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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출처 -불국사의 유명한 문화 3가지 .

서용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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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문화재>
불국사다보탑(국보 제20호)




불국사다보탑 (佛國寺多寶塔)

경북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불국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 석탑.

국보 제20호.

높이 10.4 m, 기단 폭 4.4 m.

불국사 대웅전 앞 서쪽의 석가탑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는 탑으로, 전형적인 쌍탑가람의 배치이다.

기단부에는 사방에 보계(寶階)를 마련하였고, 보계에는 난간을 가설하였던 석주가 남아 있다.

그 위에는 네 모퉁이와 중앙에 사각 석주(石柱)를 세우고 교차되는 받침을 얹어 갑석(甲石)을 받고 있다.

또 이 기단에는 원래 네 모퉁이에 돌사자를 배치하였으나, 지금은 1구만 남아 있다.

갑석 위에는 사각형 난간 속에 8각 신부(身部)를 두었으며, 다시 8각 갑석을 덮고 8각 난간을 돌린 다음, 그 안에 8개의 죽절형(竹節形) 석주를 돌려 8 각 연화석(蓮花石)을 받치고 있다.

연화석 위에는 8개의 주두(柱頭) 모양의 받침으로 옥개석(屋蓋石)을 받고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8각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가 거의 완전하다.

한국의 석탑 중 일반형을 따르지 않고 특이한 형태를 가진 예로, 이만큼 기발한 의장(意匠)으로 이루어진 걸작 은 그 유례가 없다.

건립연대는 서쪽의 석가탑과 마찬가지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김대성(金大城)이 중창한 당시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불국사연화교칠보교(국보 제22호)




불국사연화교칠보교 (佛國寺蓮華橋七寶橋)

경북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불국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 석교.

국보 제22호.

연화교 높이 2.31 m, 너비 1.48 m.

칠보교 높이 4.06 m, 너비 1.6 m.

불국사 앞, 대석단(大石壇) 동쪽의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 맞은편 서쪽에 있다.

가구수법(架構手法)은 동쪽의 청운교·백운교와 거의 비슷하다.

밑에 있는 연화교 는 10단의 층계에 계단식 등형(登)을 만들어 양분하였고, 양쪽 끝의 등형에는 난간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있으 나 지금은 석주(石柱)만 남아 있다.

다리 아래는 호형(弧形)으로 가공한 석재를 사용하여 궁륭형(穹形) 통로를 만들었으며, 이 석계(石階)에서 특이한 것은 각 계층에 미려한 연판(蓮瓣)이 양각되어 있는 점이다.

칠보교는 8 단의 보계(寶階)로 이루어졌고 한 장의 장석(長石)으로 된 등형으로 양분된 점은 연화교와 다르나, 석주가 남 아 있어 석난(石欄) 설치의 흔적을 남긴 점은 같은 형식이다.

다만 규모가 작아진 관계로 다리 아래 통로를 설 치하지 않았으며, 보계에 특별한 조식(彫飾)도 없다.

칠보교를 올라서면 안양문(安養門)을 지나 극락전을 대하 게 되는데, 이 석계는 동석계(東石階)의 장엄함에 비해 우미수려하여 조화와 변화를 주고 있다.

이 석계 또한 동석계와 마찬가지로 경덕왕(景德王) 때 김대성(金大城) 중창 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다.

 

석굴암석굴(국보 제24호)




석굴암석굴 (石窟庵石窟)

신라 때 오악(五岳)의 하나인 토함산(吐含山)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찰(石窟寺刹).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 석굴.

국보 제24호.

경북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 소재.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유래와 설화】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 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설화를 기반으로 한 요소가 엿보이는 전설적인 유래이지만, 대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환생(還生)하였다는 김대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듯이 경덕왕대에 중시(中侍)로 있었던 김문량이 실존인물임에 비추어, 그의 아들인 김대정(金大正)이 신라의 기명(記名) 방식에 의해 대성과 동일인물인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따라서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토함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전개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김씨 왕족(金氏王族)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마지막 생애를 다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여 그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 점은 분명히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성이라는 개인의 원력(願力)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대 불사(佛事)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특히 석굴암의 방위(方位)가 김씨 왕족의 공동묘역(共同墓域)인 신라의 동해구(東海口)와 일치하고 있음을 보아도 더욱 뚜렷해진다. 동해구란, 삼국통일의 영주(英主)인 문무왕(文武王)의 해중릉(海中陵), 즉 대왕암(大王巖)이 자리잡고 있는 곳을 말한다.

문무왕은 욕진왜병(欲鎭倭兵)하고자 동해의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이승에서 까지 국가수호의 집념을 잃지 않겠다는 군왕이었다.

이같은 호국사상은 동해구의 유적인 해중릉을 비롯하여 감은사(感恩寺)나 이견대(利見臺), 그리고 석굴암과 동해구와의 관계 등에서 같은 맥락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 점은 석굴암의 창건주인 경덕왕의 선왕(先王), 즉 효성왕(孝成王) 역시 화장 후 산골(散骨)된 곳이 이 동해구 여서, 석굴암 대불의 시각(視角)이 동남동 방향으로 동해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성이 있다.

그것은 곧 신라인의 믿음과 호국정신의 요람으로서 국찰(國刹)도 같았던 석굴암의 존재를 뚜렷이 부각시켜 주는 예라고 하겠다.

이로써 석굴암이 지니고 있는 신앙적인 측면은 물론, 조형적인 면까지 신라미술의 최고 절정을 이룬 민족 최대의 석조미술품으로 꼽아 결코 손색이 없는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구조와 특징】 석굴암의 구조적 특색은 무엇보다 화강암(花崗岩)의 자연석을 다듬어 인공적으로 축조한 석굴사찰이라는 점이다.

즉, 인도·중국 등의 경우와 같이 천연의 암벽을 뚫고 조성한 천연석굴이 아니다.

이같 은 토목기술을 바탕으로 이룩된 석굴의 기본적인 평면구조는 전방후원(前方後圓)의 형태를 취하면서 네모진 공간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로 나뉘어져 있다. 주실에는 단독의 원각(圓刻) 본존상(本尊像)을 비롯 하여 보살과 제자상 등이 있으며, 전실에는 인왕상(仁王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을 부조(浮彫)하여 배치하 였다.

이 전실의 기능은 곧 예배와 공양을 위한 장소이다.

천장은 궁륭형(穹形)의 둥근 양식이며, 그 위에 연화 문(蓮花紋)의 원판을 두어 천개(天蓋)로 삼고 있다. 조각상의 배치는 전실부터 시작하여 팔부신중(八部神衆) 8 구, 인왕(仁王) 2구, 사천왕 4구, 천부(天部) 2구, 보살(菩薩) 3구, 나한(羅漢) 10구, 감불(龕佛) 8구와 본존여래 좌상 1구가 있다.

이들 불상의 배치에 있어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보다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대 조형미술의 기본원칙과 같은 것이기도 하여서 석굴의 안정감을 일층 강조하는 구실도 하고 있다.

조각상 가운데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본존여래좌상이다.

이 석굴 자체가 본존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조영되었던 만큼 그 의미가 매우 큰 불상이다.

예배의 주대상이 곧 이 본존상임은 물론, 중앙에 자리잡아 석굴 의 내부공간을 구획한 신라 조각미술의 결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뛰어난 작품이다.

본존상은 연화문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다.

광배(光背)는 석굴 후벽의 천장 밀에 둥근 연화판석(蓮花瓣石) 1매로 조성하였다.

이는 전실의 법당에서 본존상에 예배할 때, 동일시각 위에 놓여지는 치밀한 계산에 따라 처음부터 마련된 것이다.

본존상의 양식적 특징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7세기 후반부터 유행하여 고려 전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여래좌상의 기본양식이다.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 왼쪽 어깨에 가사 (袈裟)를 걸친 우견편단(右肩遍袒) 양식을 보이고 있다.

또한 수인(手印)은 악마의 유혹을 물리친다는 항마촉 지인(降魔觸地印)을 결(結)하고 있다. 머리 위에는 육계(肉)를 표시했으며 머리는 나발(螺髮)이다. 상호(相好)는 원만한 모습에 자비(慈悲)를 지니고 있다.

신부(身部)는 매우 당당할 정도의 거구로서 장부의 상을 보이고 있 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두 번째 손가락을 다음 손가락 위에 겹쳐 운동감을 주고 있다.

왼손은 두 발 위에 놓아 편안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어떻든 본존상의 신앙적인 의미와 조형적인 가치가 훌륭히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부드러운 자태와 인자한 표정에서 고도의 조각술을 살필 수 있는데, 이 는 궁극적으로 불교의 구원상(久遠像)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불상의 명호(名號)】 석굴암 본존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명호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그것은 석가 여래로 통칭되어 왔으나 이는 뚜렷한 오류임이 구명되었다.

즉,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 (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 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 이다.

이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 이다.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우견편단과 항마촉지인은 곧 아미타불이었다는 점도, 본존상의 명호를 밝히 는 데 중요한 뒷받침이 된다.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안치된 본존상이나 군 위(軍威) 팔공산(八公山)의 석존 본존상 등 같은 양식의 불상에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신라 불 상의 양식계보로 비추어 볼 때 석굴암 본존불상의 명호는 7∼8세기 신라에서 유행했던 아미타불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창건 유래 역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표현한 것으로, 동해구의 유적과도 연관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 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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