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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움출처 - 선과 언어

서용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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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문무고(宗門武庫)>에 보면 간화선의 제창자 대혜종고의 스승인 원오극근 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계기를 묘사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 일화를 통하여 선의 깨달음에서 화두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살펴보자.

원오극근의 스승인 오조법연은 어느 날 진제형이라는 거사에게 말했다. “제형은 어린 시절에 ‘소염시(小艶詩)’를 읽어본 적이 있소? 그 시 가운데 다음 두 구절은 제법 우리 불법(佛法)과 가까운 데가 있습니다. “소옥아! 소옥아! 자주 부르지만 볼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낭군이 목소리 알아듣기를 바랄 따름이다.” 진제형은 연신 “네!” “네!” 하였고 법연은 자세히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때마침 원오가 밖에서 돌아와 물었다. “스님께서 ‘소염시’를 인용하여 말씀하시는데 진제형 거사가 그 말을 알아들었습니까?” “그는 소리만 알아들었을 뿐이다.” “낭군이 목소리 알아듣기를 바랄 뿐이라면, 그가 이미 그 소리를 알아들었는데 어찌하여 옳지 않습니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 뜰 앞의 잣나무니라. 악!” 원오는 이 말에 문득 느낀 바가 있었다. 방문을 나서니 닭이 홰에 날아올라 날개를 치며 우는 모습이 보였다. 이에 다시 혼자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소리가 아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법연을 찾아가 인가를 받았다.

‘소염시’는 당나라 현종이 총애했던 양귀비를 소재로 한 시다. 낭군의 정이 그립지만 낭군을 바로 불러올 형편은 아니기 때문에 일 없는 몸종 소옥이를 부름으로써 낭군에게 자기 목소리를 들려주어 자신의 심정을 알아채도록 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이다.

여기서 법연이 잘 살펴보라고 하는 부분은, ‘소옥아! 소옥아!’ 하고 부를 때 낭군이 알아듣는 것은 ‘소옥’이라는 의미관념이 아니라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즉 말을 듣고서 그 말의 의미관념을 따라가지 않고, 현상으로서의 그 말이 생겨나는 근원을 파악함이 곧 불법(佛法)이라는 것이 법연의 가르침이다. 법연의 이 말을 듣고 원오는 무언가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서 ‘소리를 알아들었으면 된 것이 아니냐’고 물은 것이고, 법연은 원오가 견성하는 길을 찾았다고 보고서 즉각 ‘뜰앞의 잣나무’라는 공안을 제시하여 이것도 같은 것임을 알려준 것이다.

여기서 원오는 공안을 타파하고 견성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은 실로 위대한 줄탁동시의 한 장면이다. 원오는, ‘소옥아! 소옥아!’하는 말이나 ‘뜰앞의 잣나무’하는 말이나 ‘악!’하는 외침이나 ‘꼬끼요!’하는 닭의 울음 등에서 동일한 그 무엇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즉 만법(萬法)에 공통되는 그 무엇, 만법이 귀일하는 그 하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를 선불교에서는 마음[心] 혹은 자성(自性)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체험을 두고 ‘자성을 본다[見性]’고 말하는 것이다. 언어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들은 제각기 다르다. ‘소옥아! 소옥아!’는 부르는 말이고, ‘뜰 앞의 잣나무’는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말로서, 이 둘은 소리이면서 동시에 의미를 가진 언어이다.

그러나 고함소리인 ‘악!’과 닭의 울음소리인 ‘꼬끼요!’는 의미를 가진 언어라기 보다는 단순한 소리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의미가 아니라, 바로 ‘소리’임을 알 수가 있다. ‘소리’란 무엇인가? ‘소리’는 의미를 담을 수도 있고 담지 않을 수도 있는, 의미 이전의 것이다.

즉 소리는 의미로 형상화되기 이전의 자성의 움직임인 것이다. 이 까닭에 원오가 말을 듣고 말이 아니라 소리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뜻을 이해했을 때, 법연은 화두와 할(喝)을 사용하여 원오의 모든 의심을 사라지게 했던 것이다. 이처럼 화두는 의미있는 말을 통하여 의미가 형성되기 이전의 자성의 움직임을 지시하는 직지(直指)의 방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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