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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 대선사 열반 100주년 추모 다례

한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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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중흥조 경허 대선사 열반 100주년 추모 다례

 

 한국불교중흥조 경허선사 열반 100주년 다례 봉행위원회, 대한불교조계종 제 7교구본사 덕숭총림 수덕사가 주최하고 경허선사 열반100주년 기념사업회가 주관,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이 후원한 경허 대선사 열반 100주년 추모 다례가 불기2556년 6월14일 목요일 오후2시 조계사 대웅전에서 봉행되었다.

 

육법공양, 삼귀의례, 반야심경 봉독, 조계종 원로의원 월탄 대종사의 경허 선사 행장소개, 총무원장 자승 스님의 추도사, 종정 진제 대종사 법어, 종사영반, 문도대표 인사 등 순으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총무원장 자승스님, 교육원장 현응스님, 포교원장 지원스님과 보선스님등 많은 스님들과 1000여명의 사부대중이 참석했으며 특히 대한불교조계종 서울지역단 계영석 단장과 서울지역단의 100여명이 넘는 포교사와 대전충남지역단의 강종효 단장과 50여명의 포교사가 참석하여 봉사하였다. 

 

경허대선사는

 

1846년 8월 24일 전주 자동리에서 부친 송두옥과 모친 밀양박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신 한국불교 중흥조 경허선사께서는 속성은 송씨 이름은 동욱, 법명은 성우이며, 법호는 경허.

 

1854년 (모친 박씨를 따라 지금의 경기도 의왕시 청계사에서) 계허스님을 은사로 출가 사미계를 수지.

 

(1859년 14세 때 청계사에서 박선비가 경허선사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훗날 반드시 큰 그릇이 되어 일체중생의 스승이 되겠구나” 예언을 했다.

 

청계사를 떠나 동학사 강사 만화보선의 문화에서 경학을 수업하기 시작함.)

1860년부터 1868년까지 동학사 강원에서 내외전을 두루 섭렵 팔도에 이름을 떨쳤으며 선사께서는 불경뿐만 아니라 유가와 노장의 전적들까지도 완벽하게 꿰뚫으셨다.

 

1879년 6월 환속한 스승 계허를 만나기 위해 상경하던 중 천안근처에서 창궐한 콜레라로 죽어가는 중생들을 보고 “일체 세간이 모두 꿈속에서 바라보던 경치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동학사로 돌아와 강원을 폐지한 후 방문을 닫아걸고 “여사미거 마사도래”의 화두를 참구.

 

선사께서는 다리를 찌르고 머리를 부딪쳐서 수마를 쫓으며 필사적으로 정진했으나 은산 철벽에 부딪치셨으나 그해 11월15일 “우무비공처라는 말을 듣고 확철대오 .

 

1880년 지금 충남 서산시 고북면 천장암에 보림 후 오도송.

 

홀연히 고삐 뚫을 곳이 없다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

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나의 집이네

유월 연암사 아랫길에

일없는 들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1882년부터 1898년까지 선사께서는 충청도와 경상도 일대의 절인 동학사, 서산부석사, 마곡사, 장곡사, 보석사, 예천 용문사, 대전 묘각사, 사불산 대승사, 문경봉암사 등지에 주석하시며 선풍을 진작하셨으며 또한 수월, 침운, 혜월, 만공 등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지도를 하셨다.

 

1898년 충남 서산 부석사에 주석하시던 선사께서는 동래 범어사 계명암의 초청을 받아 제자인 만공, 침운과 함께 영남 최초의 선원을 개설 하안거를 지도 하셨으며 그해 겨울 청암사 수도암에서 금강경을 강의 하다 제자 한암중원을 만나셨다.

 

1899년 가야산 해인사로 주석처를 옮기신 후 고종의 칙명으로 대장경을 인출하는 불사와 수선사를 설치하는 불사의 법주로 추대되어 수선사를 창설하고 상당법어를 하셨으며 또한 (해인사수선사방함인) (합천군가야산해인사수선사창건기) (결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계사문)등의 글을 남기셨다.

 

1900년부터 1903년까지 선사께서는 해인사 범어사를 비롯한 경상일대의 사찰 뿐 만 아니라 송광사, 태안사, 화엄사, 지리산, 천은사, 영원사, 실상사 등 남도의 사찰들을 둘러보며 선사들의 영찬을 써주셨을 뿐만 아니라 선원도 개설하셨다.

 

1903년 범어사에서 (선문촬요)의 원형이 되는 (정법안장)을 편찬하고 (정법안장서)를 완성하셨으며 1904년 천장암에 들러 제자 만공월면스님을 인가하고 전법게를 내린 후 삼수갑산으로 길을 떠나셨다.

 

1905년 강원도 월정사에 머물며 3개월간 화엄경을 강의했고 1906년 안변 석왕사에서 나한개분불사 증명을 하셨다.

 

1906년부터 1912년까지 평안북도 강계, 위원, 함경남도 삼수, 갑산, 희천 등지에서 박난주로 이름을 지은 뒤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갓을 쓰고 서당의 훈장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당시 신지식인이며 독립 운동가들이였던 김탁, 김수장등과 함께 민족의 앞날을 고민하셨다.

 

1912년, 4월25일, 선사께서는 함경남도 갑산군 웅이방 도하동에서 남긴

임종계..

 

외로이 홀로 밝은 마음의 달

온누리의 빛을 머금었구나

그 달빛 온 누리와 함께 사라졌으니

이는 다시 무엇인가

 

취재 남부총괄팀장 한애경 법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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