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念佛禪의 修行方法 - 한보광 스님

김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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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염불선원 주최
2002, 10, 12

念佛禪의 修行方法

1, 머리말
2, 念佛禪이란
3, 傳香存佛法
4, 觀念念佛法
5, 禪淨雙修法
6, 念佛公案法
7, 맺음말

1, 머리말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念佛禪의 수행방법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지금까지 看話禪 일변도로 전해지고 있는 한국불교의 수행풍토는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달라져야 할 것인가라고 하는 점은 망설이고 있다. 본고에서는 염불선의 이론적인 정의보다는 실지로 행하는 수행을 어떻게 할 것이가라고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먼저 염불선이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원론적인 문제를 살펴보며, 다음으로는 수행방법을 정리하고자 한다.
먼저 果 宣什의 南山念佛門禪宗의 傳香存佛法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고자한다. 이를 유식적인 방법으로 규명한다면 대단히 흥미로울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는 觀念念佛法을 살펴보며, 禪淨雙修法과 念佛公案法에 대해서도 차례로 규명하고자 한다. 자력적인 수행방법인 禪과 타력적인 신앙방법인 念佛法을 겸수하여 서로의 한계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수행방법은 일찍부터 실천되어져 왔으나 학문적인 연구가 부족하였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본논문을 통하여 앞으로 이러한 수행방법을 정리하고 개발하고자 한다.

2, 염불선이란

念佛禪이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은 아직도 분명한 규정이 없다. 이에 대하여 논자는 {佛敎硏究} 10호에서 [念佛禪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를 가지고 정리한 적이 있었다. 念佛禪이라는 단어는 念佛과 禪이 합하여 만들어진 복합명사이다. 즉 자력적인 禪修行과 타력적인 정토 念佛修行을 병행하는 수행법 중 하나이다. 우리는 禪修行을 말할 때 看話禪 중심의 수행법을 중시하고 있으나, 일찍부터 선을 분류할 때, 小乘禪, 大乘禪, 如來禪, 祖師禪 등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풍토에서는 선이라고 하면 으레히 祖師禪만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祖師禪이란 六祖慧能 계통의 南宗禪을 의미하고 있다. 南宗禪에서는 五宗의 修行家風이 정립된다. 이를 정리하면 臨濟義玄(?-867)의 臨濟宗은 看話禪이 중심이고, 洞山良价(807=869)와 曹山本寂(839-901)의 曹洞宗은 默照禪의 수행방법과 雲門文偃(?-949)의 雲門宗은 一字觀을 행하였으며,  山靈祐(771-853)와 仰山慧寂9815-891)의  仰宗은 表相現法으로 수행의 지침을 삼았고, 法眼文益(885-9580)과 永明延壽(904-975)의 法眼宗은 念佛禪으로 수행하였다. 따라서 祖師禪이라고 한다면 위의 다섯 가지 수행법이 모두 포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는 조사선이란 오직 看話禪만으로 이해하고 있음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즉 염불선이란 法眼文益에 의해서 시작되고 永明延壽에 의해서 정리된 수행방법으로 南宗禪의 일파인 법안종의 수행방법 중 하나이다. 이 시기는 당나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건립되기 이전인 五代에 속하는 때이다. 당나라 선종이 분파를 이루면서 자신들의 수행방법만이 최선이라고 주창하므로 많은 폐단을 낳았기 때문에 법안문익은 다양한 불교의 수행방법을 총망라하여 자신의 근기에 맞는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禪뿐만 아니라 天台의 止觀法, 淨土의 念佛法, 戒律의 持戒法, 敎學의 兼修도 인정하였다. 특히 교학은 천태교학과 선을 융합하여 禪敎一致를 주창하였고, 염불과 선을 함께 수행하는 禪淨雙修의 방법과 선종에서 계율을 경시하는 풍토를 보고 지계 없이는 참다운 깨달음에 이르럴 수 없다고 하는 持戒禪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염불선은 바로 조사선의 한 가지 수행방법으로 분류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光宗 이후에 도입되어 대각국사의 天台宗 개창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보조의 정혜결사 성립에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증거는 보조의 {定慧結社文}에 잘 나타나 있다. 이후로는 太古普愚의 禪淨一致와 조선시대의 西山大師의 {禪家龜鑑}에도 주장하고 있으며, 許均이 쓴 {淸虛集}의 서문에는 서산대사의 法脈은 法眼宗이라고까지 하고 있다.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많은 선사들에 의해 법안종의 염불선법이 전승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불교의 선종은 순수한 임제종맥이라고 보기보다는 법안종의 염불선법이 함께 겸수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국불교는 看話禪法만을 수행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재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염불선의 수행방법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정리해 보고자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논자는 이미 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지난 논문에서는 역사적인 자료를 중심으로 증거를 제시하였으나 본 논문에서는 이를 다시 정리하여 수행방법상의 차이점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첫째는 觀念念佛을 말하고 있다. 일본 駒澤大學에서 편찬한 {禪學大辭典}에서는 사전적인 의미로 "禪定에서 염불을 겸하여 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면서 주로 觀念念佛者들을 소개하고 있다. 禪定의 한 가지 형태로 그 자세를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로 앉아서 염불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觀念念佛이 염불선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논리에 동조하고 있는 사람은 宇井伯壽이다. 그는 {禪宗史硏究}에서 염불에는 定業念佛과 散業念佛이 있는데, 전자는 稱名念佛이고 후자는 觀想念佛이라고 하면서 定業念佛을 念佛禪이라고 한다. 염불선이란 칭명염불을 제외한 관염염불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는 稱名念佛과 禪을 雙修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禪淨雙修를 의미한다. 이러한 견해는 念佛禪에 대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藤吉慈海의 설이다. 그는 {禪淨雙修의 展開}라고 하는 저술에서 "칭명염불과 선을 쌍수하는 사람들을 念佛禪人이다"라고 하였다. 즉 칭명염불을 하면서도 선수행을 함께 하면 그것이 바로 念佛禪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앞에서는 칭명염불은 염불선이 아니라고 한 주장에 반해서 여기서는 칭명염불을 하면서 선수행을 병행하면 그것도 염불선의 범주에 속한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칭명염불을 하는 자세를 좌선의 형태로 하는 것을 말하는지 아니면 칭명염불을 할 때는 칭명만하고 또 참선도 하는 것을 의미하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는 아마도 칭명염불과 선수행을 별 다른 구분없이 병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추정된다.
이러한 방법은 일찍부터 유행하였는데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永明延壽(904-975)이다. 그는 {淨土聖賢錄}에 의하면 [參禪念佛四料揀偈]를 주창하였는데, 有禪有淨土를 이상적인 수행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참선만 하거나 염불만 하는 것보다 참선과 염불을 겸수하는 것이 참다운 수행법이라고 하였다. 이 방법은 南宗禪의 한 분파인 法眼宗의 가르침으로 조사선의 부류에 해당된다. 특히 臨濟宗 계열에서 분파되었기 때문에 默照禪보다는 看話禪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參禪과 念佛의 四料揀偈라고 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법안종의 가르침은 한국불교의 수행방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여진다. 한국불교에서는 禪淨一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도 선수행을 하면서 때로는 염불기도나 염불수행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별히 선이나 염불만을 고집하지 않고 함께 병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칭명염불을 하거나 선수행을 하면서 화두를 참구하듯이 염불을 公案化하여 참구하면 그것도 念佛禪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念佛公案을 참구하는 것이 염불선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코자한다.
셋째는 南山念佛門禪宗의 傳香存佛法이나 引聲念佛法 혹은 五會念佛法을 말한다. 이는 당나라시대 五祖弘忍의 제자 중 果 宣什이 주창한 방법이다. 宗密의 {圓覺經大疏釋義 }에는 果 宣什의 南山念佛門禪宗의 수행방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傳香이라는 참회 수계전법의식과 存佛이라는 수행방법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存佛法은 稱名念佛을 一字로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微聲과 無聲에 이르러며, 心念의 상태에서 存佛의 경지에 도달하는 수행법이다. 이러한 방법은 觀想念佛과 유사한 점이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는 念佛公案法을 말한다. 臨濟禪에서 공안이 체계화 된 이후에 참선과 염불을 겸수하는 禪淨雙修者들도 염불을 공안화하기 시작하였다. 念佛公案法에 대한 자료로는 智徹(1310-?)의 {禪宗決疑集}에서 보이는 것이 초기에 속한다. 그는 [有參究念佛者]라는 문구가 나오고 있다. 즉 염불공안을 참구하는 자는 비록 公案은 다르지만 疑團을 참구하는 방법은 모두 같다라고 한다. 雲棲 宏(1535-1615)의 {禪關策進}에서 더욱 명확하게 정리되고 있다. 이는 간화선의 화두참구법과 다름이 없다. 즉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염불하는 주인공은 누구인가?" 혹은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 "這念佛的是誰"를 참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염불공안법의 사상적인 원천은 唯心淨土 自性彌陀說에 기인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念佛禪이란 觀念念佛法과 禪淨雙修法과 傳香存佛法 및 念佛公案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를 더욱 축소한다면, 觀念念佛法과 念佛公案法으로 나눌 수 있다. 觀念念佛法은 그 목적이 念佛三昧에 들어 見佛하는 것이며, 念佛公案法은 禪定三昧에 들어 見性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 방법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목표인 見佛이나 見性은 모두 같은 경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觀無量壽經}의 第九眞身觀에서는 "모든 부처님을 보기 때문에 念佛三昧라고 하느니라. 이렇게 관하는 것을 일체부처님의 몸을 관한다라고 이름하며, 부처님의 몸을 관하기 때문에 또한 부처님의 마음을 보는 것이니라. 부처님의 마음이란 큰 자비이므로 無緣慈悲로써 모든 중생을 섭취하시느니라"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見佛은 바로 念佛三昧로서 이루어지며, 見佛은 見佛身이며, 이는 見佛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見佛身과 見佛心은 둘이 아니며, 이는 바로 見佛과 見性을 같이 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중생은 모습과 마음이 다르지만, 부처님은 모습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佛身은 바로 佛性과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3, 傳香存佛法

念佛禪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五祖 弘忍門下의 果 宣什(생존연대미상)이다. 이에 대한 기록은 圭峰宗密의 {圓覺經大疏釋義 } 卷三之下에서 [南山念佛門禪宗]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傳香存佛시키는 宗派가 있는데, 이는 第6家에 속한다. 이를 南山念佛門禪宗이라고 한다. 이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五祖의 門下에서 분파되어 나왔다. 法名은 宣什이다. 果州未和上,  州蘊玉, 相如縣尼一乘 등 모두 理法을 전파시켰으며, 그 師資相承의 稟承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여기서 傳香이란 처음 대중이 모여 禮懺儀式을 행하는 것을 말하는데 金和上門下의 儀式과 같다. 法을 줄 때 香을 전하는 것(傳香)으로 스승과 제자의 信標로 삼았다. 스승이 손을 내밀어 제자에게 건네주고 제자는 다시 그것을 스승에게 올리며, 또 스승은 제자에게 내려주고, 이렇게 하기를 세 번 반복하는 의식으로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이 하였다.
또 存佛이란 正授法 때에 먼저 法門의 도리와 修行의 意趣를 설하고, 그러한 뒤에 一字念佛을 한다. 처음에는 소리를 끌어 念佛하고, 뒤에는 점차로 소리를 적게 하여서 아주 적은 소리(微聲) 내지 無聲에 이르게 하여 염불소리가 완전히 없어지고 나면(送佛) 意念에 이르게 된다(至意). 그러나 意念에 이르게 되지만, 여전히 意念이 거칠어지게 되면, 다시 意念을 보내고, 心念에 이르게 된다(至心念). 心念 중에 佛의 存想이 있다. 항상 心中이나 내지 無想 중에 佛이 있으니 어찌 道를 얻지 아니하리요.

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果 宣什은 五祖弘忍의 문하로서 慧能과는 같은 법형제이다. 그의 생존년대에 대해서는 미상이지만, 四川省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것 같다. 특히 그의 傳香의식은 淨衆宗의 無相大師 金和上과 같다고 한다. 이러한 傳香儀式은 수계의식과 같으며, 한편으로는 전법의식으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存佛法이다. 이는 염불수행법 중 念佛門禪修行者들이 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몇 가지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법문의 도리와 意趣를 설한다.
두 번째는 一字念佛로 "나무아미타불"을 한다.
세 번째는 처음에는 소리를 끌어 염한다.
네 번째는 점차로 소리를 점차로 적게 하여 아주 적은 소리인 微聲 혹은 無聲에 이르런다.
다섯 번째는 소리를 완전히 없어지게 한다(送佛).
여섯 번째는 意念에 이르런다(至意).
일곱 번째는 意念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意念이 거칠어지게 되면 다시 意念을 보낸다.
여덟 번째는 心念에 이르런다(至心念).
아홉 번째는 心念 중에 佛의 存想이 있다(存想有佛).
이를 자세히 분석해 보고자 한다.
① 법문의 도리와 意趣를 설한다는 것은 대중들에게 念佛禪法에 대한 설법을 의미할 것이다. 염불법과 수행방법이 독특하기 때문에 사전 지식이 필요로 하였을 것이며, 대중들에게는 이러한 사전 교육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물론 몇 일 동안 계속되는 傳香存佛儀式에는 다양한 설법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② 一字念佛을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 이 방법은 어떻게 하였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자료가 없다. 그러나 짐작컨대, 아마도 一字念佛이란 한자 한자를 또박또박 염불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된다. 즉 "나""무""아""미""타""불"로 하는 추정된다. 이러한 一字方法은 이미 弘忍대사도 실천하였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敦煌本 {楞伽師資記}의 弘忍章에서는

坐禪을 할 때에는 平面에 몸을 바르게 正坐하고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한 연후에 하늘과 땅이 접하는 저 먼 곳에 一字를 觀하라. 스스로 순서가 있을 것이다. 만약 初心者로서 攀緣이 많은 사람도 또한 마음 속으로 一字를 看하라.

고 한다. 그는 초심자들을 위하여 一字看法을 권하고 있다. 이러한 看法에 대해서 柳田聖山은 {初期の禪史} 권1에서 漢字의 뜻을 看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의 형태를 看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修心要論}에서 말하는 {觀無量壽經}의 日想觀이나 {大乘無生方便門}의 看法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면서 坐禪의 구체적인 공부방법이라고 한다. 즉 {觀無量壽經}의 16관법과 동일한 법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弘忍이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一字看으로 하였다면 그의 제자인 宣什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는 홍인의 이러한 一字看法에 의해 一字念佛法을 개발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一字念佛은 어디까지나 稱名念佛로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칭명염불로 시작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觀念念佛로 깊이를 더하고 있다.
③ 소리를 끌어서 한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引聲念佛法이다. 이 방법은 五祖 弘忍의 문하인 宣什과 동문이었던 智詵과 그 제자인 處寂(666-732), 또 그 제자인 淨衆宗의 無相大師으로 이어진다. 이를 체계화시킨 사람은 無相이다. 일찍부터 중국의 四川省을 중심으로 淨衆宗의 無相은 無憶無念莫忘의 三句로 제자들을 接人하였다. 無憶은 戒를, 無念은 定을, 莫忘은 慧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서 염불의 소리를 길게 끌어서 큰 소리로 하다가 점차로 微聲으로 가면서 나중에는 염불의 소리조차도 없어지는 引聲念佛을 가르쳤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處寂의 제자인 南嶽承遠(712-802)과 그 제자인 法照(?-772)는 五會念佛法을 널리 폈다. 특히 法照는 承遠의 般舟三昧道場에 들어가 수행하였으며, 정토에 귀의하였다. 그러다가 般舟三昧를 닦는 도중 아미타불로부터 염불법을 배웠는데, 그 방법이 바로 五會念佛法이다. 이는 引聲念佛과 같은 방법이지만, 염불소리에 리듬을 주어서 음악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五會念佛에 대한 자료는 단편적이긴 하지만, 法照撰의 돈황본 {淨土五會念佛誦經觀行儀}에 잘 기록되어 있다. 방법은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略本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즉 "南無阿彌陀佛"의 염불소리를 하는데 있어서 第一會는 平聲念이며, 第二會는 平上聲緩念이며, 第三會는 非緩非急念이며, 第四會는 漸急念이며, 第五會는 "南無"를 제외한 "阿彌陀佛" 四字轉急念으로 한다. 다시 말하자면, 나무아미타불의 唱法을 高低緩急으로 조정하여 다섯 가지 소리를 내는 것이다. 대체로 第一會에서는 완만한 平聲의 소리로 염불하지만, 점차로 高聲念佛이 급속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의 第五會에서는 "南無"를 빼고 "阿彌陀佛"만으로 하되 그 속도를 급하게 하는 방법이다. 우리나라의 범패가락과 비슷하지만, 염불수행법으로 널리 유행하였으며, 중국이나 대만에서는 현재도 널리 성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염불법은 칭명염불에 속하므로 前五識의 과정에 속한다. 다시 말하자면, 나무아미타불을 입으로 하는 염불이므로 口稱念佛, 혹은 稱名念佛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眼耳鼻舌身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④ 염불소리를 微聲에서 無聲으로 한다는 것은 前五識의 과정에서 이제 六識 즉 識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無聲으로 하되 염불하는 마음은 놓지 않은 것이다. 無聲으로 염불의 소리가 귀로는 들리지 않지만, 前五識인 舌根이나 耳根과 第六意識 사이에 연결되는 것으로써 認識의 단계에서는 염불이 계속되는 것이다. 단지 귀에 들릴 정도로 내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六識의 단계에서 염불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⑤ 완전히 無聲으로 들어가므로 送佛이라고 한다. 즉 염불하는 소리를 전혀 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가 완전한 六識의 단계에서 염불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⑥ 六識에서 이제는 第七識인 意志作用의 단계로 전환된다. 지금까지 염불하는 마음이 완전히 몰입되지는 못하였지만, 여기서부터는 정신이 집중할 수 있는 과정이 진입하였다고 할 수 있다. 第七識인 意志에 진입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⑦ 그러나 아직도 때때로 念佛이 거칠어진다고 하는데 이는 바로 염불도중에 번뇌가 일어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염불하는 도중에 부처님도 생각나지만, 다른 雜念이나 妄念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第七識에서 하는 염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第七識 단계에서도 妄念이 생긴다는 것이다.
⑧ 다음으로는 心念에 이르런다고 하는데 이는 바로 第八識인 마음에서 우러나는 염불이 됨을 의미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妄念과 念佛이 함께 하였지만, 第八識에서는 오로지 염불만을 하는 단계이다. 第八識에서 하는 염불은 一心不亂의 경지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⑨ 一心不亂의 경지에서 하는 염불에는 觀想이나 觀相 혹은 觀像이든지 관계없이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므로 다른 妄念이 침입하지 못하는 경지이다. 그 心念이 有想 중이든 無想 중이든 관계없이 오직 부처님의 存想만이 있을 뿐이다. 이 경지는 완전한 一心不亂의 경지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宣什의 南山念佛門禪宗에서는 前五識과 六識 七識의 과정을 지나서 第八識에서도 부처님의 存想이 그대로 있는 염불이 바로 存佛法이라고 한다. 이는 引聲念佛法과 般舟三昧法 및 觀想念佛, 觀念念佛을 모두 포함시킨 念佛三昧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4, 觀念念佛法

念佛이란 부처님을 念하는 것이다. 여기서 염한다는 것은 범어로 Smrti이며, 이는 [想起하다] [記憶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외에도 觀念, 想念, 心念, 憶念, 稱念과 같이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 佛이란 佛身, 佛名, 覺, 眞如, 實相을 뜻하므로 부처님의 깨달음일 수도 있으며, 佛身이나 名號 자체일 수도 있다. 그런데 念佛에 대한 경전상의 근거는 念佛, 念法, 念僧의 三念法과 念戒, 念施, 念天의 六念 및 念休息, 念安般, 念身, 念死의 十念法에서부터 출발한다. 경토삼부경을 비롯한 많은 경전에서 念佛, 念法, 念僧에 대해서는 누누이 설하고 있다.
염불법에 대한 분류로는 天台智 의 {摩訶止觀}에서는 稱名往生念佛三昧門, 觀相滅罪念佛三昧門, 諸境唯心念佛三昧門, 心境俱離念佛三昧門, 性起圓通念佛三昧門 등으로 구분하면서 稱名往生念佛三昧門을 제외한 네가지를 觀念念佛로 보고 있다. 懷感은 {釋淨土群疑論} 권7에서는 有相念佛과 無相念佛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방법으로는 圭峰宗密의 [華嚴經行願品別行疎 } 권4에서 구분하고 있는 稱名念佛, 觀像念佛, 觀相念佛, 實相念佛의 네가지 방법이다. 칭명염불은 불명호를 소리로서 부르는 것이며, 觀像念佛은 불상을 관하는 법이다. 觀相念佛은 부처님의 32상호나 공덕을 관하는 염불법이며, 實相念佛은 진여실상을 관하는 염불법이다. 여기서 칭명염불을 제외한 세가지 염불법은 모두 관염염불에 속한다.
관염염불법은 {觀無量壽經}의 16관법이나 세친보살의 {淨土論}에서 말하는 29종정토장엄에 대한 관법 등이 널리 사용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32상호나 80수형호를 관하는 佛身觀法이나 극락세계의 依報莊嚴과 불보살의 正報莊嚴을 관하는 법도 있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宇井伯壽는 {禪宗史硏究}에서 관염염불법이 염불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염불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稱名念佛, 觀像念佛, 觀想念佛, 實相念佛의 4종으로 구별하기도 하고 또는 그 가운데에서 觀像念佛을 제외하고 3종으로 나누기도 한다. 칭명염불은 口稱念佛로써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이며, 觀像念佛은 부처님의 존상을 觀念하는 염불이며, 觀想念佛은 부처님의 상호공덕을 觀念하는 염불이고, 實相念佛은 부처님의 法身理體를 관하는 염불이다. 혹은 또 이 3종염불에 대하여 觀想念佛을 定業念佛, 칭명염불을 散業念佛이라고 하기도 하며, 또는 定業念佛과 散業念佛을 有相念佛이라고 하고, 여기에 대하여 實相念佛을 無相念佛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칭염염불만이 散業이고 그 외는 모두 定業이며, 定은 禪이기 때문에 이는 일종의 念佛禪이다.

라고 정의하였다. 여기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宇井伯壽는 念佛禪이란 칭명염불을 제외한 觀像念佛, 觀想念佛, 實相念佛을 포함하여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염불은 모두 관염염불이며, 定業念佛로 분류하고 있다. 定은 禪이므로 定業念佛은 바로 念佛禪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특별히 宇井伯壽의 학설이 아니라고 하여도 이미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引聲念佛이나 傳香存佛法의 염불방법도 대부분 관염염불법에 속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柳田聖山은 {禪の語錄} 16의 解題에서 五祖弘忍의 {修心要論}을 인용하면서 염불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약 처음으로 坐禪을 배우고져 하는 자는 {觀無量壽經에 의지하여라. 端坐히여 몸을 바르게 하고 눈을 깜고 입을 다물고, 마음을 눈앞으로 平視하여 뜻에 따라 멀고 가깝게 一日想을 짓고 眞心을 지켜라. 念念이 머물지 않으면, 바로 氣息을 잘 조절하라. 천성(喘聲)하여 잠깐이라도 거칠거나 미세하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병을 成하게 하지 말아라. 만약 밤중에 坐禪할 때에 일체 선악의 경계를 보거나 혹은 靑黃赤白 등의 여러 가지 三昧를 보거나 혹은 몸에서 대광명이 나오거나, 혹은 여래의 신상을 보거나 혹은 여러 가지 변화를 보더라도 오직 마음을 잘 攝心하여 집착하지 말아라. 모두 空한 것이니 妄想을 본 곳이니라.
이에 대하여 柳田聖山은 {觀無量壽經}은 정토삼부경의 하나로서 無量壽佛 즉 아미타불의 정토와 그 身心을 觀念하여 冥想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특히 처음으로 정토를 想念하는 방법은 완전히 坐禪의 방법을 그대로 말하고 있다. 이 경전에는 유명한 [是心作佛 是心是佛]의 구절을 볼 수 있다. 이 구절은 이미 {楞伽師資記}에서 道信이 인용하고 있다. 弘忍이 {觀無量壽經}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당시 이 경전이 널리 일반에 알려져 관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드시 念佛禪을 권유하기 위한 것은 아니겠지만, 禪과 念佛은 그 身心을 가지런히 하여 다스리는 구체적인 방법 위에 거의 동일한 주의를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입을 다물며, 마음은 앞을 주시하여 보며 一日想을 지어라]고 하는 것은 {觀無量壽經}의 日想觀에서 설하고 있으며, 붉은 저녁 해가 서쪽 바다 위에서 지는 정황을 눈앞에서 상상하면서 身心을 통일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身心을 통일하고 無念無想으로 들어가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일체 선악의 경계나 靑黃赤白 대광명을 보는 것은 결국은 妄想에 지나지 않는다고 弘忍은 말하고 있다.

고 한다. 여기서 柳田聖山은 弘忍의 {最上乘論}에 나오는 {修心要論}을 인용하면서 당시의 정황을 서명하고 있다. 弘忍 당시에는 {觀無量壽經}이 크게 유행하여 16관법에 의한 수행이 널리 행하여졌다고 보고 있다. 특히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卽心卽佛이나 是心是佛에 대한 근거는 정토계 경전인 {觀無量壽經}이나 {般舟三昧經}에서 설하고 있는 [是心作佛 是心是佛]의 내용이다. 이러한 근거에 의해 선불교에서는 마음이 곧 부처라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본다면, 선불교의 사상적 원천이 된 것은 바로 정토계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염불의 방법이나 좌선의 방법이 동일하기 때문에 서로 융합하여 念佛禪이 일찍부터 유행하였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초기의 염불선법은 거의 대부분 觀念念佛的인 색채가 농후하다.

5, 禪淨雙修法

禪淨雙修라는 단어에 대한 해석은 본인의 [念佛禪이란 무엇인가]라는 논문에서 정리한 바가 있다. 禪淨雙修란 선과 염불을 병행하는 수행방법을 말하고, 禪淨雙修論이란 念佛禪學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雙修나 兼修, 幷修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禪淨一致, 禪敎一致, 禪劍一致, 茶禪一味 등 一致라는 말을 중시하여왔다. 이와 같은 현상은 아마도 대승불교의 不二法門에서 연유된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이나 일본에서 사용하는 雙修는 어디까지나 禪과 淨土의 둘을 그대로 두고 함께 한다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一致란 禪이 곧 淨土이며, 淨土가 곧 禪이라는 말로 해석 된다. 그러므로 선과 정토염불을 두 가지의 수행방법으로 두지 않고 하나의 경지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수행법을 일찍이 도입한 사람은 廬山慧遠(334-416)이다. 그는 廬山의 般若臺精舍에서 劉遺民 등 123인과 함께 白蓮結社를 시작하여 정토염불을 행하였다. 이 때 그가 행한 염불법이 칭명염불인지 아니면 관염염불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관염염불에 가까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로는 아미타불상을 조성하여 모시고 염불결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칭명염불을 완전히 배제하였다고는 볼 수 없지만, 어디까지나 관염염불법이 중심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念佛三昧를 닦기 위하여 {般舟三昧經}을 소의경전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鳩摩羅什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定中見佛의 경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질문하기도 하였으며, 그가 역출한 {達摩多羅禪經}의 영향도 받았다고 보여진다. 뿐만 아니라 佛馱跋陀羅 등으로 하여금 禪經을 역출케 하기도 하였다.
당대에서는 慈愍三藏 慧日(680-748)은 {淨土慈悲集}을 편찬하여 당시 禪宗의 문제점을 일일이 지적하면서 정토를 권장하였다. 흔히 그의 정토를 禪對淨土라고 하지만, 그가 비판한 것은 당시 선수행자들의 잘못을 말한 것이지, 禪의 수행방법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선수행과 정토염불을 겸행하여 올바른 깨달음에 이르를 수 있도록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를 염불선의 수행자로 보고 있으며, 그의 수행방법을 계승한 것을 慈愍流의 정토라고도 한다.
그러나 禪淨雙修를 구체적으로 실천한 사람은 永明延壽(904-975)이다. 그는 하루 일과 중 108事를 실천하였다. 그의 일과에는 염불신행뿐만 아니라 경전의 강독이나 영가의 천도 방생 등 다양한 수행을 겸하였다. 또한 그는 {唯心訣}과 {萬善同歸集}을 저술하여 唯心淨土에 대하여 설하고 있으며, 萬善은 모두 깨달음의 길로 들어간다라고 한다. 그의 禪淨雙修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정리 된 것이 바로 {淨土聖賢錄}에 소개되어 있는 [參禪念佛四料揀偈]이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一, 有禪無淨土 十人九蹉路 陰境若現前 瞥爾隨他去
二, 無禪有淨土 萬修萬人去 但得見彌陀 何愁不開悟
三, 有禪有淨土 猶如載角虎 現世爲人師 來生爲佛祖
四, 無禪無淨土 鐵床幷銅柱 萬劫與千生 沒個人依 

라고 한다. 이러한 參禪念佛四料揀偈는 五代 이후의 새로운 수행방법론이 되어 왔다. 특히 송대에는 여러 종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우리나라에도 고려 光宗代에 法眼宗이 전래되어 수행의 지표로 삼기도 하였다. 明代의 大佑는 {淨土指歸集}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有禪有淨土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禪도 있고 淨土도 있는 경우는 선과 정토를 雙修하는 것으로 이것은 뿔 달린 호랑이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강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현세에는 사람들의 스승이 되고 내세에는 佛祖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이들은 심오한 불법을 요달하기 때문에 人天의 스승이 될 것이며, 또한 왕생발원 하였으므로 속히 不退位에 이르며, 허리에 十萬貫을 차고 학을 타고 揚州 위를 나는 것과 같다(腰纏十萬貫 騎鶴上揚州).

라고 한다. 大佑의 해석과도 같이 생전에는 인천의 스승이 되고 내세에는 깨달음을 성취하여 불조가 된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 선종에서 평생 수행하였으나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새로운 수행방법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 만약 선수행 하였으나 결과적을 성취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반성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염불과 선을 겸수할 경우에는 생전에 염불하여 왕생발원을 하므로 설사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극락왕생하여 내세에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有禪有淨土는 禪과 念佛을 어떻게 한다고 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하고 있지 않고 있다. 예를 든다면, 禪의 자세로 앉아서 칭명염불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관염염불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방법을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 또한 話頭公案을 참구하면서 여가 여가에 염불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론은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미루어 유추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즉 永明延壽의 수행방법은 南宗禪의 祖師禪의 부류에 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조사선법의 수행방법론에 염불법을 겸수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따라서 여기서 禪이라고 하는 것은 祖師禪의 公案法이며, 정토라고 하는 것은 칭명이든 관염이든 구분하지 않고 수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토발원을 하였는지 아닌지가 중요할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수행방법은 송대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일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6, 念佛公案法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永明延壽의 禪淨雙修法에서 조사선풍을 찾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화두 공안을 참구하였다고 하는 증거는 없다. 그런데 話頭公案法이 유행하면서 염불도 공안화 되기 시작하여 화두선의 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14세기 경으로 보여진다. 看話禪法과 염불공안이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은 {阿彌陀經}의 "執持名號 一心不亂"說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염불하여 일심불란의 경지에 몰입하는 것이나 참선하여 화두와 몰입하는 경지는 다름이 없다고 보고 있다.
念佛公案의 시작은 斷雲智徹(1310-?)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는 26세에 출가하여 지계와 염불에 오로지 하였으며, 36세에 "萬法歸一 一歸何處"의 화두를 참구하여 大慧派의 雲峰妙高의 문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저서로는 {禪宗決疑集}1권(1667年刊)이 있다. 여기에 의하면,

지계을 받들어 지키고, 염불과 참선을 하며 大乘을 구하고자 한다면 生死를 해탈할 수 있다(歸源實際門, 1013, b).
학인들은 念佛과 參禪으로 大事를 규명하라(雙林遺戒衆等遵依, 1014, a)
혹은 無字를 參究하는 사람이나 혹은 本來面目을 참구하거나 혹은 念佛을 참구하는 사람들은 公案은 다르지만 의심하고 참구하는 방법은 같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智徹은 염불과 참선을 동일한 수행방법으로 여겼으며, 無字公案이나 本來面目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이미 智徹 당시에 염불공안법이 유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念佛公案法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일까. 여기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런데 雲棲 宏(1535-1615)의 {禪關策進}에 [智徹禪師淨土玄門]을 소개하고 있다.

염불하기를 一聲 혹은 3, 5, 7聲을 묵묵히 반문하여라. "이 一聲의 佛이 어느 곳에서 나오는가?"라고, 또 이 念佛하는 者 누구인가?(這念佛的是誰)라고 묻고, 의심이 있으면 一念으로 의심을 없애라. 만약 問處와 가까워지지 않으면 疑情을 끊지 않기 때문에 다시 "필경 이 염불하는 자 누구인가?"라고 하여라. 앞의 물음에 있어서 적게 묻고 적게 의심한다면 오직 "오직 염불하는 자 이 것이 누구인가?"라고 하면서 자세히 물어라.
評하여 말하기를 바로 앞에 묻지 않고 오직 "이 염불하는 자 누구인가?"라고 看하는 것이 좋다.

라고 한다. 지철선사의 [淨土玄門]은 {禪宗決疑集}에는 보이지 않은 글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단문이지만, 당시의 念佛公案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염불을 하듯이 나무아미타불을 하지만, 칭명염불과 같이 명호만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명호를 음미하듯이 천천히 반문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앞에서 말한 一字念佛과 비슷한 점이 보인다. 천천히 "南" "無" "阿" "彌" "陀" "佛"을 한마디 한마디 반복하면서 음미하고 觀한다. 그러면서 염불하는 소리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이를 의심한다. 즉 "염불하는 이 주인공이 누구인가?" "염불하는 이 놈이 누구인가?" "이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라는 疑團이다. 마치 간화선의 3단계인 大信心, 大疑心, 大忿心과 같다.
이렇게 염불공안을 드는 것은 바로 無字나 萬法歸一을 지극히 참구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따라서 無字公案은 話頭로서의 역할 이외에 無字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공덕력이나 가피력은 없지만, 아미타불공안에는 아미타불의 무량한 공덕이 있다. 아미타불이라는 명호가 가지는 무량한 공덕력은 바로 다름아닌 無量光, 無量壽의 공덕이다. 이는 아미타불이 성불하기 이전인 법장비구 법장보살로서의 무앙수겁동안 수행한 공덕력이다. 극락세계를 건설하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48본원력의 공덕력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명호이다. 그 명호만으로도 충분히 往生을 보장받을 수 있는데 하물며 의단까지 가지고 자신을 살펴본다면 더 무량한 공덕력을 가질 것이다.
無字와 阿彌陀佛의 공덕력에 대한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 자 한다. 필자가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1970년대 해인사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어느 날 해인사 큰절에서는 산중법회가 열리었는데 그 때 법문은 성철스님께서 하였다고 한다. 성철스님께서 법상에 오르시어 "無字公案을 참구할 것을 당부하시면서 無字의 공덕이 무량하다"고 하시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성철스님은 더 나아가서 "阿彌陀佛 염불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공덕력이 있다고 역설하시었다"고 한다. 그 때 이를 묵묵히 듣고 있던 수산스님께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성철스님에게 질문하였다고 한다. "無字公案의 공덕력이 무량하다는 이야기가 어느 경전에 나오는 말씀인가"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阿彌陀佛 명호의 공덕이 무량하다는 것은 정토삼부경에 분명히 나오는데 그 공덕력이 無字보다 못하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수산스님의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성철스님은 더 이상 아무런 말씀도 없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화에서 살펴 볼 수 있듯이 無字公案의 공덕력에 대하여 설하는 선사들이 많다. 그런데 어떤 불교경전의 어느 구절에도 그 공덕력이 무량하다는 말씀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미타불명호의 공덕력에 대해서는 정토삼부경을 비롯하여 수많은 경전에서 설하고 있다. 우리는 조사의 말씀과 부처님의 말씀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禪佛敎도 불교이지 祖師敎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전에도 없는 祖師說만을 중시하는 것은 다시 한번 더 반성해 보아야 할 문제점을 생각된다.
따라서 아미타불공안의 공덕력은 무자공안의 공덕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중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禪佛敎가 성행하던 唐 宋代에는 禪 일변도로 지향하였으나 元, 明, 淸代에 올수록 종합적인 수행방법을 선택하게 되었다. 따라서 선불교도 순수한 간화선만이 아니라 염불과 융합된 염불선법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체계는 雲棲 宏의 {禪關策進}에서 정리되었다고 보여진다.

7, 맺음말

이상으로 念佛禪의 수행방법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염불선의 정의와 종류를 정리하면서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중심으로 규명해 보았다. 문헌상으로는 宣什의 南山念佛門禪宗이 초기로 나타나고 있다. 염불방법으로는 存想을 중시하였고, 이에 몰입하기 위해서 前五識, 第六識, 第七識, 第八識으로 들어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설하고 있다. 이 방법도 널리 본다면, 관염염불법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宣什 이전에 이미 廬山慧遠의 白蓮結社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다. 그는 {般舟三昧經}을 소의경전으로 삼아 염불결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의 염불법은 주로 般舟三昧나 혹은 觀念念佛로 여겨진다.
다음으로 관염염불법은 觀像念佛, 觀想念佛, 實相念佛을 포함한 것으로 稱名念佛을 제외한 모든 방법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염불과 선수행이 하나라고 하는 것은 그 방법상에 비슷한 점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禪淨雙修法으로 선과 염불을 함께하는 것이다. 선수행자라고 할지라도 종교적인 염불행위는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를 주창한 사람은 永明延壽인데 그는 有禪有淨土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수행방법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선과 함께 할 수도 있으나 때로는 선수행을 하기도 하며, 때로는 염불수행을 하기도 하는 경우도 여기에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이상의 염불선법이 대부분 관염염불과 가까운데 반하여 念佛公案法은 看話禪의 화두 공안을 참구하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이는 조사선의 한 부류가 염불선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 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은 염불선법은 새로운 수행방법으로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즉 깨달음만을 중시하여 사회성이나 종교성을 망각한 禪의 한계성과 신비주의에 빠지기 쉬운 念佛의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 한국정토학회 (
http://www.jungtohak.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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