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부처님의 자비 광명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자유게시판

밀교의 형성과 불교의 소멸

오홍근

view : 3961

종교는 그 특성을 잃어버리든지 대중에게 위안과 현실적인 보탬이 되지 않으면 도태되어 사라진다. 

 

밀교의 형성과 불교의 소멸                   진실의 근원 / 바른길 허해구

 

1. 머리말

 

그 동안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던 일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한국에서 불교라고 생각해 오던 것들 중 많은 부분이 밀교입니다. 제를 지내고 염불을 하고 다라니를 외우며 불상과 탑에 대해 복을 비는 것은 모두 밀교적 형태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밀교가 성행한 이유는 BC 5세기부터 AD 7세기까지(약 1,200년간)의 오랜 변천과정을 가진 다양한 인도불교 (부처님의 원 가르침, 아비달마 불교, 중관불교, 유식불교, 밀교)가 삼국과 신라시대(AD4세기∼8세기)에 동시에 밀려들면서 부처님을 신과 같이 생각하고 제를 지내며 복을 비는 밀교가 원시신앙을 지닌 우리나라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삼국의 불교가 왕 즉 불 사상에 의한 호국불교였으며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도선 국사의 영향 하에서 불교를 국교로 삼고 팔관회를 개최한 것이라든지,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수십 년에 걸쳐 판목팔만대장경을 완성한 것도 모두 밀교적 신앙의 발로인 것이며 각종 궁중의식들과 법회의식들도 모두 밀교식 의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폐불 정책에 의해 많은 불교종파가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되었고 밀교종인 신인종도 중도종(삼론법성종)에 합쳐지고 총남종이 되었다가 결국 선종에 병합되어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서 밀교란 이름은 사라지고 불교만 남아 있지만, 불교 속에 녹아든 밀교의 형식과 관념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전통이 있기에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밀교의식과 기복신앙, 주문(다라니) 등이 중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2. 인도에서의 밀교 성립의 배경과 역사

 

부처님은 처음 인도사회의 미신적이고 관념적인 브라만교의 무지함을 깨치고 이 세상이 완전한 법계와 진리로 이루어져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초기불교에 있어 가장 중시되었던 것은 우주의 실상과 이치로서 법이 아닌 주문이나 비밀의식에 대해서는 말법으로 금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처님의 생생한 가르침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명력이 약해지자 점차 인도사회의 사상적 배경인 브라만교(힌두교)의 영향 속에 빠져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인도라는 지역의 브라만적 관습 속에 태어나 그 풍토 속에 뿌리내렸고 인도인들 사이에 전해진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어둡고 무지한 힌두적 관습 속에 나타나 참된 진리의 빛을 전했으나 높은 근기를 지닌 자만 알아보는 진리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그 이치를 깨닫고 전하는 이가 적어 결국 인도사회를 이끄는 주류가 되지 못하고 하나의 개혁운동으로 나타났다가 다시 그 속에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긴 인도 역사를 살펴보면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까왕과 꾸샨왕조의 까니슈까 왕만이 불교를 옹호했을 뿐 그 이외의 왕들은 대부분 힌두교를 숭상했습니다. 인도주화를 보더라도 불교 색채가 나타나 있는 주화는 까니슈까 왕 때뿐이고, 그 외의 모든 주화에는 힌두교의 신들이 나타나고 있음은 보더라도 인도에서 힌두교가 압도적인 영향력을 자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불교는 미신과 무지, 허황된 관념들과 악전고투를 벌이다 결국 거친 말법의 탁류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세상을 보는 완전한 해탈의 눈을 얻고 완전한 진리로 이루어진 법계를 보았으며, 진리로 이루어진 세상 속의 이치를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은 똑같이 세상을 보는 법과 이치를 깨닫고 참된 진실과 밝은 마음을 얻게 되어 아라한의 위치에 올랐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가르침이 현재 불법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법도 부처님의 곁에서 직접 법을 들었던 직계제자들이 죽고 경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수세기 동안 입을 통해 전해지는 과정에서 여러 힌두적 관념과 사유들이 들어와 참된 진리의 가르침이 변질되었고 이러한 다양한 생각과 논리들이 아비달마 불교라는 학문적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아비달마 불교는 20여종의 부파 형성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각 종파마다 다양한 시각을 가지고 불법을 해석하게 됩니다. 하나의 이치에 대해 각자 주장을 달리하는 20여종의 종파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참된 진실에서 벗어난 잡다한 관념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학문적 입장에서는 다양한 이론이 바람직하나 참된 진실을 밝히는 진리의 입장에서는 실상은 하나이기 때문에 실상이 아닌 것을 말하는 다양한 생각은 모두 관념이며 말장난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시각과 논리 중에서 인도인들의 마음에 가장 들었던 것은 힌두적 사유방식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대중부였습니다.

대중부는 인도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브라만적 관념과 논리에 부합되는 이론들을 적극적으로 불교 속으로 가져왔고 그러한 대표적 사상들이 바로 공사상과 허무주의, 기복신앙 등입니다. 이러한 대중부의 발달은 결국 대승불교로 이어지고 대승불교는 대중구제라는 기치아래 보신불, 응신불 사상을 정착시키면서 유신론적 신앙으로 변질되게 됩니다.

그리하여 7세기 중반에는 브라만적 관념에 물 들은 불교도들이 주술적 방법을 통하여 범신론적인 합일의 경지를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인도적 주술과 신에 대한 숭배사상이 불교 속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렇게 변질된 불교를 밀교라고 합니다.

이들은 신을 숭배하고 주문과 의식을 통하여 초월적인 존재와 합일함으로써 해탈을 추구하는데 이러한 입장은 결국 우주관과 깨달음이라는 측면에서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를 사라지게 함으로써 브라만적 관념에 젖은 인도인들에게 불교를 쉽게 받아들이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불교의 진리성을 모호하게 만들어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는 원인을 제공하게 됩니다.

 

똑같은 이슬람의 침략을 당했는데 힌두교는 살아남고 불교는 소멸한 이유는 불교의 정체성 상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불교가 밀교화 되면서 밀교는 힌두교 교리와 비슷하게 되었기에 인도인들은 굳이 불교를 믿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불교를 버려도 힌두교를 믿기만 하면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3. 밀교의 역사

 

이와 같이 밀교가 나타나는 단계를 굳이 나누자면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초기밀교>

초기밀교는 4세기로부터 6세기에 걸쳐 성립한, 다라니를 중심으로 하고 체계가 잡히지 않은 밀교로서 잡밀(雜密)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병을 치료하는 것, 장수하는 것, 비를 멈추게 하는 것 등 현실적인 요구를 설하는 다라니 경전, 제불보살을 대상으로 하여 공양하고 관상하는 일군의 밀교경전 등이 이 시대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불교가 발전하면서 여러 지역사회와 적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각 지역의 관습과 타협하면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밀교가 일어날 당시에는 대승불교가 성하였는데 당시 대승불교는 비록 겉으로는 중생구제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고도의 철학적 사유로 인하여 대중들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종교였습니다. 그래서 중생들에게 있어서 고통스런 삶의 현장에서 몸과 마음을 쉽게 달랠 수 있을 것 같은 주술과 신앙이 더 인기가 있었기에 밀교가 흥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기밀교>

중기밀교란 7세기경 새롭게 인도에서 성립한 밀교경전인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 金剛正經』등을 기초로 체계적으로 정립된 밀교로서 초기의 잡밀에 비추어 정통적인 체계를 갖추었다 하여 순밀(順密)이라고 합니다.

대일경』에는 결인법, 진언의 염송법 및 3종의 만다라 묘사법 등 밀교의 삼밀행(三密行)에 관한 중요한 내용이 망라되어 있으며, 밀교의 실천체계인 호마법(護摩法), 공양법(供養法), 관정법(灌頂法) 등이 설해져 있습니다.

대일경은 중생에게 원래 갖추어 있는 맑고 깨끗한 본성(보리심)을 나타내는 태장계만다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금강정경』은 대일경 보다 더욱 체계화되고 세밀한 실천법을 설하고 있는데 금강정경이 의도하는 바는 우주의 진리인 대일여래가 되는 것으로 시각적으로는 지혜를 나타내는 금강계 만다라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금강정경에서는 법의 성품을 금강성이라 하는데 이는 성적 열락과도 결부되어 있습니다.

즉 진언승에서는 지혜와 방편이 중심 교의이지만 금강승에서 지혜는 정적인 성격으로 여성, 방편은 동적인 고로 남성으로 보아 남녀가 교합함으로써 지혜와 방편이 조화된 해탈의 경지를 얻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만다라, 무드라, 만트라라는 형식을 통하여 깨달음과 법계, 불, 보살의 세계를 복잡하게 조합하여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이러한 관념화는 그 교의나 의례, 존상에 있어서 종래의 대승불교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후기밀교>

후기밀교란 8세기 인도에서 성립한 탄트리즘의 전개와 함께 성립한 밀교로서 속칭 탄트라 불교라 불리고 있습니다. 이 단계의 밀교는 지금까지 거의 취급되지 않았던 성적행법과 생리적 행법을 대담하게 도입하여 좌도밀교라는 이름으로 전해집니다.

좌도밀교(탄트라 밀교)는『금강정경』을 중시하고, 인간의 본능을 긍정하여 거기에서 진리를 찾고자 합니다.

그리고 감각적인 환희, 특히 남녀의 합체에 의한 성의 환희를 수행법에 편입시켜 최고의 이상적 경지에 도달하는 수행법으로 가르칩니다. 본래 좌도밀교란 여성과의 성적 의례를 그 근간으로 하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여성의 기능을 우주적 요소로 파악한 인도 본래의 관념과, 성적 의례를 통해 부처님이 얻었던 깨달음을 체험한다는 데에 논리적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감각적인 환희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일반인으로부터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으며 현실적으로도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적행위와 일치하는 금강승을 타락한 불교로 보는 견해가 생겨나게 되었으므로, 대일경의 진언승과 구별하기 위하여 진언승을 우도밀교, 금강승을 좌도밀교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밀교는 그 도덕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도 지식인들의 비난을 받았고, 또 불교의 특징도 힌두교와 다를 것이 없어졌으므로 13세기 초 힌두교의 압박과 이슬람교의 공격을 받자 인도에서 소멸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밀교는 현재 티벳트에 전해져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습니다.

 

4. 밀교의 특징

 

밀교는 복잡한 요소가 혼합되어 있어 그 특징을 간단히 나타내기 어렵지만, 크게 주술적인 비밀 의례와 주문, 신앙을 들 수 있습니다. 주술적 요소는 신이나 운명 혹은 자연현상 등 우리들의 행(幸)·불행(不幸)에 대하여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되는 대상을 신비적인 수단에 의해 이루려고 하는 것으로 원시신앙의 특징이며 힌두교의 주요 요소입니다.

이러한 비 법적 요소는 힌두적 풍토 속에서 불법이 희미해짐에 따라 점차 불교 속에 강하게 들어오게 됩니다. 4세기 이후의 불교를 보면 치독주, 치치주 등과 같이 일신을 방호하는데 효험이 있을 것 같은 주문은 무방하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경향은 대승불교에서 점점 짙어지다가 밀교가 성립하면서 본격화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님은 기도니 주술이니 하는 신비적인 원력으로 재난에서 벗어나려는 미신적인 수단을 일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중아함경] [장아함경] 및 [사분율] 등에 의하면, 석존은 처음에 제자들에게 세속적인 주술법을 행하는 것을 엄금하고 위반자는 파일제(payattika)를 범한다고 설했으며, 또, 팔리어 경전 소품의 소사편 제5에는 세속의 밀법들을 [축생의 학](tiracchana-vijja)이라고 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법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 밀교의 성립과 더불어 정식 교리로 채택되었으니, 그 말법성을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이를 명심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주술과 같은 이치가 없는 법을 멀리 해야 할 것입니다.

세속적인 의례에 대해서도 붓다와 제자들은 신도들에게 아무 것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본래 불교는 세속의 의례와 관계가 없었으며, 특별한 관심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를 밝히고 전하는 일이지 절차 같은 것은 부수적인 것으로 진리를 전하는데 지장이 없으면

크게 상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밀교에서는 힌두교의 영향아래 여러 가지 주술과 의례를 중시했으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비밀의식이 호마법(護摩法)입니다. 호마는 제를 지낼 때 불을 피우고, 그 속에 공물(供物)을 태우는 의식입니다.

호마의식은 재앙을 물리치고 현세적인 이익을 구하며 모든 장애를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베다 이래의 주술 전통으로 본래는 브라만교의 의식이었는데, 힌두교에서 이어받은 것을 다시 밀교에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나무토막을 태운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비밀의례는 승려들 보다는 주술사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래서 특별한 자격을 가진 자가 비밀의식을 행한다고 해서 밀교<밀의의 종교>라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례보다 더 중요한 밀교의 핵은 주문입니다.

주문은 처음 정신을 통일하고 삼매에 드는 수단으로서 요가 수행법에서 널리 사용된 것인데, 불법이 약해짐에 따라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하다가 밀교에서 주된 교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밀교에서는 진언을 외우면 우주의 신비한 힘을 받게 되어 인간의 힘이 무한자재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일념으로 "옴 마니 반메훔"을 외우면 마음만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육신까지도 금강소복괴산불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진언이나 불교의식 때 다라니를 외우는 것은 이런 밀교의 영향아래 나타난 것으로 현재 {천수경}의 여러 진언들과 {반야심경}의 주문 등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진언은 mantra의 의역으로 본래는 베다의 주문을 일컫던 말인데, 그대로 불교에서 받아들여 보통 내용이 긴 것을 다라니, 짧은 것을 진언이라고 하며 범어(梵語)를 원문 그대로 외웁니다. 그러나 주문을 외우기 전에 먼저 주문의 이치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뜻이 없는 진언을 외운다고 구업을 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좋은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단순히 그럴 것이라는 생각만을 가지고 온갖 논리를 만들어 내어 사람들을 관념에 빠뜨리거나 무익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말법의 행태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초기에 주문을 말하지 않은 것은 그 속에 올바른 인과의 이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문으로 하는 일이 좋아질 것 같으면 씨만 뿌려 놓고 가만히 앉아서 주문만 외우면 풍년이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연에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이치에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병을 낳게 하는 치병주를 외운다 한들 몸을 깨끗이 하고 규칙적인 운동으로 몸을 강하게 하는 것보다 효과가 좋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로 다라니를 정당화시켜도 그것은 이치에 없는 일이기 때문에 결실이 없는 것이며 이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우매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즘 이러한 말법의 영향 탓으로 각 종파마다 독특한 주문을 만들어 외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주문이 신성한 천신의 기운을 받게 하며, 자신들을 선택받은 사람으로 만들어주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높은 천상의 신이 자의로 자신들의 기운을 인간 세상에 내려 보내지 않습니다. 높은 차원의 신들은 세상의 일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세상에 떠돌면서 세상일에 관여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이 세상에 집착이 있어 머물게 되면 세상의 끈적끈적한 인력에 끌려 다시 재생해야 하는 업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높은 차원에 이른 영혼은 이 세상에 머물지 아니하고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시중에 나타나고 있는 모든 영적 현상은 거의 대부분 세상에 한과 집착이 많은 말법의 인연을 지닌 하급 령의 장난인 것입니다.

그래서 환상의 신들이 하는 말과 행동은 세상을 올바른 이치로 밝히는 진리를 가르치는 일이 없으며 대부분 일시적인 신비현상으로 사람들을 현혹할 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급 령들은 주문을 통해 산자와 죽은 자의 신호로 삼고 산자 속으로 들어와 영적 작용을 일으키며 세상을 어둠과 말법에 빠뜨리게 됩니다.

따라서 주문은 산자와 죽은 자의 암호로 죽은 자를 불러 영혼을 팔아 그 종이 되는 일이니 잘못된 인연으로 말미암아 함부로 주문을 외우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높은 차원의 신은 자신의 뜻을 이치로 나타내는 것이지, 자신을 섬기는 자에게 나타나 자신이 만든 이치까지 어겨 가면서 편파적으로 도와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기도를 하면 도와주는 현상은 대부분 하급령의 집착이며 장난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신이 행동에 의해 결과를 받는 것이 우주의 원리이며 하늘의 뜻인 것이니, 이를 명심하여 영에 의지하는 일은 금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 밀교의 특징은 신앙적 요소입니다. 부처님의 법이 여느 인도 종교와 다른 점은 진리를 강조하고 신을 중시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원래 불교는 자등명(自燈明)과 법등명(法燈明)이라고 하는 붓다의 가르침처럼 스스로 청정한 생활을 실천하는 가운데 자신을 완성해 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신을 중시하지 않으며, 의례나 예배의 대상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믿고 진리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 부처님의 정법인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가 대중화되고 변질되면서 대승불교에 와서는 붓다가 중생 구제를 위한 신의 화신으로 변하게 됩니다.

즉 브라만적인 인도에서 자리 잡기 위해서 불교는 인도민중의 토속적인 신앙과 기복적인 욕구에 적극 영합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고 민중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힌두신 들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불교는 인도인들의 정서에 맞게 변해갔지만, 결국 인도의 토속신앙인 힌두교와 비슷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 것입니다.

이때 힌두교 신으로서 불교에 들어온 신으로는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 부동명왕(不動明王) 변재천(辨才天)등이 있습니다. 제석천은 베다에서는 일체의 악마를 정복하는 천둥벼락의 신이었으며, 우빠니샤드 시대에 와서는 악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모든 신을 주재하는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던 인드라(Indra) 신입니다.

범천(梵天, Brahman)은 브라만교에서 만유의 근원인 브라흐만을 신격화한 우주의 창조신인데, 불교에서는 제석천과 함께 불법수호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부동명왕은 힌두교에서 시바신의 다른 이름으로 아찰라나타(Acalanta)라고 하는데, 대일여래의 화신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변재천은 불교에서 지혜·변설(辯舌)·기예(技藝)의 여신으로 힌두교의 신이며, 사라스바티(Sarasvat)의 역어입니다. 변재천은 이 경을 설법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게 지혜·장수·재산을 준다고 합니다.

그 이외에 절에서 많이 보는 사천왕은 원래 힌두교의 신화에서는 호법신이었는데, 동방을 수호하는 지국천은 힌두신인 드리따라쉬뜨라, 남방을 수호하는 증장천은 비루다까, 서방을 수호하는 광목천은 비루빡샤, 북방을 수호하는 다문천은 바이슈라바나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금강역사(Vajradhara)는 원래 인도에서 문을 지키는 야차의 종류에 속하는 수호신인데, 불교에서는 이를 인왕(仁王)이라 하여 불법을 지키는 신으로 도입합니다. 팔부중도 불법을 수호하는 8가지 신으로서 원래는 고대 인도의 신들이었습니다. 그 성격은 악마나 귀신이지만 붓다에게 교화되어 10 대 제자와 함께 붓다의 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천은 데바, 용은 나가, 야차는 약샤(Yaks), 아수라는 아수라(Asura), 건달바는 간다르바(Gandharva), 긴나라는 낀나라, 가루라는 가루다(Garuda), 마후라가는 마호라가(Mahoraga), 대흑천은 마하깔라에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밀교 시대(7∼8 세기)에 이르게 되면, 여러 관음 신앙이 나타나 예배형식이 확립되고, 특별한 가피력이 보편화됩니다. 특히 관음신앙은 북서 인도로부터 중앙아시아와 중국 등지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그 지역의 토착신앙을 흡수하여 더욱 발전하게 됩니다.

관세음보살은 범어로 아와록까떼쉬와라로 구원을 구하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하고, 나타나는 모습이나 형태에 따라 천수(千手) 십일면(十一面) 여의륜(如意輪) 준제(准提) 마두(馬頭) 등의 이름이 있습니다.

천수관음은 천 개의 눈을 가졌다는 인드라 신이나 비슈누, 쉬바 같은 힌두신들의 특성이 불교적으로 변용된 것입니다. 준제관음은 춘디(Chundi)라고 하는 힌두의 토착적요소가 강한 여신입니다. 마두관음은 하야그리바(Hayagriva)신으로서 원래는 비슈누의 화신이라고도 하고, 혹은 물고기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비슈누에게 살해된 악마라고도 합니다. 청경관음은 쉬바 신의 다른 이름인 닐라깐타(푸른 목을 가진 존재)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인도의 여러 지방에서 쉬바 신의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의륜관음은 찐따마니짜끄라, 대세지관음은 마하스타마쁘라따라는 힌두식 이름이 있습니다. 그외 지장보살은 크시티가르바(Ksitigarbha), 미륵보살은 메이뜨레야(Maitreya), 문수보살은 만주슈리, 보현보살은 사만타바드라(Samanthabhadra), 일광보살은 수르야쁘라바, 월광보살은 짠드라쁘라바(Candra-prabha), 십일면관음은 에까다샤무카인데 그 원형은 고대 인도의 폭풍의 신 루드라(Rudra)에서 유래합니다.

그 중 가장 주목해야 될 사항은 굽따 왕조 후기(AD 500년경)에 힌두교 내에서 붓다가 비슈누 신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수용된 것입니다. 이는 힌두사회가 불교를 자신의 울타리 안에 편입시킨 사례로서 불교가 힌두교에 흡수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라고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현재 인도사람들은 비슈누 신이나 붓다 그리고 쉬바 신이나 아와로까떼슈와라(觀音菩薩)의 차이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교는 힌두교의 한 종파로 정착되어 인도사회 내부에서 안정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결국 불교와 힌두교는 구별이 사라지게 됨으로써 마침내 인도에서 사라지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5. 밀교의 기본 교리

 

밀교의 교리에 관한 내용은 이글의 취지에 어긋나나 사실을 바로 알아야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차원에서 올리는 것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밀교는 기존의 불교의 가르침과 같이 중생에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깨달은 覺(bodhi)의 세계에서 본 교리와 사상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보다 시각적이고 육감적이며 상징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데 만다라라고 하는 그림을 활용합니다. 만다라는 원래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세계를 말한 것이나 그 의미를 변형하여 수행의 도량 또는 부처님과 보살상 그리고 제존 불보살을 봉안하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밀교에서는 중중무진한 법계연기의 세계, 불성이 법성화한 깨달음의 세계를 태장계(胎藏界) 만다라와 금강계(金剛界)만다라로 그리고 있습니다.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金剛頂經)은 밀교의 두 경전인데 태장계만다라는 대일경 사상을, 금강계만다라는 금강정경 사상을 각각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태장계만다라는 중생에게 원래 갖추어 있는 맑고 깨끗한 본성(보리심)을 나타낸 것으로 이법신(理法身) 또는 이만다라(理曼茶羅)라고도 하며, 금강계만다라는 깨닫지 못한 중생이 무명의 상태에서 수행하여 그 본성인 보리심을 깨달아가는 수행과정을 나타낸 것으로 지법신(智法身) 혹은 지만다라(智曼茶羅)라고도 합니다.

밀교적 교의에 따르면 태장계만다라와 금강계만다라 곧 이법신(色法)과 지법신(法法)으로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며 불이(不二)의 관계에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본체(本體)와 현상계가 서로 둘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밀교에서는 연기의 근원이 되고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실체를 육대(六大)로 파악하고 있는데,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식(識)이 그것입니다. 지(地)는 그 성질이 견고 부동하여 만물을 능히 생성(生成)하고 보호하는 덕성과 그 작용을 의미하고, 수(水)는 그 성질이 습윤(濕潤)하여 만물을 능히 섭수(攝受)하는 작용을 뜻하며. 화(火)는 그 성질이 따뜻하여 만물을 성숙시키는 작용을 말하고, 풍(風)은 그 성질의 유동성이 있어 만물을 장수(長養)하는 작용을 가리킵니다. 공(空)은 그 성질이 무애하여 일체를 포섭하며 걸림이 없는 작용을 말하고, 식(識)은 명료하게 아는 요지(了知)의 성질이 있어 결단하고 판단하는 작용을 가리킵니다.

이와 같은 육대(六大)에 있어서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등 오대(五大)는 색법(色法)으로서 물질적 근원을 의미하고, 식대(識大)는 심법(心法)으로서 정신의 실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색법(色法)과 심법(心法)의 관계에 있어서 오대(五大)를 떠나 식대(識大)가 있을 수 없고 식대(識大)를 무시한 오대(五大)도 생각할 수 없다고 합니다. 색법과 심법이 서로 걸리지 않는 연기적 관계에 있는 것은 육대(六大) 자체가 각기 다른 나머지 오대(五大)를 그 자체 안에 갈무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곧 地大는 단순한 지대(地大)가 아니요 그 자체에 수(水) ·화(火) ·풍(風) ·공(空) ·식(識) 등 다른 오대(五大)를 갈무리하고 있고 수대(水大) 또한 여타의 지(地) ·화(火) ·풍(風) ·공(空) ·식(識)을 자체 내에 갈무리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色法(五大)을 나타낸 태장계만다라와 心法(識)을 체계화한 금강계만다라도 서로 무관한 관계가 아니요, 서로 무애한 연기적 불이(不二)의 관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밀교에서는 우주와 인생을 형성하는 본체를 六大로 파악하고, 六大의 연기에 의하여 생성된 모든 존재의 모습을 다시 대만다라(大曼茶羅), 삼마야애다라(三摩耶愛茶羅), 갈마루다라(褐磨壘茶羅), 법만다라(法曼茶羅) 등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모든 법의 실상으로서의 4종 만다라는 종교적 의미와 철학적인 뜻이 있는데, 먼저 종교적 의미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만다라는 회화 조각 등으로 표현되는 불상의 집대성과, 그 각각의 불상 보살상이 갖추고 있는 相好의 덕성을 말합니다. 삼마야만다라는 관음보살이 연꽃을 가지고 있음은 동체대비와 물들지 않는 것을 상징하고 문수보살이 칼을 가지고 있음은 큰 지혜로써 범부의 어리석음을 끊는 것을 상징하는 것처럼 모든 불상과 보살상이 가지고 있는 물건과 그 수인 등의 특성을 삼마야만다라라고 합니다. 갈마만다라(karma-ma)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중생구제를 위하여 행하는 일체의 활동을 의미하고, 법만다라(dharma)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명칭과 그 가르침의 내용을 말합니다. 4종 만다라는 이와 같은 종교적 의미 외에도, 현실적인 철학적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대만다라는 六大로 구성된 우주와 인생의 전체적인 모습을 말하고, 그러한 전체는 개체가 모여서 형성되는데 이러한 전체를 이루는 개체들의 독립된 모습을 삼마야만다라라고 합니다. 갈마만다라는 일체의 존재와 사물의 활동작용을 말하고, 독립된 개체가 자기 그 특수한 활동작용에 따라 나타내는 언어 ·문자 ·음성 ·명칭 등을 법만다라라고 합니다.

이상과 같은 4만다라의 종교적 철학적 의미는 이 우주의 모든 존재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간에 모두가 4만다라의 모습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일체의 만상이 다 육대 법신의 현현인 까닭으로 하나의 티끌에서부터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대만다라요, 산천초목 모두가 삼마야 만다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전에 기록된 일체의 문자를 비롯하여 우리들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모든 언어, 명칭과 새소리, 바람소리에 이르기까지 법만다라 아님이 없고, 인간들의 일상적 활동작용을 위시하여 자연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갈마만다라라는 것입니다.

밀교에서는 우주와 인생의 진리와 참모습이 만다라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인간은 무지의 구름에 가려서 그러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갖가지의 불행과 악을 자초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밀교에서는 육대의 체와 사만다라의 모습에 대한 작용의 세계를 설명하고 중생으로 그 실상을 깨닫고 체득케 하기 위하여 그 수행방법으로 삼밀작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행위가 짓는 업에는 신, 구, 의(身, 口, 意) 삼업이 있는데, 삼밀(三密)의 청정으로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을 깨끗이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언어와 생각과 행동은 법성이 자신을 드러내는 그릇이고 진리와 합일하는 비밀의 통로이기 때문에 이것을 청정하게 하면 깨달음에 이른다고 보는 것입니다. 몸으로 나쁜 일을 하는 대신 불보살의 행위인 結印을 하고, 입으로는 좋지 못한 말을 하는 대신 진리를 상징하는 언어인 眞言을 염송하며, 마음으로는 삼매에 들어 법신인 大日如來의 덕성을 생각하며, 만다라(曼茶羅 mandala)나 얀트라(圖象 yantra)를 명상하면 중생에서 벗어나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이러한 중생의 수행방법인 有相三密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佛은 이미 法性 그 자체이기 때문에 六大대로 구성된 법계의 體相을 그 身密로 하고, 그 일체의 음성 ·명칭 등 법 만다라를 語密로 하며, 그 무소부지한 주변의 識大를 意密로 하기 때문에 이것을 佛의 三密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밀교 수행자가 三密을 행하면 부처님(大日如來)의 덕성과 그 삼밀의 위신력이 수행자의 三密에 상응하고, 유상삼밀을 행하는 수행자의 신심이 부처님의 삼밀과 加持하게 되어 부처님의 身密과 중생의 신밀이 加持하고 부처님의 意密과 중생의 의밀이 서로 감응하여 결국은 범부와 부처님이 서로 깨달음을 계기로 만나게 되고 중생과 법신이 一加하게 된다고 봅니다. 이러한 경지를 일러 밀교에서는 加持成佛이라고 합니다.

중생이 삼밀가지의 수행을 닦아 일단 가지성불을 하고 나면, 별도의 結印과 특수한 眞言의 지송이 필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성불의 입장에서는 육대법신과 사만다라가 깨달은 자의 실체이므로 일체의 행위가 결인 아님이 없고, 모든 언어와 음성이 그대로 眞言이요, 일체의 마음이 그대로 三摩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밀법을 행하는 자의 일신 三密上에 우주만유의 덕상이 모두 갖추어져 우주법계의 大我를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즉 밀교는 바로 이러한 육신 성불을 목적으로 하여 수행한다는 완벽한 이론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6. 밀교 교리에 대한 비판

 

그러나 이 말들은 논리는 그럴 듯한데 그 전제가 잘못 되었습니다. 이것이 절대적 진리이기 위해서는 그 가르침을 대각을 이루었다고 증명된 각자가 설했어야 하며 그분이 만다라를 그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밀교경전이 만들어질 7세기경에 당시 인도에 대각을 이룬 부처가 나타났다는 역사적 증거가 없으며 지금의 서지(書紙)적 결과에 의해서도 대일경과 금강정경은 모두 후기에 논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경이라는 것이 일반적 평가입니다.

즉 밀교의 경들은 정각을 이룬 분이 반야심에서 본 진리의 실상이 아니라, 논사들의 머리에서 나온 관념과 논리인 것이며, 태장계(胎藏界) 만다라와 금강계(金剛界) 만다라 또한 수행자들이 명상의 과정에서 본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깨달음의 세계를 모두 안다는 듯이 진리의 법계를 설하고 그러한 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인간의 허황된 관념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후기 불교의 논리가 실상의 진리가 아니라 생각 속에서 지어진 관념에 불과하니 이를 믿는 이들 중에 정각을 얻은 이는 나타나지 않고 탄트라 불교라는 기이한 형태가 나타난 것입니다.

부처님은 만다라를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실상에 존재하는 사실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상상과 관념으로 만다라를 그리고 태장계만다라와 금강계 만다라를 조화시켜 지혜와 방편, 심법과 색법, 본질과 현상계를 조화시키려고 하고 남녀 간의 합일을 통하여 해탈의 열락을 체험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생각 속에서 지어낸 관념의 산물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힌두교의 탄트리즘에서 시바와 샤크티와의 관계를 불교적으로 지혜(般若)와 방편(방편)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놓았을 뿐 그 바탕에 있어서 양자는 전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불법을 왜곡시키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남녀 간의 열락을 깨달음의 환희와 같다고 생각하여 도의 본체로 삼지만 이러한 논리가 얼마나 부처님의 종지와는 어긋나는 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바른 이치를 알아 마음을 닦아나가면, 점차 심신 속에 끼어있는 습이 사라져 업이 걸리지 않은 맑은 해탈심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때 성욕 또한 하나의 습으로 떨어져나가기 때문에 해탈한 자는 점차 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올바른 이치이며 정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밀교에서는 부처님의 종지와 정반대로 남녀 간의 성생활을 법의 요체로 하고 있으니 그들의 논리가 얼마나 관념적이며 말법 적인지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을 습으로 삼는 자는 결코 성을 벗어나지 못함은 인과의 원리상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들은 수행에 있어서도 몸과 말과 마음의 삼업을 닦는 삼밀(진언과 만다라에 대한 명상과 결인)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또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아무리 입으로 진리의 음성인 진언(眞言, mantra)을 염송한다고 해서 몸과 마음이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진언은 부처님이 밝힌 실상 속의 진리가 아니라 알지도 못하는 인도 브라만교의 주문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을 깨끗이 하자면 먹는 것을 조심하고 운동을 열심히 하여 기를 유통시키고 몸의 탁한 성분을 배출해야 하는 것이며, 바른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진언을 외울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진리를 배우고 깨달아 그 이치를 습득해야만 세상을 보는 바른 시각이 생기고 좋은 마음이 생겨 좋은 업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진언을 잘못 외우면 그 속에는 영계의 주문이 있어 사람을 신령의 노예로 만들게 되니 매우 조심해야할 현상인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는 그 이치를 밝혀 좋은 원인을 지어야 하는 것이지 주문을 외우고 신에 의지한다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밀교에서는 마음을 닦기 위해서 만다라(曼茶羅 mandala)나 얀트라(圖象 yantra)를 마음에 새기고 대일여래의 성품을 관상한다고 하는데 명상해야 할 것은 부처님의 자비심이며 세상에 대한 사랑이며 중생에 대한 보살행인 것 입니다. 아무리 만다라를 관상한다고 한들 그 속에는 참된 뜻과 이치가 없으니 바른 이치가 없는 그림은 사람을 공허하게 만들고 환상에 빠지게 할뿐입니다.

모든 불법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이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체를 정화하기 위하여 좌법, 호흡, 인계(印棨 mudra) 등을 수행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좌법으로 요가를 수행하고 결인을 하여 기를 받아들이고 한다고 해서 신체가 정화되거나 마음이 밝아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를 받아들인다 한들 마음은 외부에서 돌고 있는 기보다 더욱 미세하고 고차원의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마음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며 삶을 통하여 닦는 것입니다. 지금 각 종파에서 유행하고 있는 각종 명상기법이 말법이 되고 있는 것은 마치 그것이 수행의 전부인 것처럼 되어 삶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삶에서부터 시작되며 삶 속에 있는 것입니다. 삶을 소홀히 하는 진리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무용지물입니다. 귀하가 정녕 부처님의 깨달음이 정각이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부처님이 왜 고행과 선정에서 벗어나 바른 마음으로 바른 시각을 얻고 바른 이치에 따라 바르게 행동하여 바른 원인을 짓는 팔정도가 올바른 수행법이라고 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불교가 사실을 기초로 한 진리이며, 바로 보고, 좋은 원인을 짓는 실천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밀교는 힌두교의 관념과 논리를 차용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신비적인 열락을 추구하는 힌두교와 유사하게 됨으로써, 스스로 진리의 생명력을 상실하고 인도에서 소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자동입력방지 스팸방지를 위해 위쪽에 보이는 보안코드를 입력해주세요.

먼저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주세요.

창닫기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