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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출처 - 정읍의 중요문화재

서용칠

view : 1888

1.은선리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16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43


시 대 고려시대


 

 정읍 은선리 마을에 세워져 있는 3층 석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일찌기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기단은 낮은 1단으로,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같은 양식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여러 장의 돌로 이루어졌다. 1층의 몸돌은 대단히 높아 기형적인 인상을 주고, 각 면 모서리에는 희미하게 기둥모양을 본떠 새겨놓았다. 2층 몸돌은 높이와 너비가 급격히 줄었으며, 남쪽면에 2매의 문짝이 달려 있는데, 이는 감실(불상을 모시는 방)을 설치한 것으로 짐작된다. 보통은 벽면에 본떠 새기기만 하는데 이렇듯 양측에 문짝을 단 유래는 매우 희귀하다. 3층 몸돌은 더욱 줄어들고 다른 꾸밈은 없다. 지붕돌은 평평한 돌을 얹어 간결하게 구성하였다. 꼭대기에는 또 하나의 평평한 돌이 놓여 있으나 이것이 탑의 머리장식의 일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탑으로 추측된다. 기단과 지붕돌에서 백제 석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 고려시대에도 옛 백제 땅에서는 백제양식의 석탑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층 몸돌이 지나치게 높아진 데다가 기단·몸돌이 모두 너비가 좁아서, 높을 뿐 아니라 안정감도 줄어들어 우수작이라 볼 수는 없지만, 일부 특이한 양식을 지녔고 백제양식의 탑이 전파된 경로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2.피향정

 

종 목 보물 제28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101-2∼6


시 대 조선시대


 

 자연을 벗삼아 쉼터로 사용하고자 지은 피향정은 호남지방에서 으뜸가는 정자 건축이다.

 

통일신라 헌안왕(재위 857∼861) 때 최치원이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지은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 광해군 때 현감 이지굉이 다시 짓고 현종 때 현감 박숭고가 건물을 넓혔으며, 지금 크기로는 숙종 42년(1716) 현감 유근이 넓혀 세웠다고 한다. 그 뒤에도 몇 차례 부분적으로 고쳤는데 단청은 1974년에 다시 칠한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는 새 부리가 빠져나온 것처럼 꾸민 형태로 간결한 구조를 하고 있다. 건물 4면이 모두 뚫려 있어 사방을 바라볼 수 있고 난간은 짧은 기둥을 조각하여 주변을 촘촘히 두르고 있다.

 

건물 안쪽 천장은 지붕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지만 천장 일부를 가리기 위해 건물 좌우 사이를 우물천장으로 꾸민 점이 눈길을 끈다. 또한 이 누정을 거쳐간 시인과 선비들의 시가를 기록한 현판이 걸려 있어 건물의 품격을 더하고 있다.

 

조선시대 대표가 되는 정자 중 하나로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3.천곡사지 칠층석탑

 

종 목 보물 제30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망제동 산10


시 대 고려시대


 

 속칭 전곡사지라고 일컫는 망제동의 서쪽 산기슭에 위치한 탑으로 낮은 단층기단 위에 7층탑신을 올린 방형 평면의 석탑이다.

 

이 석탑은 8매의 석재로 구성된 지대석 위에 1매의 판석형 석재로 조성한 낮은 단층기단을 놓았다. 기단은 거칠게 다듬었으며, 측면에는 아무런 조식도 없다. 측면 상단에는 갑석형의 굽을 돌렸는데, 상면은 약간 경사지게 다듬은 후 중앙에 낮은 받침을 조출해 탑신을 받고 있다. 이와같은 기단구조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로 운주사석탑군에서 볼 수 있어 고려시대에 시작된 기단의 한 유형임을 알 수 있다.

 

탑신부는 초층탑신으로부터 3층탑신까지를 제외한 나머지 탑신과 모든 옥개석이 각각 한 돌로 조성되었다. 초층탑신은 유난히 세장하고 방주같은 4매석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면에는 우주의 표현이 없다. 그 위의 2·3층탑신석은 각각 2매의 석재로 조성되었다. 매 층 각 면에는 양 우주가 각출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초층탑신이 유난히 높게 조성되었고, 2층 이상은 체감률이 적은 탓에 석탑 자체가 고준해졌다. 옥개석은 초층부터 7층까지 같은 형태로 조성되었는데, 너비가 좁고 두꺼워서 둔중한 느낌을 준다. 옥개석 상면은 평박하여 낙수면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나, 합각부의 선은 에리하게 조성됐다. 정상에는 각형 1단의 받침을 조출해 상층의 탑신석을 받고 있는데, 7층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양식을 보이고 있다. 각 층 옥개석의 하면에는 수평으로 전개된 추녀에 얕은 낙수홈이 모각되고 받침부에는 연화문이 조각되었다. 연화문은 모두 양련으로 추녀부의 측면부터 탑신에 맞닿은 안쪽 면까지 가득히 조각한 까닭에 자연스레 그 문양이 세장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1변에 4판씩 모두 16판의 양련이 조식되었는데, 판 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러한 연화문장식은 전각부에 미세한 반전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옥개석의 폭이 좁아지는 느낌을 주어 전체적으로는 석탑이 더욱 세장하면서도 고준해보이는 효과를 주고 있다. 이처럼 옥개석의 하면에 연화문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남원 실상사 백장암삼층석탑에서 볼 수 있는데, 고려시대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은 아니다. 상륜부재는 모두 없어지고 7층옥개석 위에 노반석 하나만 놓여 있을 뿐이다.

 

이 석탑은 옥개석의 양식이 특이하여 이형석탑으로 분류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석재결구가 매우 간략화 되고, 연화문의 조각 또한 치졸함을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안정감이 결여된 세장 · 고준함 등으로 보아 고려 중엽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4.무성서원

 

종 목 사적 제166호


지 정 일 1968.12.19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시 대 조선시대


 

신라후기의 학자였던 최치원(857∼?)과 조선 중종(재위 1506∼1544)때 관리였던 신잠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서원으로, 교육기능과 제사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다.

 

원래는 태산서원이라 하던 것을 숙종 22년(1696)에 임금으로 부터 이름을 받아 무성서원이라 하게 되었다. 앞에는 공부하는 공간을 두고, 뒤에는 제사 지내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사당, 현가루, 동·서재, 비각, 명륜당 등이 있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로 성종 15년(1484)에 세웠고, 문루인 현가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2칸·옆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이곳에는 성종 17년(1486) 이후의 봉심안, 강안, 심원록, 원규 등의 귀중한 서원자료가 보존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남아있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5.전봉준선생 고택지

 

종 목 사적 제293호


지 정 일 1981.11.28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458-1


시 대 조선시대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1855-1895)이 살던 집이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전봉준은 조선 고종 27년(1890)인 30세 때 동학에 몸을 담아, 동학 제2대 교주인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되었다. 그는 관리들의 횡포에 맞서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조직해 동학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옛집은 조선 고종 15년(1878)에 세워졌다. 앞면 4칸·옆면 1칸의 초가집으로 안채가 구성된 남향집이다. 동쪽부터 부엌·큰방·웃방·끝방 순서의 일(一)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남부지역 민가 구조와는 다른 방향으로 되어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6.황토현 전적지

 

종 목 사적 제295호 


지 정 일 1981.12.10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2


시 대 조선시대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이 관군을 크게 물리친 격전지이다.

 

동학농민군은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항하여 일어나, 다음 해인 1894년 1월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농민군은 10여 일 만에 해산하였으나, 정부에서 사태 해결을 위해 파견된 관리가 잘못을 농민군에게 돌려 탄압하자, 이에 농민군은 전봉준의 지휘 아래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내세우고 다시 일어나게 된다. 고부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주변의 곡창지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백산으로 진출하였고, 이 소식을 접한 전주감사는 관군을 보내 이를 막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관군과 농민군은 정읍의 황토현에서 대치하게 되었는데, 밤을 이용한 기습공격으로 농민군은 관군을 크게 물리치게 되었다.

 

황토현전투의 승리로 인해 기세가 높아진 농민군은 정읍, 흥덕, 고창, 무장을 비롯한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나아가 전주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죄없이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고 무기도 탈취했으며, 무장으로 진격하여 교도 40여 명을 구출하였다. 이곳에서 전봉준은 동학운동의 의의를 나타내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황토현 싸움에서의 승리는 동학농민운동을 크게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하여 동학농민운동의 막이 내려지지만, 이 운동에서 보여준 개혁정신과 민족자주정신은 민족독립운동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7.김동수씨 가옥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26호


지 정 일 1971.05.26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 814


시 대 조선시대


 

김동수의 6대 할아버지인 김명관이 조선 정조 8년(1784)에 세운 집이다. 뒷쪽으로 창하산이 있고 앞쪽에는 동진강 상류가 흐르는 지역에 자리잡고 있어 풍수지리에서 명당이라 말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다.

 

건물들은 행랑채·사랑채·안행랑채·안채·별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마당과 바깥행랑채가 있고 바깥행랑의 동남쪽에 있는 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문간채가 있다. 사랑채 서쪽으로 ㄷ자형의 안행랑채를 배치하였는데 그 앞쪽으로 ㄷ자 평면을 가진 안채가 있다. 안채는 좌우 대칭을 이루게 지어 좌우 돌출된 부분에 부엌을 배치하고 있는 특이한 평면을 갖추고 있다. 안채의 서남쪽에 있는 안사랑채는 김명관이 본채를 지을 때 일꾼들이 기거했던 곳이라고 한다.

 

소박한 구조와 건축가의 독창성, 조선 기 사대부 가옥의 중후한 모습을 대체로 원형대로 잘 유지하고 있어 건축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좋은 연구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8.태인동헌

 

종 목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75호


지 정 일 1976.04.02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351-9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태인현에 있던 관아 건물이다. 동헌은 현감의 사택인 내동헌과 공무를 집행하던 외동헌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보통 동헌이라 하면 외동헌을 말한다. 현재의 태인동헌은 중종(재위 1506∼1544) 때 건립되었고, 순조 16년(1816)에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앞면 6칸·옆면 4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내부의 공간이 매우 다양한데, 오른쪽이 대청마루이고 왼쪽이 온돌방으로 되어 있으며 앞뒤로 퇴칸이 있다. 뒤쪽 퇴칸은 오른쪽 2칸을 대청보다 높은 마루로 꾸미고 나머지는 흙바닥으로 처리하였다. 이것은 동헌의 다양한 기능을 한 건물안에 모두 넣은 것으로 공간구성이 돋보인다.

 

이 동헌을 지은 사람은 1,000냥만으로 동헌을 지으려는 현감을 꾀어 3,000냥에 짓도록 하고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였다고 전한다.

 

태인동헌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동헌건물 중에서 규모가 큰 편은 아니지만,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건물이다.

 

 

 

 


9.태인향교 만화루

 

종 목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21호


지 정 일 1986.09.08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182-1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세종 3년(1421)에 지어진 태인향교는 중종 5년(1510)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었다.

 

태인향교 만화루는 지어진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만화루’란 말은 ‘공자지도 만물화생’에서 따온 것이라 하며, 현판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조항진이 쓴 것이다.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특히 이곳은 기단의 중앙 부분을 끊어 넓은 계단을 설치한 점과 앞면을 짝수칸으로 해서 출입문을 2곳으로 나누어 배치한 점은 다른 건물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점이다.

 

 

 

 


10.군자정

 

종 목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33호


지 정 일 1990.06.30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65


시 대 조선시대


 

고부리 지방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정자로 예로부터 고부마을의 운세와 얽혀있는 설화가 전해오는 연정이다. 연못의 가운데에 위치하여 4면이 연꽃으로 둘러싸여 있어 연정이라 하였다 한다. 여기에서 연은 ‘연화지군자자야’에서 연유된 것으로 추정되며, 연정이란 이름이 군자정으로 바뀌게 된 이유는 알 수 없다. 영조 40년(1764)에 이세형이 수리하고, 1900년에는 조규희가 연못을 파내고 고쳤으며, 1901년에 다시 짓기 시작해서 1905년에 완성하였다.

 

이곳에 전해오는 설화에 의하면 조선 중기 이후 고부마을에 인재가 나지 않아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도 없고, 군수들이 온지 1년도 안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것은 연정이 황폐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어서 현종 14년(1673)에 이후선이 연못을 파고 정자를 수리하였는데 그 후로 인재가 나왔다는 설이 있다. 이 밖에 향교의 위치가 관아보다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운이 막힌다는 전설이 있어서 영조 41년(1765)에 동헌을 지금의 고부초등학교로 옮겼다고 한다.

 

 

 


 


11.두승산성

 

종 목 전라북도기념물 제54호


지 정 일 1981.04.01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고부면 입석리 산21


시 대 삼국시대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해발 443m의 두승산 산봉우리를 에워 싼 산성으로, 성 안에 골짜기를 품고 있다. 승고산성 또는 영주산성이라고도 한다.

 

9개의 봉우리를 이룬 천연의 절벽을 이용하여 쌓은 성벽은 둘레가 500m가 넘으며, 성 안에는 서쪽과 남쪽의 두 골짜기가 있다. 현재 성의 대부분이 무너져 내렸으나, 옛날 모습이 약간 남아있으며, 골짜기를 품고 있는 서쪽과 남쪽에는 문터가 남아 있다.

 

성이 지어진 연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성 안에서 발견되는 유물들로 보아 삼국시대 백제가 쌓아서 계속 사용해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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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정읍의 중요 문화재를 알려주세요(많을수록좋음)

 

 

 



의안백이화개국공신록권

종    목 국보  제232호
명     칭 의안백이화개국공신록권(義安伯李和開國功臣錄券)
분     류 기록유산 / 문서류/ 국왕문서/ 교령류
수량/면적 1축
지 정 일 1986.10.15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이종섭
관 리 자 이종섭
일반설명 | 전문설명
공신록권은 나라에 공이 있는 인물에게 공신으로 임명하는 증서로, 개국공신록권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한 신하들에게 내린 것이다. 이 문서는 조선 태조 1년(1392)에 조선개국에 공을 세운 이화에게 내린 녹권이다. 이성계의 아버지 환조(桓祖)는 서자 2명이 있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바로 이화이다.,

크기를 보면 세로 35.3㎝의 닥나무종이 9장을 붙여 전체 길이가 604.9㎝에 이르며, 본문 앞 여백의 바깥쪽을 장식하고 보호하기 위해 33㎝의 명주와 안쪽을 보강한 명주는 부식되어 없어진 두루마리이다.,

내용을 보면 녹권을 받는 사람의 성명에 이어 공신들의 공신사례, 공신 및 그 부모, 처자 등에 대한 표상과 특전이 묵서로 기록되어 있다. 녹권의 첫머리와 접지 부분에 ‘이조지인’이라고 도장을 찍었다.

이 문서는 이화의 후손이 없어 그의 이복형인 이원계의 가문에 의해 보관되어 오고 있다. 조선왕조에서는 처음으로 발급된 녹권이며, 개국공신록권으로는 최초로 발견된 것으로, 조선 태조의 건국이유와 그 주역들의 공적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정읍은선리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167호
명     칭 정읍은선리삼층석탑(井邑隱仙里三層石塔)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43
시     대 고려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정읍시
일반설명 | 전문설명
정읍 은선리 마을에 세워져 있는 3층 석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일찌기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기단(基壇)은 낮은 1단으로,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같은 양식이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여러 장의 돌로 이루어졌다. 1층의 몸돌은 대단히 높아 기형적인 인상을 주고, 각 면 모서리에는 희미하게 기둥모양을 본떠 새겨놓았다. 2층 몸돌은 높이와 너비가 급격히 줄었으며, 남쪽면에 2매의 문짝이 달려 있는데, 이는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설치한 것으로 짐작된다. 보통은 벽면에 본떠 새기기만 하는데 이렇듯 양측에 문짝을 단 유래는 매우 희귀하다. 3층 몸돌은 더욱 줄어들고 다른 꾸밈은 없다. 지붕돌은 평평한 돌을 얹어 간결하게 구성하였다. 꼭대기에는 또 하나의 평평한 돌이 놓여 있으나 이것이 탑의 머리장식의 일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탑으로 추측된다. 기단과 지붕돌에서 백제 석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 고려시대에도 옛 백제 땅에서는 백제양식의 석탑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층 몸돌이 지나치게 높아진 데다가 기단·몸돌이 모두 너비가 좁아서, 높을 뿐 아니라 안정감도 줄어들어 우수작이라 볼 수는 없지만, 일부 특이한 양식을 지녔고 백제양식의 탑이 전파된 경로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피향정

종    목 보물  제289호
명     칭 피향정(披香亭)
분     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수량/면적 1동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101-2∼6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정읍시
일반설명 | 전문설명
자연을 벗삼아 쉼터로 사용하고자 지은 피향정은 호남지방에서 으뜸가는 정자 건축이다.,

통일신라 헌안왕(재위 857∼861) 때 최치원이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지은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 광해군 때 현감 이지굉이 다시 짓고 현종 때 현감 박숭고가 건물을 넓혔으며, 지금 크기로는 숙종 42년(1716) 현감 유근(柳近)이 넓혀 세웠다고 한다. 그 뒤에도 몇 차례 부분적으로 고쳤는데 단청은 1974년에 다시 칠한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는 새 부리가 빠져나온 것처럼 꾸민 형태로 간결한 구조를 하고 있다. 건물 4면이 모두 뚫려 있어 사방을 바라볼 수 있고 난간은 짧은 기둥을 조각하여 주변을 촘촘히 두르고 있다.

건물 안쪽 천장은 지붕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지만 천장 일부를 가리기 위해 건물 좌우 사이를 우물천장으로 꾸민 점이 눈길을 끈다. 또한 이 누정을 거쳐간 시인과 선비들의 시가(詩歌)를 기록한 현판이 걸려 있어 건물의 품격을 더하고 있다.

조선시대 대표가 되는 정자 중 하나로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천곡사지칠층석탑

종    목 보물  제309호
명     칭 천곡사지칠층석탑(泉谷寺址七層石塔)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망제동 산10
시     대 고려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정읍시
일반설명 | 전문설명
속칭 전곡사지라고 일컫는 망제동의 서쪽 산기슭에 위치한 탑으로 낮은 단층기단 위에 7층탑신을 올린 방형 평면의 석탑이다.,

이 석탑은 8매의 석재로 구성된 지대석 위에 1매의 판석형 석재로 조성한 낮은 단층기단을 놓았다. 기단은 거칠게 다듬었으며, 측면에는 아무런 조식도 없다. 측면 상단에는 갑석형의 굽을 돌렸는데, 상면은 약간 경사지게 다듬은 후 중앙에 낮은 받침을 조출해 탑신을 받고 있다. 이와같은 기단구조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로 운주사석탑군에서 볼 수 있어 고려시대에 시작된 기단의 한 유형임을 알 수 있다.,

탑신부는 초층탑신으로부터 3층탑신까지를 제외한 나머지 탑신과 모든 옥개석이 각각 한 돌로 조성되었다. 초층탑신은 유난히 세장(細長)하고 방주(方柱)같은 4매석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면에는 우주의 표현이 없다. 그 위의 2·3층탑신석은 각각 2매의 석재로 조성되었다. 매 층 각 면에는 양 우주가 각출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초층탑신이 유난히 높게 조성되었고, 2층 이상은 체감률이 적은 탓에 석탑 자체가 고준(高峻)해졌다. 옥개석은 초층부터 7층까지 같은 형태로 조성되었는데, 너비가 좁고 두꺼워서 둔중한 느낌을 준다. 옥개석 상면은 평박하여 낙수면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나, 합각부의 선은 에리하게 조성됐다. 정상에는 각형 1단의 받침을 조출해 상층의 탑신석을 받고 있는데, 7층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양식을 보이고 있다. 각 층 옥개석의 하면에는 수평으로 전개된 추녀에 얕은 낙수홈이 모각되고 받침부에는 연화문이 조각되었다. 연화문은 모두 양련으로 추녀부의 측면부터 탑신에 맞닿은 안쪽 면까지 가득히 조각한 까닭에 자연스레 그 문양이 세장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1변에 4판씩 모두 16판의 양련이 조식되었는데, 판 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러한 연화문장식은 전각부에 미세한 반전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옥개석의 폭이 좁아지는 느낌을 주어 전체적으로는 석탑이 더욱 세장하면서도 고준해보이는 효과를 주고 있다. 이처럼 옥개석의 하면에 연화문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남원 실상사 백장암삼층석탑에서 볼 수 있는데, 고려시대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은 아니다. 상륜부재는 모두 없어지고 7층옥개석 위에 노반석 하나만 놓여 있을 뿐이다.

이 석탑은 옥개석의 양식이 특이하여 이형석탑(異形石塔)으로 분류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석재결구가 매우 간략화 되고, 연화문의 조각 또한 치졸함을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안정감이 결여된 세장 · 고준함 등으로 보아 고려 중엽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회련공신록권

종    목 보물  제437호
명     칭 김회련공신록권(金懷鍊功臣錄券)
분     류 기록유산 / 문서류/ 국왕문서/ 교령류
수량/면적 1축
지 정 일 1966.02.28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도강김씨종중
관 리 자 도강김씨종중
일반설명 | 전문설명
공신록권은 나라에 공이 있는 인물에게 공신으로 임명하는 증서로, 개국공신록권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한 신하들에게 내린 것이다. 개국원종공신 제도는 조선시대에 개국공신을 늘리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새로운 포상제도로, 1392년부터 1397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1,400여 명에게 봉해졌다.,

김회련은 도강 김씨이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창업을 도와 개국원종공신이 되었다. 그 후 홍주(현재의 홍성), 공주, 해주목사를 거쳐 한성판윤에 이르렀으며,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민이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창업하는데 공로가 있는 신하들에게 1392년 9월에 1 ·2 ·3등으로 나누어 개국공신에 임명하였고, 그 후에도 공신에 준하는 신하를 선발하여 개국공신으로 추가하여 임명하였다. 이 공신록권은 태조 4년(1395) 윤 9월에 김회련에게 임명한 「원종공신록권(原從功臣錄券)」으로 길이 9.25m, 폭 3.03m의 긴 종이에 기록된 원본이다. 그 내용을 보면 태조 원년(1392) 10월부터 태조 4년(1395)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임명된 공신들의 선정경위가 열거되어 있으며, 특히 공신의 직명단자가 여기서만 기록되어 있다.

이 녹권을 통해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참여한 세력들을 파악할 수 있으며, 공신록권을 발행한 공신도감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태조4년및6년왕지

종    목 보물  제438호
명     칭 이태조4년및6년왕지(李太祖四年및六年王旨)
분     류 기록유산 / 문서류/ 국왕문서/ 교령류
수량/면적 2매
지 정 일 1966.02.28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도강김씨종중
관 리 자 도강김씨종중
일반설명 | 전문설명
이 왕지는 사령서(辭令書)로 뒤에 교지라 일컫던 것이다. 태조 4년(1395)의 왕지는 공주목사 겸 관내권농방어사를 제수한 것이며, 행서체로 쓰여있다. 태조 6년(1397)의 왕지는 해주목사 겸 권농병마단련사 염장관을 제수한 것으로 초서체로 쓰여있다. 보인(왕의 도장)은 ‘조선지보(朝鮮之寶)’이다. 이들 왕지는 희귀한 고문서 자료들이며 공신록권과 함께 연시각(延諡閣)에 보존되어 있다.,


정읍보화리석불입상

종    목 보물  제914호
명     칭 정읍보화리석불입상(井邑普化里石佛立像)
분     류 유물 / 불교조각/ 석조/ 불상
수량/면적 2구
지 정 일 1987.03.09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소성면 보화리 110-6
시     대 백제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정읍시
일반설명 | 전문설명
전라북도 정주시 소성면 보화리의 야산 중턱에 나란히 서 있는 2구의 석불입상이다. 최근 백제시대의 불상으로 확인되었는데, 백제 불상의 예를 정읍까지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두 불상은 모두 비슷한 형식과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지만, 오른쪽 불상이 왼쪽 불상보다 약간 커서 원래는 삼존불(三尊佛)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오른쪽의 큰 불상은 뒤편의 광배(光背)가 깨지고 대좌(臺座)의 아랫부분을 잃어버린 것 외에는 완전한 모습이며, 두 눈이 파여진 것이 흠이다.,

민머리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솟아 있는데, 백제시대의 불상인 군수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29호)과 흡사하다. 얼굴 역시 길고 풍만하며 부드러워 백제불상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불상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옷차림새인데, 왼쪽 어깨에만 걸쳐져 있는 옷을 입고 있으며 속에 입은 옷과 아래의 치마도 보인다. 옷주름들은 부드러우면서도 소박한 편으로 어깨나 손, 발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오른팔이 없어진 작은 불상도 같은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얼굴의 각 부분은 마모가 심하나 입가로부터 양쪽 볼에까지 미소를 짓고 있어 어린 아이와 같은 느낌이 든다.

부드럽고 우아한 모습, 아기같은 체구, 특징있는 옷 차림새 등에서 백제 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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