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교사단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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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우~포교사님!(명산 황영규)

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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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화팀 명산 황영규 포교사(7기)

 

      불기2558년7월에 만난 포교사

 

  밀리는 차들 때문에 저속도로(?)가 된 대동 요금소 입구에서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약속 시간보다 20분 정도 늦을 것 같습니다." 통도사 주차장으로 들어서는데 유리창을 내리고 운전석에 앉아 있는 명산 포교사님을 발견했다. 미안한 생각에 시동도 켜둔 채 달려가 인사를 했다.

 

"내가 보낸 영가가 400명이니 패싸움을 해도 이기는데

한 밤중에 공동묘지를 간다고 해도 뭐가 무섭겠어요.

  해장보각 앞 나무 그늘 아래 바윗돌에 나란히 앉았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명산 포교사님이다. "오신 김에 서명이나 해주시죠." 뭔가하고 보니 달라이라마 존자 방한 추진을 위한 서명부이다. 세계에서 달라이라마 존자가 갈 수 없는 두 나라가 중국과 한국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니 왠지 씁쓸하다.

 

고향이 울산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이곳으로 오게된 사연이 무엇인지?

- 고향은 강원도 인제 원통 백담사 아래이고 청소년기는 홍천에서 보냈다. 명절 때 울산에 있던 친구가 룸싸롱의 지배인이라고 자랑을 해서 한번 놀러가겠다고 했더니 '오면은 양주는 있는대로 주겠다.'는 말을 믿고 갔는데 그 친구는 지배인이 아니고 뽀이(웨이터)를 하면서 낮에는 방위병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친구 덕분에 울산이란 곳에 정착을 하고 결혼도 하게 되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가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불교와 인연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나?

- 운문사 사리암에 다니던 집사람을 따라 가끔 사찰에 갈 기회가 있었지만 그저 주변의 경치나 절이 잘 생겼나하는 정도에 관심이 있었다. 책에서 보니 부처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다고 하는데 울산의 많은 절을 두고 하루종일 걸리는 먼 곳의 절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 불교 공부를 하게 되었고, 사는 곳에서 가까운 정토사에 불교대학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에서 포교사란 제도가 있다는 말을 듣고 떨어져도 공부가 될 것이니 한 번 해보자고 한 것이 불교와의 인연이고 포교사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다.

 

염불봉사팀을 선택하게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 포교사가 되고 어떤 분야에 봉사를 해볼까 고민했는데 군포교나 사찰 안내는 말 재주가 있어야 하는데 내성적인 내 성격에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 당시 울산에는 없던 염불팀을 직접 만들게 되었다. 처음 염불팀이 탄생했을 때는 6명의 포교사가 동참했는데 제대로 염불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영인스님의 염불을 들으면서 혼자 독학을 하게 되었다. 직업이 운전이라 차 안에서 염불을 들으면 마치 산 속에 있는 듯 좋았다. 지금은 연화팀과 무아팀에 27명의 포교사가 활동하는데 내가 울산 염불 포교의 시조인 셈이다.

 

염불봉사를 하면서 좋았던 것과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 정토사 신도 부모님상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12년동안 400여명의 영가를 위해 염불을 했다. 초창기에는 천수경을 달달 외워서 갔는데도 신묘장구대다라니에 들어가서 뱅글뱅글 돌기만 해서 중간에 뚝 잘라먹고 일쇄동방 결도량으로 넘어 간 적도 있었다. 어떤 상가에 연락을 받고 갔는데 이미 여기저기 사찰의 스님을 몇 분씩 초청해놓고 막상 염불팀에게는 짧게 해달라고 요청할 때 '뭐하러 불렀는지?'하는 생각에 속상하기도 했다. 좋았던 점은 돈이 없어 스님을 초청하지 못하는 상가에 가서 염불을 해 줄 때 가장 신이 나고 자부심도 느낀다.

 

불교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불교는 마음을 바꾸는 공부라고 생각한다. '물이 반 잔 밖에 안남았다.'를 '물이 반 잔이나 남았구나.'로 바꾸는 것이다. 원래 내가 후기 인상파라 다들 나를 보면 짜증을 낼 정도였다. 포교사가 되고서 무재칠시의 화안시를 실천하기 위해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서 웃는 연습을 했다. 다음으로 아파트 엘리베이터 타면 '안녕하세요 702호입니다.'라고 먼저 인사를 했다. 처음에는 멀뚱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지금은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내가 먼저 다가가니까 바뀌는 그런 것이 불교라 생각한다.

 

포교사 활동을 가족들이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편인지?

-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왜냐하면 내가 달라지면서 집안이 편안해지고 화목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독재자 히틀러였다. 아침에 출근을 할 때면 전 가족이 현관에 서서 '다녀오십시요.'라고 인사하고, 퇴근하면 하던 일을 멈추고 현관으로 나와 '다녀오셨습니까.' 인사를 해야 했다. 그동안 잘 못을 참회하기 위해 새벽에 아들이 자는 방을 향해 3배도 하고, 집사람 생일날 주머니에 돈이 없어 설겆이를 하는 집사람 뒤에 대고 108배를 하기도 했다.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 '당신은 내 사랑이야.'도 아내를 위한 작은 선물이다. '내일 죽을 것 처럼 살자.'를 생활 신조로 오늘이 마지막인 것 처럼 열심히 살고 있다.

 

염불봉사를 하면서 무섭다는 생각은 일어나지 않았는지?

- 마음의 변화를 보기 위해 정토사 뒷산 공동묘지에 밤12시에 일부러 가보기도 하고, 얼마전 보름달이 뜬 날에 손전등 없이 갔는데 쭈루룩하고 미끌어진 것 외에는 무섭다는 생각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시신을 직접 대해보고 싶어 장의사한테 부탁을 했더니 연락이 왔다. 3개월만에 발견된 자살한 시신인데 비닐 포장 걷어내자 혀를 빼물고 있는 모습과, 덧신을 신기는데 엄지 발톱이 빠지면서 피가 주루룩 흐르는 모습과, 팔을 당기는데 가죽이 훌렁 벗겨지는 바람에 세 번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냄새 또한 대단해서 이틀동안 밥을 먹어도 그냄새 반찬을 떠도 그 냄새로 고생을 좀 했었다. 무서움이 없는 이유중 하나는 귀신이 나타나도 내가 보낸 영가가 400명이니 패싸움을 붙어도 이긴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염불봉사를 하고 수고비를 받기도 하는가?

- 원칙적으로는 받지 않는다. 간혹 억지로 권하는 경우에는 조용히 받아서 봉투에 염불팀 일동이란 이름을 써서 다시 조의금 함에 넣어준다. 물론 같은 포교사 가족인 경우 장례를 마치고 수고비를 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감사히 받아 팀활동비로 소중하게 사용하고 있다.

 

 

지금 가수로도 활동중이라고 하던데?

- 상가에서 염불을 벽을 보고 할 때는 몰랐는데 사람을 앞에 두고 하니까 긴장되어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강단에 서게 될 지도 모르는데 대인공포증이 있으면 안되겠다 싶어 방편으로 노래를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아내를 위해 직접 작사 작곡한 '당신은 내사랑이야.'라는 곡으로 울산 수변공원에서 6년째 노래를 하고 있으며, 올해 5월 울산 고래 축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최근에 사고로 불이난 자동차에 갇힌 사람을 구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 작년 11월 19일 저녁 9시경 부산에서 염불봉사를 마치고 울산으로 귀가하는 도중 청량IC 근처에서 사고로 불이난 차량에 끼인 운전자를 팀원들과 구한 적이 있다. 덕분에 온산소방서장으로부터 3.5Kg짜리 소화기를 선물 받았는데 살면서 가장 무거운 선물이었다. 선물은 소화기로 끝난게 아니고 소방방재청장으로부터 석 돈짜리 금반지와 포상금 80만원도 받았다. 세금을 공제하고......

 

포교사단에 바라고 싶은 것이 있다면?

- 종단에서 포교사를 많이 배출했지만 마땅한 지원대책이 없다보니 포교활동도 미흡해질수 밖에 없다. 그기다 움직이면 돈이드니 포교사 2~3년 하면 회의를 느끼고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포교사는 이웃 종교로 치면 선교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데 그곳의 활동비 만큼은 아닌 적은 금액이라도 지원이 된다면 포교사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불기 2558(2014)년 7월 26일 통도사에서 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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