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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출처 -반기문 (조용한 열정 )관한 책

서용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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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한약방에 깃든 유년시절


형제는 생선 냄새를 맡는 고양이처럼 코를 킁킁거렸다. 천장에 주렁주렁 달린 한약재 주머니 가운데 계피와 감초를 찾고 있었다. 혀끝에 살살 녹는 감초 맛은 생각만 해도 침이 고였다. 사탕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눈치 빠른 동생이 드디어 감초 주머니를 찾아냈다. 겉에는 알 수 없는 한자가 적혀 있었지만, 냄새만 맡고도 형제는 귀신같이 감초와 계피 주머니를 찾아냈다. 형이 바닥에 엎드리고 동생이 등을 밟고 올라섰다. 주머니의 끈을 푸는 순간, 어디선가 “네 이놈들!”하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할머니가 호랑이 눈을 부라리며 달려온 것이다. 화들짝 놀란 형제는 뺑소니를 치려 했지만 대번에 붙들리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그러듯 “어이, 놔두게! 애들이 다 그렇지 뭐”하며 허허 웃었지만 단단히 화가 난 할머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개구쟁이 큰 손자가 장차 UN의 수장(首長)이 되리란 걸 상상이나 했을까.

반 총장은 1944년 6월 13일 충북 음성군 원남면 상당 1리 행치 마을에서 태어났다. 음성읍에서도 청주방향으로 자동차를 타고 10분쯤 가야 나오는 곳이다. 광주 반씨 집성촌으로 아직도 이 마을 열일곱 가구 가운데 열여섯 가구가 반씨 성을 갖고 있다. 반 총장은 아버지 반명환(潘明煥, 작고) 씨와 어머니 신현순(辛鉉順) 씨 사이에서 4남 2녀의 장남으로 세상에 나왔다.

반 총장의 막냇동생 경희 씨는 “큰 오빠 위로 아들, 딸이 있었지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해서 오빠가 사실상 장남”이라고 했다.

반 총장 아래로 남동생 셋과 여동생 둘이 태어났다. 바로 밑의 두 살 아래 동생 기상 씨는 제일은행 마포 지점장을 지낸 후,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첫째 여동생 정란 씨는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했다. 셋째 남동생 기호 씨는 손해보험협회에 근무하고 있으며, 막내 여동생 경희 씨는 약사다. 둘째 남동생 기훈 씨는 충북대 재학 중에 수영을 하다가 사망했다.

반 총장의 할아버지는 충청북도 음성에서 한약방을 운영했다. 천성이 선비였던 할아버지는 약을 짓지 않는 날이면 한지를 펴놓고 붓글씨를 썼다. 부전자전이랄까. 아들인 반명환 씨도 시와 붓글씨에 능했다. 그렇지만 친구와 술을 더 좋아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청주 농고를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두뇌가 우수했다. 물류업체인 충북산업의 소장을 지내서, 반 총장이 어렸을 때 마을에서는 그를 반 소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부친의 봉급으로 가족들은 50년대 말까지는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했지만,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의 빚보증을 섰다가 여러 차례 적지 않은 돈을 날리면서 갑자기 가세(家勢)가 기울었다.

당시 고향 사람들은 반명환 씨를 인정이 많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 쌀이건 돈이건 선선히 빌려주었다고 한다. 게다가 마음이 여려서 돈을 떼이는 일이 많았고,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는 바람에 상황이 더 나빠졌다.

반 총장 부친의 경제적 상황이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은 도움이 필요한 친구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유부단한 성격 탓이 아니라, 남의 불행에 등을 돌리지 못하는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반명환 씨는 1950년대 농업학교 시절에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나병에 걸리자 그를 집으로 데려와 6개월 동안이나 집에서 머물게 했다. 그 친구는 가족에게서도 쫓겨나 갈 곳이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반 총장을 비롯한 가족들 역시 그를 집에 들이는 것을 은근히 꺼렸다. 전염병이 많이 나돌던 시절, 나병 환자와 한집에서 같이 살고 함께 식사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밥상을 따로 차리는 가족들을 보고 반명환 씨는 엄하게 꾸짖었다. 음성 환자여서 절대 병을 옮길 염려가 없는데, 왜 배척하느냐며 화를 냈다. 반 총장의 막내 동생 경희 씨는 “지금도 그분과 함께 살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아찔하다”고 말한다.

첫째 동생 기상 씨는 “지금 생각해도 아버지가 나병환자를 데려와 함께 산 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아버지가 선행(善行)을 많이 하신 덕에 형님이 외교부 장관을 거쳐 UN 사무총장까지 된 것 같다”라고 말한다. 반 총장의 형제들은 부친이 엄한 분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가정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명환 씨는 90년대 초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반 총장에게 가장 큰 힘이 된 사람은 어머니 신현순 씨다. 형제들은 어머니에 대해 “독실한 불교신자로 지금도 새벽 2~3시에 일어나 자식들을 위해 불공을 드리는 분”이라고 했다.

어머니 신씨에게 반 총장은 장남 이상의 의미가 있다. 반 총장을 낳기 전에 어린 나이의 아들을 잃은 적이 있었던 어머니 신씨는 반 총장을 잉태하기 전부터 치성을 올렸고, 낳은 후에도 큰 아들을 끔찍이 아꼈다.

신씨는 영특하고 착한 반 총장을 볼 때마다 하늘이 내려준 선물 같아서 흐뭇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그가 외교부 장관이 될 때, 그리고 UN 사무총장 선거를 시작할 때도 예순 살이 넘은 아들을 위해 매일 새벽 불공을 드렸다. 반 장관은 외국에 출장을 나갈 때면 다른 것은 몰라도 어머니께 전화 드리는 것만큼은 절대 잊지 않았다.

 

 


 

반기문의 완벽한 고교 성적표


▶ 전 학년에서 수위를 차지한 수재이며 모범학생(1학년)

▶ 모든 면에서 착실 근면하며 모범학생이다(2학년)

▶ 품행 방정 우등생이며 3년 개근, 서울대 문리과 대학 정외과 합격(3학년)


1962년 반기문 총장이 충주고를 졸업할 당시 성적표는 완벽함 그 자체다. 성적표의 종합기록란에 기입된 내용은 그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모범생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공부를 아주 잘했다는 이들도 학창시절 성적표를 보면 어느 한구석에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반 총장의 성적표에서는 오점을 찾아볼 수가 없다. 교사들의 평가를 찬찬히 뜯어보면, 반 총장은 단순히 공부 잘하는 학생에 그친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는 평가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그의 단정한 태도, 성실함은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대로 였다. 안영수 씨는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성격이 급하건 느리건 간에 그 나이 때는 어린애다운 치기(稚氣)가 있게 마련인데, 반 총장에게는 그런 모습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어른 흉내를 내며 뭔가 많이 아는 척하지도 않았고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나서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의 성적표를 보면 전 과목이 ‘수’로, 3년 내내 1등이다.

국어, 수학, 영어뿐만 아니라 미술, 체육, 음악까지도 다 ‘수’였다. 중학교 때 한 번 ‘우’를 받은 적이 있는데 실업, 가정 과목의 기능.태도 분야였다.

당시 성적표에는 학생의 성격이나 품성을 평가하는 행동발달 상황을 기록했다. 자주성.근로성.정의감.책임감.인내력.창조성.협동성.준법성.예의범절.지도력 등 모두 10개의 평가 항목에서 반 총장은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모두 최상의 평점을 받았다.

교사들의 종합 평가를 보자.

▶ 학급의 제1인자로서 손색이 없는 모범생(1학년)

▶ 두루 손색이 없는 모범생(2학년)

▶ 책임감이 강하고 인내성이 강하고 품행이 방정함(3학년)


고등학교에서 했던 지능검사 결과는 ‘134.상’’이라고 적혀 있다. 취미.특기란에는 독서, 장래 희망란에는 외교관이라고 쓰여 있다. 중학교 때 특별 활동으로 야구를 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주산(珠算)을 했다는 부분이 눈에 띈다. 고등학교 2~3학년 때는 모두 과외활동으로 영어회화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반 총장의 가정환경란을 보면 생활수준, 문화 수준은 모두 ‘중(中)’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의 어린 시절 친구들 말에 따르면 그 시절에 가정형편이 ‘중’이라고 하는 것은 중상(中上)이라기보다는 중하(中下), 혹은 밥은 굶지 않는다는 정도의 의미였다.

 

- <조용한 열정, 반기문>책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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