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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출처 - 경주의 유물과 유적지

서용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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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유물과 유적지
불국사
불국사는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成)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이차돈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년(법흥왕 15)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과 기윤부인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74년(진흥왕 35)에는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이 절을 중창하고 승려들을 득도하게 하였으며, 왕의 부인은 비구니가 된 뒤에 이 절에다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다. 또한 670년(문무왕 10)에는 이 절의 강당인 무설전(無說殿)을 짓고 신림(新琳)·표훈(表訓) 등 의상(義湘)대사의 제자를 머물게 하였다고 전한다. 이들 기사는 신라 불교의 역사를 볼 때 다소 모순이 있지만, 현재 대웅전에 봉안돼 있는 불상의 복장기에서 이 불상들이 681년(신문왕 1) 4월 8일에 낙성되었다고 하므로 당시의 불국사가 대규모는 아니었더라도 대웅전과 무설전을 갖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국사가 대찰이 된 것은 김대성에 의해서였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절은 75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774년(혜공왕 10) 12월에 그가 목숨을 마칠 때까지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뒤 국가에서 완성시켰다. 준공 당시 이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 극락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 비로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 관음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 지장전을 중심으로 한 일곽 등 5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었다. 이 밖에도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건물의 이름이 45종이나 나열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큰 건물로는 오백성중전(五百聖衆殿 : 32칸)·천불전 등이 있다.

김대성이 중창한 뒤 임진왜란 전까지 이 절은 9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쳤다. 1593년(선조 26) 5월 왜구가 침입하여 백성들과 물건을 노략질할 때 좌병사(左兵使)는 활과 칼 등을 이 절의 지장전 벽 사이에 옮겨다 감추었고, 왜병 수십명이 이 절에 와서 불상과 건물과 석조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감탄하다가 무기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여덟사람을 밟아 죽이고 절을 불태워버렸다. 그때, 난을 피하여 장수사(長壽寺)에 와있던 담화(曇華)가 문도를 이끌고 불국사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대웅전·극락전·자하문 기타 2천여 칸이 모두 불타버린 후였고, 금동불상과 석교(石橋), 탑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 후 20년이 지난 뒤부터 점차 복원을 시작 1970년대까지 복원공사가 계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가탑(釋迦塔)
높이 10.4m. 국보 제21호. 무영탑이라고도 불린다. 이 탑은 기단부나 탑신부에 아무런 조각이 없어 간결하고 장중하며, 각 부분의 비례가 아름다워 전체의 균형도 알맞고 극히 안정된 느낌을 주는 뛰어난 작품으로, 목조탑파의 형식을 답습하였던 신라초기의 석탑들과는 달리 완전한 신라식 석탑의 전형을 확립하였다. 이 석탑은 창건 이후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왔으나 1966년 9월 도굴범에 의한 석탑훼손 사건이 발생하여 손상됨에 따라 같은 해 10월에 탑신부의 해체수리작업이 시작되었고 12월에 완전히 복원되었다. 해체수리 과정에서 2층 옥신의 상면 중앙에 있는 방형사리공 안에서 사리를 비롯한 사리용기와 각종 장엄구 및 무구정광다라니경이 발견 되었는데 특히 이 다라니경은 당나라의 측천무후자(則天武后字)를 사용한 세계최고의 목판인쇄물로서 학계에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현재 국보 제126호로 일괄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이 탑에는 백제의 공인(工人)인 아사달과 그를 찾아온 부인 아사녀의 애화가 전해오고 있다.
다보탑(多寶塔)

국보 제20호. 높이 10.4m. 다보불탑 또는 칠보탑이라고도 하며, 탑의 기단 위에 이중의 방을 구축하고 맨 위에 상륜부를 구축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탑은 법화경의 '견보탑품(見寶塔品)'에 근거하여 건립되었다. 견보탑품은 다보여래가 『법화경』의 진리를 설하는 석가모니를 찬양한 후, 다보탑 안의 자리 반쪽을 비워 나란히 앉도록 했다는 것이 중심 내용이다. 다보여래는 석가모니 이전의 과거불로서 영원히 살아있는 본체로서의 부처인 법신불이다. 다보여래는 보살의 시절에 "누군가 법화경을 설하는 자가 있으면 그곳에 많은 보배로 장엄된 탑을 신통력으로 나타나게 하여 그 일을 찬양하리라."하고 서원하였다.
양식상으로 볼 때 이 석탑은 우리나라 석탑구조의 기본형을 따라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이루어졌으며, 평면은 기단부부터 방형을 기본으로 하되 탑신부의 상부구조는 8각으로 되어있다. 기단부의 사방향에 있는 계단에는 본래 난간이 가설되어 있으며, 현재도 계단의 하단 양측에는 원래의 유구로 보이는 석주가 남아있다.
이 탑은 1925년경 일본인들에 의해 전면 해체, 보수되었으나 이에 관한 보고서 간행은 물론 간단한 기록조차 남겨놓지 않았으며, 탑 속에 장치된 사리를 중심으로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에 관하여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또 이 보탑에는 사방의 보계(寶階)가 마련된 갑석 위에 네마리의 사자가 안치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언제인지 모르나 없어지고, 세마리가 있었음을 1902년에 현지조사한 일본인 학자가 확인하고 있으나 그 중 두마리는 다시 일본으로 반출되고 현재는 하나만 남아있다.

청운교·백운교(靑雲橋·白雲橋)
국보 제23호. 현존하는 신라의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두개의 돌다리가 45°의 경사로 높다랗게 걸려있는데, 계단을 다리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장방형의 돌기둥 위에 받쳐진 홍예(虹霓)는 반원을 이루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U자를 뒤집어 놓은 모양으로서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의 홍예의 형태를 시원하게 보여주고 있다.
연화교·칠보교(蓮華橋·七寶橋)
국보 제22호. 안양문으로 오르는 다리로 청운교·백운교와 모습은 비슷하지만 경사가 훨씬 완만하게 처리 되어 있다. 아래 있는 것은 연화교인데, 돌계단 위에 연꽃잎을 새기고 중앙에 바둑판 모양의 무늬를 열개나 이어놓은 점이 특이하다. 위쪽의 다리는 칠보교로서 연꽃이 조각되어있지 않다.
청운교·백운교에 비해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의 다리로서, 신라시대 석조가구 기법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석굴암(石窟庵)
751년(경덕왕 10년)에 김대성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석굴암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는 일연(一然)의 『삼국유사』권5「대성효이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석굴암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보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를 세워서 신림과 표훈을 청하여 각각 머무르게 하였다. 그리고 석불을 조각하려고 큰 돌 한 개를 다듬어 감개(龕蓋 : 감실을 덮은 천장돌)를 만드는데 돌이 문득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이에 분노하다가 그 자리에서 잠들었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제 모습대로 만들어 놓고 돌아갔으므로 일어나 남쪽 고개에 급히 올라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을 공양하였다고 한다.
석굴암은 신라인의 믿음과 슬기로 만들어진 찬란한 문화의 금자탑이다. 그것은 비단 미학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그러한 걸작을 이룩하게 된 신라인의 민족혼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모은다.
석굴암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왜 석굴암이 토함산에 자리잡게 되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토함산은 신라 오악(五岳)의 하나로 신라인들에게는 영악(靈嶽)으로 존숭받았던 산이다. 토함산은 동악으로서, 그 이름과 방위로 보아 일찍부터 용의 신앙과 결부된 영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한 영악에 석굴암이 건립되었다는 점에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특히, 토함산은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을 이루고 있었다. 죽어서라도 호국대룡이 되어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서원을 세운 문무왕의 넋이 담긴 대왕암이 토함산 밑 동해변에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석탈해가 동해에 상륙하여 토함산정에 오른다는 고사가 있다. 이 고사는 곧 동해로부터 서라벌에 이르는 최단통로가 바로 토함산을 통과해야 하며, 또 이 동악의 준령이 신라 건국이래 동방으로부터의 위협을 막아주는 중요한 군사적인 요새이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천하무적 역사였던 석탈해는 뒤에 동악의 산신이 되었고, 동해로부터 조국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신라의 국토방위상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리적 요충이었으며, 빈번한 왜구의 침입을 맞는 제일의 관문이었던 토함산에는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감은사·무장사·원원사 등이 한 집안의 명복, 나아가서는 국가수호를 위한 이념으로 세워졌던 것처럼 불국사와 석굴사도 역시 같은 뜻으로 창건되었던 것이다. 동악의 수호신이 된 석탈해, 그리고 동해의 호국대룡이 된 문무대왕, 이들 두 왕에 대한 숭상의 정은 석굴암을 창건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져 본 일이 없는 심정이었다.
둘째, 석굴암이 창건된 경덕왕대의 내외정세와 경덕왕이라는 인물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석굴암 창건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볼 수 있다. 경덕왕대는 정치와 문화의 각 방면에 걸쳐 신라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최고의 융성기를 이룩하였던 시기였다.
당시의 신라는 통일 초기의 수습과정을 벗어나 안정과 내적인 충실을 얻은 시기였다. 이러한 안정은 신라에 국한된 일은 아니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여러 나라가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일찍이 찾아 볼 수 없었던 평화를 누리던 시기이다. 특히, 신라의 경우 불교문화는 국민총화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화엄의 도리를 바탕으로 이룩되었고, 그 정신은 조형예술에 있어서도 독특한 성과를 이루게 하였다. 경덕왕은 단순한 지배자가 아니라 진리의 성자로서 처하려 했고, 이러한 정치이념은 조형을 통하여 더욱 구체화되었다.
막대한 물량과 인원을 동원하여 구축한 석굴암도 김대성 개인의 발원에 의하여 시작되기는 하였으나, 사실은 탁월한 예술적 안목과 신심을 지닌 경덕왕의 뜻에 크게 힘입었음을 간과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오히려 김대성 개인의 발원에서라기보다 경덕왕의 원찰로서, 또는 나라를 수호하려는 국찰로서 경영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김대성의 발원은 신라국민의 염원이었고, 인공적인 석굴의 경영은 온 국민의 정성이 모임으로써 가능하였고, 또 그 찬연한 예술적 기품은 이러한 거족적인 호흡의 일치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고 할 것이다. 석굴의 건축적 구조가 신라인의 창의와 전통에서 이루어졌고, 수려하고 품위있는 불상은 그들이 연마한 정성에서 이룩되었다. 그것은 승화된 생활미학의 결정이며, 조국을 지키려는 강인한 민족정신의 발로였다.
황룡사 구층목탑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나라로 유학 갔던 자장이 태화못가를 지나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황룡사의 용은 나의 아들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그 절에 돌아가 구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 하였다.
자장스님이 귀국하여 선덕여왕에게 구층탑 건립의 필요성을 말하자, 선덕여왕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탑을 만들게 하였다. 탑을 9층으로 한 것은 1층부터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 등 아홉 개의 이웃나라로부터 시달림을 막기 위함이었다.
높이 때문에 여러 차례 벼락을 맞고 또 지진 등으로 기울어져 다섯 차례나 수리하거나 재건하였다는 사실이, 경문왕 13년(873) 탑을 재건할 때 만들어 넣은 사리함내에서 발견된 「찰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고종25년(1283) 몽고군의 침입으로 황룡사 전체가 불타버렸을 때 함께 없어지고 지금은 초석과 심초석만이 남아 있다. 이 심초석은 탑의 무게중심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구층목탑 자리는 한 변의 길이가 사방 22.2m이며, 탑의 높이가 80m나 되는 거대한 탑이었다. 이 높이는 요즈음 건물로 따지면 30층은 될 높이이다. 절 건립 할 때 중심 불탑으로 건립되었으나  이 후 계속 수리를 거듭하였으나, 고종 25년(1238) 몽고병의 침입으로 황룡사 가람전체가 불타버렸을 때 함께 없어졌다. 이탑은 신라와 고려 두 왕조에 걸쳐 593년 동안 여섯 차례를 수리되는 등 숭앙을 받아왔다.
1976년부터 10년간 황룡사터 발굴조사가 진행된 과정에서 이 목탑터도 세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목탑터는 발굴 이전부터 금당터와 같이 기단 상면에 노출되어 있어 규모와 초석의 배치형식을 알 수 있었다. 현재는 옛터만이 남아 있다.
분 황 사
황룡사와 담장을 같이하고 있는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되었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스님이 계셨던 절이다.
643년에 자장스님께서 당나라에서 대장경의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 원효스님은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 수많은 책들을 남겼다.  원효스님이 돌아가시자 그의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상을 만들어 이 절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였다고 한다.
또한 분황사 본전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다. 경덕왕 때 희명의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자,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가서 '도천수대비가'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도 있었다고 전하며, 경덕왕14년(755)에는 무게가 30만6,700근이나 되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양하였다고 한다. 역사가 오랜 분황사에는 많은 유물이 있었을 터이나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모두 없어졌고, 지금은 분황사에 둘러놓은 어른 키만한 담장 위로 석탑의 윗 부분만이 보이는 자그마한 절이 되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석탑과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이라는 우물과 당간지주 등이 남아있으며,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석재들이 한편에 쌓여 있다. 1965년 분황사 뒷담 북쪽으로 30여 미터 떨어진 우물 속에서 출토된 머리없는 불상들은 경주박물관 뜰에 늘어서 있다.
 분황사의 가람배치와 규모를 확인하기 위하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1991년부터 연차적으로 발굴한 바에 의하면 『品』자 모양 1탑3금당의 창건가람배치임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이와 비슷한 가람배치는 북한에 있는 정릉사터등 고구려 초기 절터에서 조사된바 있으나 신라지역에서는 최초로 확인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이 후 3차에 걸친 중건과정에서 1탑1금당 형식으로 바뀌었으며, 금당의 방향도 오늘날과 같이 남향에서 서향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하였다.
출토유물은 대부분이 건물에 사용되었던 기와 종류로서 1,500여점이 출토되었으며, 당시의 불교문화와 신라초기 사찰의 건축양식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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