 것이니 대조하면 되겠습니다.

十. 禪 定 地

菩薩의 五 難勝地에 當함

十一. 現 前 地

菩薩乘의 六 現前地에 合함

十二. 羅 漢 地

聲聞乘의 極果인 十阿羅漢地 卽 無學果의 位와 緣覺乘의 九 徹和蜜地 卽 無學果를 證하는 位와 菩薩乘의 七 遠行地와 共+地의 七已辨地 卽 阿羅漢果의 位에 當할새니라

十三. 支 佛 地

緣覺乘의 極果인 十習氣漸薄地로서 習氣를 侵害하는 催저 共十地의 八 支佛地에 合하고 證理邊으론 菩薩乘의 八 不動地에 當하니라

十四. 菩 薩 地

菩薩乘의 九 善慧地와 共十地의 九 菩薩地에 合當하니라

十五. 有 餘 地

瑜伽十七地 中 第十六 有餘依地 略稱으론서 菩薩乘의 終地인 十法雲地에 當하고 共十地론 九 菩薩地에 攝하며 또 等覺位도 이에 含容되나 因位의 等覺이란 五十位의 總代名詞라 云謂 할 수 있음으로 이를 略함

10에 선정지(禪定地)라, 보살승의 5. 난승지에 해당하며,

11에 현전지(現前地)라, 보살승의 6. 현전지에 합당하고,

12에 나한지(羅漢地)라, 성문승(聲聞乘)의 마지막 자리인

10. 아라한지 즉 무학과(無學果)의 자리와 연각승(緣覺乘)의 9. 철화밀지(微和蜜地) 즉 무학과를 증득하는 자리와 보살승의 7. 원행지와 공십지(共十地)의 7. 이변지(已辨地) 즉 아라한과의 경지에 해당합니다.

13에 지불지(支佛地)라, 연각승의 마지막 끝자리인 10. 습기점박지(習氣漸薄地)로서 습기를 침해하는 경계니 공십지의 8.지불지에 합하고 원리를 증명하는 의미에서는 보살승의 8. 부동지에 해당합니다.

14에 보살지(菩薩地)라, 보살승의 9. 선혜지와 공십지의 9. 보살지에 합당합니다.

15에 유여지(有餘地)라, 유가십칠지(瑜伽十七地) 중 제 16. 유여의지(有餘依地)의 약칭으로서 보살승의 마지막 끝자리인

10. 법운지에 해당하고 공십지로는 9. 보살지에 들어가며 또 등각위(等覺位)도 이에 포함되나 인위(因位)의 등각이란 오십위 (五十位)의 총 대명사라 말할 수 있으므로 이를 생략합니다.

十六. 無餘地

瑜伽十七地의 終位인 無餘依地의 略稱으로서 共十地의 十佛地에 當하는 妙覺의 位니 四覺 中 本覺을 除하고 十六地에 按配하면 이가 究竟覺이오 四地까지가 相似覺 五地부터 隨分覺이며 五忍으로 按配하면 四地까지 伏忍, 八地까지 信忍, 十地까지 順忍, 十四地까지 無生忍, 終二地가 寂滅忍으로서 三地까지가 下伏忍(習忍), 四 加行地 中 明得定과 明增定이 中伏忍(性忍), 印順定이 上伏忍(道種忍), 五․六 合地가 下信忍, 七地가 中信, 八地가 上信忍, 九地가 下順忍, 十地가 中順忍, 十一地가 上順忍, 十二地가 下無生忍, 十三地가 中無生忍, 十四地가 上無生忍, 十五地가 下寂滅忍, 六十地가 上家滅忍인 바 이를 十四忍이라고도 云하고 上寂滅忍을 除하야 十三觀門이라고도 謂하나니.

且 空․性․相 三宗은 元來 橫的으로 揀別할 바 않이오 縱的으로 그 程度를 各示한다면 伏․信․順 等 三忍은 相宗이오 無生忍은 性宗이며 寂滅忍은 空宗이니라 그리고 四加行位․十信․十住․十行․十廻向․十地․等覺․妙覺 等 諸位를 都合한 五十六位說, 等覺位를 除한 五十五說, 四加行位를 除한 五十二位 或 五十一位說, 十信位를 外凡夫位라 하야 이를 除한 四十二位 或 四十一位說 等이 有하고

且 十住․十行․十廻向을 內凡業位 或 三賢位라 云하며 十地를 十聖位라 謂하는 三賢十聖說, 初․二․三地를 三賢位, 四地를 入聖之門, 五地부터 十地까지를 六聖位라 云謂하는 三賢六聖說 等이 有하는 바 筆者는 五十五位說과 三賢六聖說을 支持하는 同時에 五十五位를 漸次한 次第漸修說을 打破하고 內의 五十位에 있어 五位十重 又는 十位五重으로 縱橫 觀擦하야 五蘊皆空을 證하는 境地료서 곧 五智如來를 成就하는 方便이라 云하오니

三界 四大의 色陰을 걷고 諸法空을 證하면 비로소 正信이 生할새 初信이오 受陰을 걷고 二無我를 證하면 初發心의 歡喜地에 住할새 初發心住요 想陰을 걷고 分別心을 除却하면 如來의 妙德으로써 十方에 隨順하야 歡喜로 行할새 初歡喜行이오 行陰을 걷고 一切에 通하면 一切衆生을 救護할새 初救護-切衆生廻向이오 識陰을 걷고 처음으로 正覺에 登하야 歡喜踊躍할새 初歡喜地며 且 加行功德으로써 初地를 成就하면 初信과 같은 信이 生하고 初住와 같은 地에 住하고 初行과 같이 行하고 初廻向과 같이 廻向하나니 餘皆 倣此할지오, 加之에 初․二地란 色陰 三․四地란 受陰 五․六地란 想陰 七․八地란 行陰 九․十地란 識陰을 걷는 等의 果位로서 加行이란 因位일새

勤策修行하야 此等 五十位를 圓滿 成就하면 곧 妙覺이라 名하니 解脫十六地란 菩薩十地를 根幹으로 하고 聲聞, 緣覺十地, 三乘共十地, 密敎十地, 瑜伽十七地, 信․住․行․廻向 等 四의 十位, 五 相成身位, 五忍, 十三觀門, 四加行i道 等을 枝葉으로 하야 顯密을 會通한지라 修者一初生三歸地하고 乃至 十六生無餘地하야 究竟 成就할지니 正히 十六生成佛說에 合하니라 (聲聞+緣覺+菩薩=解說+四地까지) 甲申夏 碧山閑人 撰

16에 무여지(無餘地)라, 열반에도 유여열반, 무여열반이 있는데 해석이 구구합니다. 유가17지의 마지막 위인 무여의지(無餘依地)의 약칭으로서 공십지의 10. 불지(佛地)에 당하는 묘각(妙覺)의 자리니, 4각중 본각(本覺)을 제하고 16지에 안배하면 이가 구경각(究竟覺)이요, 4지까지가 상사각(相似覺), 5지부터 수분각(隨分覺)이며, 5인(忍)으로 안배하면 4지까지 복인(伏忍), 8지까지 신인(信忍), 11지까지 순인(順忍), 14지까지 무생인(無生忍), 나머지 2지가 적멸인(寂滅忍)으로서 3지까지가 하복인(下伏忍:習忍), 4가행지(四加行地) 중 명득정과 명증정이 중복인(中伏忍:性忍), 인순정(印順定)이 상복인(上伏忍:道種忍), 5, 6합지가 하신인(下信忍), 7지가 중신인(中信忍), 8지가 상신인(上信忍), 9지가 하순인(下順忍), 10지가 중순인(中順忍), 11지가 상순인(上順忍), 12지가 하무생인(下無生忍), 13지가 중무생인(中無生忍), 14지가 상무생인(上無生忍), 15지가 하적멸인(下寂滅忍), 16지가 상적멸인(上寂滅忍) 인바 이를 14인(忍)이라고도 말하고 상적멸인을 제하여 13관문(觀門)이라고도 말합니다.

또한 공(空)․성(性)․상(相) 3종(宗)은 원래 횡적으로 간별할 바 아니요, 종적으로 그 정도를 각각 시설한다면 복(伏)․신(信)․ 순(順) 등 3인은 상종(相宗)이요, 무생인은 성종(性宗)이며 적멸인은 공종(空宗)이니라, 그리고 4가행위(四加行位)․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등각(等覺)․묘각(妙覺) 등 제위를 도합한 56위설 또는 등각위를 제한 5위설 또는 4가행위를 제한 52위설 혹은 51위설 또는 십신위 (十信位)를 외범부위(外凡夫位)라 하여 이를 제한 42위설 혹은 41위설 등이 있고,

또는 십주․십행․십회향을 내범부위(外凡夫位) 혹은 삼현위(三賢位)라 하며, 십지를 십성위(十聖位)라 이르는 삼현십성설(三賢十聖說). 또는 초․2․3지를 삼현위(三賢位), 4지를 입성지문(入聖之門), 5지부터 10지까지를 육성위(六聖位)라 말하는 삼현육성설(三賢六聖說) 등이 있는데,

필자(금타 스님)는 55위설과 삼현육성설을 지지하는 동시에 55위를 점차한 차제점수설(次第漸修說)을 타파하고 내(內)의 50위에 있어 오위십중(五位十重) 또는 십위오중(十位五重)으로 종횡 관찰하여 오온개공을 증득하는 경지로서 곧 오지여래(五智如來)를 성취하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삼계(三界) 사대(四大)의 색음(色陰)을 걷고, 우리 중생이 공부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제가 누차 말씀드린 색 곧 물질이 있다고 하는 유병(有病)입니다. 현대 물리학도 지금 없다고 밝히는데 하물며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는 불자들이 유병에 걸리면 공부가 안됩니다. 꼭 색음을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법공의 도리를 깨달아야 반야바라밀이 되지 않겠습니까. 반야지혜에 어두우면 보시(布施)도 제대로 못되고 또는 사회운동도 아무것도 제대로 못되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누구한테나 가장 소중한 보배가 제법공(諸法空)자리를 증득하게 하고 제법공도리를 깨닫기 위한 신심을 내게 하는 것입니다.

제법공을 증해야 비로소 정신(正信)이 생하니 초신(初信)이우 수음(受陰)을 걷고 이무아(二無我: 我空․法空)를 증(證)하면 초발심의 환희지에 머무를새 초발심주(初發心住), 상음(想陰)을 걷고 분별심을 없애버리면 여래의 묘덕으로써 시방에 수순하여 환희로 행할새 초환희행(初歡喜行)이요, 행음(行陰)을 걷고 일체에 통하면 일체 중생을 구호할새 초구호일 체중생회향(初救護一切衆生廻向)이요, 식음(識陰)을 걷고 처음으로 정각(正覺)에 등(登)하여 환희용약할새 초환희지(初歡喜地)며 또는 가행공덕으로써 초지(初地)를 성취하면 초신(初信)과 같은 신이 생하고 초주(初住)와 같은 지에 주하고 초행(初行)과 같이 행하고, 초회향(初廻向)과 같이 회향하나니, 나머지는 다 이와 같습니다. 이에 더해서 초․2지란 색음(色陰), 3․4지란 수음(受陰), 5․6지란 상음(想陰), 7․8지란 행음(行陰), 9․10지란 식음(識陰)을 걷는 등의 과위(果位)로서, 가행(加行)이란 인위(因位)를 의미합니다.

부지런히 수행하여 이러한 50위를 원만성취하면 곧 묘각(妙覺)이라 이름하니 해탈십육지란 보살십지를 근간으로 하고 성문십지, 연각십지, 삼승공십지, 밀교십지, 유가십칠지, 신(信)․주(住)․행(行)․회향(廻向) 등 넷의 10위, 오상성신위(五相成身位), 오인(五忍), 십삼관문(十三觀門), 사가행(四加行) 등을 지엽으로 하여 현교(顯敎)와 밀교(密敎)를 회통(會通)한지라, 수행자는 처음에 삼보에 귀의하고 점차 수행하여 16무여지(無餘地)에 이르러 마지막까지 빠짐없이 성취하는 것이니 바로 십육생성불설(十六生成佛說)에 합당합니다.

출처: 금강(金剛) http://cafe.daum.net/vajra

 

  • 이길성 스님 좋은 법문 감사 합니다.행복한 나날 되세요 2015-03-29 02:00 댓글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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