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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가야 하는 길(1): 우리 사회 신행

오홍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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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사회 신행

 

 

세계는 지역마다 종교가 다르고 시대나 지역에 따라 종교가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고 발전하기도하고 바뀌어 가는걸 보면 결국 종교와 신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고 어떤 종교이던 인간의 마음을 맑고 밝게 하여 건전한 정신과 육체로 올바른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 존재가치는 있는 것이고 좋은 것일 것이다.

 

인간의 신행은 어떤 믿음을 갖고 인간의 마음을 맑고 밝게 하여 보다 좋은 생활을 하게 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겠지만 인간 우주 또는 신들이 전지전능한 신(神)인 절대자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와 어떤 우주 형성원리를 믿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느냐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만물이 절대자에 의해 만들어졌고 인간의 모든 고통은 절대자에 의해서만 구원받는다고 보는 구원신행과 절대자란 존재하지 않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유정들의 인식이 우주를 만들었고 인간자신이 스스로 노력으로 자신을 생사의 고통으로부터 구제할 수 있다고 보는 수행신행이 그것이다.

 

 

구원신행은 우주만물이 최고 신 즉 절대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절대자에 의해 조정 통제되며 인간의 생사, 행, 불행은 말할 것도 없이 사후에 영생구원도 절대자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성립된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행위도 절대자의 섭리에 따라 나타난 것으로 보고 인간의 의지는 절대자가 인간에게 부여한 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 가능하고 그것도 절대자의 의지에 의해 수정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어 절대자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자가 인간에게 부여한 의지의 범위도 인간의 우주 및 사물에 대한 인지(認知)와 과학의 발달에 따라 근세에 와서 그 범위가 다소 확대되긴 했지만 기본 틀은 큰 변화가 없어, 심지어 절대자가 시키는 대로 똑같이 살아가더라도 행복해질 수도 있고 불행해질 수도 있는데 이것도 절대자의 뜻을 표출하고 실현하기 위한 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즉 왕이 되던지(王權神授說), 거지가 되던지, 부귀 영화롭게 살든, 비참하게 살든, 모든 것이 절대자의 뜻이고 절대자가 허락하지 않으면 사후 안락한 영생도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신본주의(神本主義)신행이 구원신행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현생에서 원하는 안전, 부귀영화, 건강, 장수 등의 복록이나 다음 생에서 얻길 원하는 영생복락을 성취하려면, (절대자에 따라서 선악의 개념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하고 절대자인 최고신에게 충성하라는 절대자인 神의 율법에 따라 행동하고 살아가면서 절대자에게 자신이 원하는 일을 이루어 달라고 간청하는 기복(祈福)과 축원(祝願)을 할 수밖에 없으며 절대자는 간청하는 자의 마음이나 행위와 절대자의 의도에 따라 간청하는 자의 기복 즉 축원을 들어줄 수도 있고(축복:祝福) 안 들어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절대자가 자기의 간청을 안 들어 준다 하더라도 별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계속해서 간청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성의가 부족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고 더욱 열심히 절대자의 뜻에 맞을 것으로 생각되는 일들을 하게 되고 혹시 여건이 맞아 자기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라도 절대자의 뜻에 맞을 것이라 생각되는 행동을 더 열심히 하면 절대자는 더 큰 복을 더 많이 내려줄 거라고 생각하고 더욱 더 열심히 절대자의 뜻에 맞을 것으로 생각되는 일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좋은 방향으로 표출되면 (많은 경우 자기신행을 은근히 강요하고 배타성이 있긴 하지만)자선활동, 교육활동, 사회봉사활동 등 이타적인 행동(복을 짓는 작복:作福 활동)으로 나타나지만, 나쁜 방향으로 표출되면 자신들이 믿는 절대자를 앞세우고 자기들 집단의 이익을 위해 배타적이고 이기적으로 행해지는 자신들만의 단합, 타 신행자들과 공생거부, 무종교인이나 타 신행자에게 자기들이 믿는 구원신행 강요, 개인 또는 집단적인 광신행위, 살인, 테러, 전쟁 등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절대자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여 열과 성의를 다해 절대자에게 자신이 원하는 사소한 것부터 사후 영생복락까지 소원을 간청하고 그것이 절대자에 의해 이루어지기를 빌고(기복) 절대자인 신(神)의 마음에 맞을 거라고 생각하는 행동을 하는 축원(祝願)과 절대자가 간청자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축복(祝福)이 구원신행의 가장 핵심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복신행은 민속신행 또는 무속과 가까운 신행행태라고는 생각하면서도 구원신행은 기복신행과는 관계가 없고 양자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구원신행자들이나 무종교인들의 대부분과 일부 수행신행자까지도 오히려 수행신행이 그 본질인 불교를 기복신행으로 인식하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생겨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전형적인 구원신행인 크리스트교(카톨릭과 기독교)가 이씨조선 후기나 구한말 서양의 선진 과학문물과 함께 전래되어 크리스트교에도 과학문명같이 합리성이 그대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광복이후 오늘날까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화 사회가 되는 동안에, 미국 또는 유럽에서 서양문물을 배워 와서 전파하는 신지식 층과 신지식을 바탕으로 경제발전을 이끌어온 행정 관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 곳의 주 신행형태인 크리스트교를 믿게 되었고 일반인들은 지식층들이 믿는 종교는 더 발달된 신행으로 간주하게 되고,

 

정부수립 후 국가 경제가 어려워 외국원조에 의존하던 시절 국가간 원조의 대부분이 크리스트교 국가로부터 받게 되고, 민간원조도 거의 전부 미국이나 유럽의 크리스트교 단체로 부터 받아 국내의 크리스트교 관련단체를 통해 배분되는 과정에서 국내 크리스트교는 보육원 양로원 사립학교 병원 등 복지 후생시설과 교육시설을 만들어 이를 통해 교육과 사회봉사를 하면서 구원신행인 크리스트교를 전파하였으므로,

 

우리사회는 은연중 크리스트교를 믿는 사람들은 지식이 많고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사고를 가졌고 세계정세를 잘 아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들의 구원신행은 개인의 복과 사후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기복신행임에도 기복을 위해 하는 작복이 우리사회에 더 크게 영향을 주었고, 크리스트교 교리가 독선적이고 모순성은 있으나 비교적 간단하고 복잡하지 않아,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는 고되고 바쁜 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수행신행은 우주 인간 신등 만물은 원인과 조건에 따라 만들어지고 변화해가는 것이므로 전지전능한 절대자 최고신은 존재할 수 없으며 절대자가 존재하지도 아니므로 만물이 절대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라는 사고를 바탕으로 성립된다.

 

인간의 생사, 행불행, 고통도 신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구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인간이 노력하여 그 원인과 조건을 알아내고 그 원인을 제거하고 조건을 바꾼다면 인간도 스스로 생사 행불행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인본주의(人本主義)신행이고 인간 스스로 생사 행불행 고통의 원인과 조건을 체득하고 바꾸는 활동 즉 수행을 기본으로 하는 신행이다.

 

수행신행은 구원신행의 원초적인 모순점인 인간의지나 행위에 관계없이 생사 행불행 고통이 인간에게 주어진다거나 만물은 절대자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절대자는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이율배반적이고 비합리적인 논리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 합리적 생각과 노력으로 생사 불행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신행형태이다.

 

또 종교 발달과정으로 보면 수행신행은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에 이어 샤머니즘 중 가장 발전된 최고신(또는 유일절대신)신행에서 한걸음 나아간 범아일치(梵我一致)신행에 이어 발달된 가장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신행형태이다.

 

대표적인 수행신행인 불교를 보면 우주만물은 다 무한한 능력과 밝음을 간직하고 언제나 없어지지 않는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의식(불성)을 바탕으로 한 우리의 의식이 인식활동을 하므로 만들어낸 것으로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사물을 실체로 인식하는 것은 과거 어느 때부터 인지 알 수 없으나 사물이 실체로 존재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轉倒夢想: 痴) 실체로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사물을 소유하려고 집착하고(貪) 사물을 소유하려는데 방해하는 것을 미워하고 화를 내면서(瞋) 생을 거듭하여 사물에 대응하는 우리의 생각 말 행동이 각기 그 나름대로 형성되었는데 이를 업이라 한다.

우리의 업으로 이루어 진 우주만물은 업에 따라 항상 변화하는 것이고 고정된 자아(自我)가 없는 것이므로 중생의 업이 바뀌면 우주만물도 바뀌어가고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의 업이 바뀌면 그 사회 환경도 바뀌며 개인의 업이 바뀌면 개인의 성품도 바뀐다는 것이다.

 

우리가 탐, 진, 치(貪 瞋 痴)로 인한 각종 악업에서 벗어나 선업을 쌓고 의식을 맑히는 수행을 하여 업을 바꾸어가서 우주만물이 우리의 인식이 만들어 낸 것임을 확연히 체득하여 사물이 실체로 존재한다는 전도된 인식에서 벗어난다면, 생노병사 우비고뇌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신보다 높은 완전히 깨달은 경지인 고락에서 영원히 해방된 편안하고 청정하고 조용하며 자유자재한 경지인 부처의 경지에 도달하여 모든 인간과 신들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는 원인과 조건에 따라 결과가 생기고 그 결과는 다시 원인과 조건이 되어 결과를 낳으므로 원인과 조건에 의한 결과가 무한히 펼쳐져서 만물이 서로 연관 되어 있다는 연기론을 바탕으로 사물과 의식을 분석하여 정립하기 때문에 사물이 자기 인식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체득하여 깨닫는 것도 자기 자신이 하지 않으면 누구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부처라도 전지하나 전능하지는 않아 중생들이 이미 지은 업은 되돌릴 수 없고, 인연 없는 중생 제도할 수 없으며, 모든 중생 한꺼번에 제도할 수는 없으므로(대승기신론. 대지도론, 注1.참조), 부처는 중생들에게 깨달아야 하는 이유와 깨닫는 과정과 방법을 알려주고 깨닫도록 독려하는 위대한 스승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들의 삶은 그 자체가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과정이고 이 우주는 수행을 실천하는 학교와 같은 곳으로 인간을 비롯해 천상의 신,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에 있는 모든 중생은 학생이고 부처는 교장, 문수 보현 관음 지장 같은 보살들은 지혜 행원 자비 원력 등 각 과목을 담당하는 교사로 비유하여,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과목을 잘해야 하는 것처럼 깨닫자면 지혜와 공덕(무보상:無報償의 행원 자비 원력 등 무루선업:無漏善業의 실천)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과학의 발달 특히 물리학과 양자역학의 발달은 인식이 존재를 창조했다는 불교의 교설이 사실임을 밝혀주고 있는데 상대성이론의 질량(物質=色)과 에너지(空)의 상호 전환이나 양자역학의 파도뭉치 수축론이나 진공의 흔들림과 진공의 분극론, 상념의 힘과 소립자운동 변화설이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불교 가르침의 핵심내용 중 상당부분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고 해도 물리학이나 양자역학 분야에 학식이 없거나 조예가 깊지 않는 일반인들이 불교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쉬운 게 아니다. 인식이 존재를 만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출발한 불교의 교설은 너무 어려워 웬만큼 깊은 사유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선뜩 수긍하기 어렵고 더구나 이를 체득하는 것은 더 어렵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2600여 년 전부터 사유능력을 증진시키고 오감에 치우쳐 사물을 실체로 믿는 편향된 사고에서 벗어나 올바른 사유를 통해 존재는 인식이 창조한 것임을 체득하고 깨달아서 오욕락(注2.참조)에 억매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8정도(注3.참조)가 핵심인 37조도품이나 6바라밀을 의거한 여러 수행법을 체계화하고 이를 꾸준히 실행하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불경 내용의 대부분이 수행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내용일 뿐 아니라 “박학하더라도 수행하지 않으면 무지한 것과 다름없나니 먹는 이야기를 아무리 하더라도 배부르게 못하는 것과 같다.

 

만약 온갖 중생들이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생사의 허깨비 속에 살면서도 허깨비와 같은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리니 미혹한 마음에서 어찌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열반경의 가르침이나 “자기 자신을 등불 삼고, 법을 등불 삼아라.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 이 말을 스승 삼아 방심하지 말아라.”라는 석가모니의 유훈은 불교에서 깨닫기 위한 수행을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교의 수행은 자기 독자적으로 하느냐, 이미 수행을 해서 자기보다 수승한 깨달음을 이룬 존재들의 가르침이나 조력을 받으면서 하느냐에 따라 자력수행과 타력수행으로 나누어진다.자력수행에 의해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을 독각이라 하는데 이는 극히 드문 경우이고 대부분은 불경의 가르침이나 앞서 깨달은 스승의 지도로 수행이 이루어지므로 타력수행이라 할 수 있다.

 

타력수행이라고 하더라도 타인이나 타 존재의 조력을 받을 뿐 올바른 사유능력과 사유능력의 증장을 통해 사물이 자기 인식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체득하여 깨닫는 것은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므로 구원신행에서 말하는 절대자인 신에 의한 구원과는 전혀 다른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수행은 특정한 장소나 시간에 한하여 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의 모든 활동을 통해 할 수 있는데 일상생활을 8정도와 6바라밀에 의거해서 한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수행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6바라밀 중 보시를 하더라도 이 보시로 인해 누군가가 내려줄 현세 복이나 사후 영생을 바라거나 보시를 받는 자나 주변 사람들의 칭송을 기대하고 한다면 이는 구원신행의 기복신행과 같은 것으로,

자기가 보시한 만큼이나 자기가 한 보시에 상응한 보상을 후일 돌려받을 수 있는 복덕은 되지만 보시자의 의식에 자기가 한 보시에 대한 보상의 기대와 욕구로 오히려 탐심을 증대시켜 깨달음에 방해가 되고

이 보시자의 탐심이 은연중 보시 받는 자나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여 이들과 마찰을 유발해 어려움을 초래하므로 나쁜 업을 짓는 것이므로 수행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세 또는 사후의 복은 물론 보시를 받는 자나 주변인들의 칭송, 친화 등을 바라거나 생각하지 않고 보시하면서 보시한다는 생각마저 없이 보시를 한다면 자신의 기존의식에 깃든 오욕락과 자아에 대한 탐심을 순화 제거되므로 자신의 업이 바뀌고 탐심에 의해 편향되었던 사유방법을 고쳐지고 탐심에 의해 제한되었던 사유능력을 증장시킬 수 있어 올바른 사유로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되고

보시 받는 자나 주변사람들을 순화시킬 뿐만 아니라 친밀해져 보시자가 하고자 하는 일에 쉽게 공조하게 하므로 이것이 무위복덕 또는 공덕이고 수행이라는 것이다.

 

보상심리에 기초한 보시 복덕이라고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깨달음을 위한 수행에는 지장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8정도나 6바라밀의 다른 부분도 이와 같으며, 8정도와 6바라밀의 각 수행이 서로서로 뗄 수없는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어 어느 수행에 진척이 있으면 그만큼 마음이 맑아져 타 수행에도 영향을 주어 타 수행이 보다 쉽게 진척된다는 것이다.

 

또 기도, 염불, 주력, 절, 사경, 참선도 이와 같은데 기도를 하더라도 자신에게 복이 주어지기를 간구하는 기도 즉 기복이나 축원은 탐심의 증대를 가져와 깨달음에 역작용을 하여 수행이 되지 않으며,

이 탐심이 쌓여 점차 주변사람과 마찰을 유발시켜 기도하는 자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흔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도 거대한 우주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광대한 세계에 비하면 자신의 능력이나 재간은 극히 미미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도 극히 적다는 사실을 인식하고(하심:下心)과

오직 깨달은 자의 가르침과 그 마음을 배우고 닮겠다는 지극한 마음(지심:至心)과

자신이 깨달아 주변사람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주겠다는 마음(발심:發心)을 가지고 정성을 다해 할 때 마음이 정화되는 수행이 될 수 있으며 염불 주력 절 사경 참선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수행신행인 불교의 사찰을 승려들이나 뜻있는 이가 좌선수행이나 하고 일반인은 복을 빌거나 받으러 가는 곳으로 알고 있고 외부에서 볼 때 사찰도 각종 기복이 주 신행인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으며 심지어 많은 불교신자들도 타력수행을 구원신행의 구원 또는 기복 즉 축원에 대한 축복과 동일시 여겨 구원신행이 본질인 크리스트교보다 기복신행에 치중하는 것 같은 현상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숭유배불이 극심하여 승려의 신분을 나타내는 도첩제도 마저 없어지고 승려들이 환속을 요구받던 이씨조선 중기(성종-인종 년 간)부터 우리나라 불교는 산중에 위치한 작은 사찰을 중심으로 소수의 승려들이 근근이 수행하는 산중불교가 되었고,

 

이로 인해 선종과 교종이 자연스레 통합되고 승려들만의 수행이므로 사제 간 전수에 의한 교학공부와 선종의 간화선 수행법에 치중하게 되었으며, 이후 명종 조에 일시적으로 승과제도가 부활한 적이 있고 임진왜란 때 승군의 활동으로 불교가 사회적으로 일부 인정을 받아 가끔 사찰의 중창불사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유학을 근간으로 하는 이씨조선의 풍토 하에서 일반대중을 상대로 한 체계적인 교리교육을 하는 것은 어려워, 일반인은 불교의 교설이나 수행법을 제대로 배우고 익힐 기회가 없어서 불상이나 탑에 예배하고 공양물을 바치고 발복을 기원하는데 치중하던 현상이 근래까지 이어져 왔고.

 

일제가 한반도지배에 위해 국가 행정조직에 의한 사찰 통제를 목적으로 1911년에 만든 사찰령과 그 후속 법률에 따라 사찰에 대한 행정조직의 직간접 통제가 日帝시대와 해방을 거쳐 근래까지 이어지고,

 

일제의 일본식불교 도입으로 인해 생긴 대처승제도를 없애기 위해 해방 후 25 여 년 간에 걸친 비구승들의 승단 정화운동을 거쳤으며, 불교계의 가장 큰 종단인 조계종이 수행위주로 생활해온 비구승들의 행정경험 미숙과 운영능력 미비로 인해 일어난 내분 등으로 1990년대 초까지 안정을 찾지 못했다.

이로 인해 불교는 교세확장을 위한 사찰증대를 비롯해 경전번역, 도제양성, 신도교육, 포교에 역량을 펼 수 없어서 사찰별로 차이는 있겠으나 1980년 이후에야 신도 교육체계나 방법이 어느 정도 갖추어지고 교육을 통한 포교 활동이 이루어져, 구한말 전래와 동시에 교리교육을 통해 포교를 해 왔고 교단에 따라 조금 다르긴 하나 1960년대에 이미 의식 용어까지 순우리말로 바꾼 기독교나 카톨릭에 비하면 신도교육과 교육을 통한 포교가 늦게 시작되었고,

 

우리나라 기독교와 카톨릭에서는 크리스트교 발생지인 이스라엘이나 유럽에서는 오래전에 없어진 과거 유대민족의 신정일치 족장통치시절과 고대왕국 시절 유대 백성들이 국가에 내던 세금이었던 수입의 1/10(십일조)을 지금도 교회나 성당에 내어야 구원이 되는 것으로 은연중 인식시켜 그것을 재원으로 신행관련시설과 사회복지시설과 교육시설을 확충하고 사회복지활동과 교육활동을 전개하여 교세를 급속히 넓히고 있는 데 비해

수행신행인 불교는 보시공덕을 강조하지만 보시는 개인의 성향에 좌우되어 신도 수나 신도들의 생활수준과 관련은 있어도 연관성은 높지 않고 구원신행과 같이 은연중 보시를 강제할 수도 없어 사찰은 대부분 재정 면에서 부족하고 불안정하다.

 

또한 불교계는 크리스트교에 비해 종단의 중앙 통제력도 약하고, 성직자들이 수행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어, 사찰을 비롯한 신행관련시설이나 교육시설 사회복지시설을 확충하는데 어려움이 많아 최근 수십 년간 신도 교육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을 만한 신규 사찰의 건립이 극히 적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골목마다 산재한 교회에서, 카톨릭은 동마다 있는 성당에서 자체 교리교육과 심화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구원신행보다 비교적 오랫동안 또 더 깊게 배워야하는 수행신행인 불교는 인구1000만 명이나 되는 서울시내에 기초교리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곳이 불과 10여 곳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도 도심에서 약간 벗어나 접근성이 나쁜 곳에 있는 경우가 많아 특별히 배우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배울 기회가 적고,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각 지역의 토속신앙을 불법을 펴는 보살 또는 불법을 호위하는 신중으로 흡수하여 사찰 내(內) 토속신앙의 명맥이 살아있고, 사찰에서 하는 각종 소원성취기도나 평소 불공 및 법회 때 하는 긴 축원, 연등달기 행사, 복전사상에 의한 복전함 등 사찰의 의식과 시설 중 사전설명이 없으며 일반 무종교인들 보기에 샤머니즘적인 저런 것들이 왜 수행신행 장소인 사찰에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이것으로 인해 무종교인이나 타 종교인들과 불교 기초교리교육을 받지 않은 불교 신자들의 대부분과 불교교리를 배운 불교신자들 중 일부도 불교를 구원신행인 그리스도교와 별 차이가 없는 기복신행으로 알고 있던지 불교도 수행신행뿐 만아니라 기복신행을 하는 곳으로 알고 있으며,

 

짧은 시간의 불교 기초교리교육 또는 불교대학을 다니고 난 후 더 많은 불교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은 대개 불교경전을 공부하게 되는데 이때 불교경전이 방대하고 각 경전이 어떤 필요성에 의해 출현하게 되었는지 각 경전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몰라 어느 경전부터 읽거나 배워야 되는지 모르므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불교 강좌를 듣거나 불교를 잘 알 것 같은 사람에게 물어 추천해주는 대로 반야심경 금강경 등 반야경전이나 지장경 정토삼부경 심한 경우 화엄경 법화경 등 주로 대승경전을 배우거나 읽게 된다.

대개 이렇게 하여 대승경전을 읽거나 강좌로 여러번 들어도 이 경전들의 내용이 헷갈리고 지루하며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어 구원신행과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하여 불교를 수행신행임과 동시에 구원신행으로 생각하거나 완전히 구원신행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선을 강조하는 우리나라 불교 풍토가 불교 기초이론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아함경을 소홀히 하고, 아함경과 대승경전 특히 반야경전과의 가교 역할을 하는 원각경 승만경 같은 경전의 중요성을 기본 교리교육을 통해 인식시켜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불경이 우리말로 번역이 되었다 하더라도 불경이 결집되었을 때 시대상황과 언어습성이 현재와 다르고 중국번역을 거쳐 한글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언어의 의미 차이나 뉴앙스의 차이가 있는데 이것을 고려하여 번역된 우리말 불경이 지금까지는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반야심경은 반야바라밀을 설명하고 있는데도 반야심경을 보면서도 다른 데에서 반야바라밀을 찾고 있다거나,

무량수경의 십념왕생원(十念往生願)을 읽고 아미타불의 명호를 열 번만 부르면 극락세계에 왕생한다고 생각하거나,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읽고 관세음보살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모든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거나,

지장경 12품(보고 들어서 얻는 이익) 13품(신과 인간을 부촉)을 읽고 지장보살의 형상을 조성하거나 보거나 찬탄 예배 절하거나 향 꽃 의복 음식 보배로써 공양하거나 명호를 염송하거나 지장경을 보거나 외우는 경우의 큰 이익을 말하면서 불교를 기복 또는 주술신행으로 이해하려는 것과 같은 경우들이다.

 

무량수경의 십념은 열 번 염송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시방삼세(十方三世)할 때의 十과 같은 뜻으로 지극한 마음으로 무수히 염송하므로 온통 아미타불 생각으로 가득한 염불삼매 경지에 도달하여 의식이 청정해졌을 때 극락정토에 간다는 것이고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도 “오직 한 마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해탈을 얻게 하느니라” 라고 전제하여 무량수경과 같이 염불삼매로 청정한 의식이 된 경우에 각종 고난에서 벗어나 해탈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장경에서 말하는 이익도 지극한 마음과 정성으로 불사, 기도, 절, 보시, 염불, 간경 수행을 하여 마음이 청정하고 그 원력이 지장보살의 대 원력과 같이 되었을 때 그 수행공덕이 주는 이익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지장경 13품 이익 중 16번째 숙명통을 얻게 된다고 했는데  그냥 지장경을 보거나 지장보살에게 공양 예배하여서 이것이 가능하다면 지장경을 보고 지장전에 공양 예배 다녀 온 사람은 다 숙명통을 얻어야 할 것인데 그렇게 될 리 없지 않는가?

 

예수는 신약에서 죽은 나자로를 살려내는 설화 같은 얘기를 통해 자신의 능력과 자신이 자기민족 유일신의 아들임을 믿게 하려 했으나 석가모니는 잡비유경에서 외아들을 잃은 슬픔에 죽으려는 노모에게 사람이 죽지 않는 집안의 향불을 얻어 오면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하여 삶은 귀중한 것이나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무상의 이치를 깨치게 하는 것을 보면 구원신행과 수행신행은 사물에 대응하는 방법이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각 신행은 신행방법의 장점을 서로 흡수하여 활용하게 되고 이렇게 신행형태가 뒤섞여지면 모든 사람을 자신들과 같은 수행자로 보는 포용성이 강하고 관용적인 수행신행이 일반적인 사회에서는 별문제가 없겠으나 배타성이 강해 자기 신행으로 사회를 모두 개종시켜야 된다고 생각하는 구원신행자가 많은 사회에서는 신행의 공존에 어려움이 따르게 되어 사회갈등에 따른 부작용이 많아지게 된다.

 

한(韓)민족이 1600여 년간 그 정신적인 바탕 위에서 살아오면서 갈고 닦아온

귀중한 정신문화 유산이고 그 합리성과 논리적인 체계를 서구인들도 감탄하며 타 신행에 비교적 너그러운 불교가 그 신행인구비율이 감소되고 젊은 층일수록 신행비율이 낮아지며 무종교인들의 선호비율마저 낮아지고 있으니 앞으로 우리사회가 신행공존에 따른 사회적인 비용이 더 증가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

 

신행행태가 뒤섞이면서 과거 인도에서 수행신행인 불교가 구원 기복신행인 힌두교에 흡수된 것처럼 크리스트교신자들의 적극적인 성시화운동이나 전 국민의 크리스찬화 운동에 의해 우리나라가 크리스트교인들만의 국가가 되지는 않더라도 불교가 극히 쇠퇴되고 난 이후 언젠가 우리 후손들이 유럽이나 타 선진국에서 불교를 다시 도입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 기우(杞憂)일까?

 

      注1. 시공(時空)을 확대하면 중생연(衆生緣)자비, 법연(法緣)자비, 무연

             (無緣)자비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게 됨(열반경)

      注2. 식욕, 수면욕, 색욕, 재물욕, 명예욕

      注3. 8정도 : 정견,정사유(혜).

                        정어,정업.정명(계).

                        정정진,정념,정정(정)

             37조도품 : 4념처, 4정근, 4여의족, 5근, 5력, 7각지, 8정도.

             6바라밀 :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2009.12. .d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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