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5(2021)년 5월 4일 제8대 포교원장 해산 범해스님 법문 전문
양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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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5(2021)년 5월 4일 오후 1시 30분에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사단 제2차 운영위원회의가 열렸다. 의장은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사단 향천 방창덕 단장이 맡았다. 삼귀의와 한글 반야심경으로 시작해 청법가가 있은 뒤 포교원장 범해스님의 법문이 이어졌다.
이날 범해스님의 법문이 훌륭하고, 범해스님의 법문이 가슴을 울린다는 포교사들의 평이 매우 많아서 운영회의에 있었던 범해스님의 법문 전문을 싣는다. 범해스님의 법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렇게 포교사단 단장님을 비롯해서 지역단장님, 그리고 운영위원님들 앞에 총재로서 자리를 했음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운영위원회의를 개최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저에게 단장님께서 좋은 부처님 말씀을 전해달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포교사 지역단장님들께 부탁하는 일 밖에 더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도 중생들이 원하는 답변을, 또 중생들이 원하는 삶을, 중생들이 걷는 길을 함께 하셨지 않겠나, 저도 포교사단 단장 이하 지역단 여러분과 함께 8대 포교원을 이끌 수 있는 지혜가 무엇인가 함께 고민하면서 생각을 하는 시간, 또 8대 포교원장으로서 총무원에서, 종단에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잠시 같이, 또 제 소신이 있다고 한다면 거기까지 말씀을 드리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 방단장님을 비롯해서 지역단 포교사님들, 코로나 때문에 힘드시죠? 코로나만 아니면 함께 공유하면서 함께 서로 얼굴을 맞대고 웃을 수 있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는데, 지금 상황이, 흐름이, 시절 인연이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뉴스를 보니까 환경학자나 환경운동 하시는 분들이 지금 상황이 자연적인 것보다는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기후의 변화와, 또 우리 인간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질병, 이런 것들이 인류가 살아가면서 너무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생각들 때문에 생겼다는 뉴스를 봤어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저도 한편으로 생각하기에는 이러한 지구촌의 인류가 겪고 있는 이러한 일들이 우리 중생의 입장에서 보면 미신의 발로가 맞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10대 때 처음 집에서 나왔었는데, 고향이 근처라 서울 쪽으로 와봤어요. 그때만 해도 종로 지역에서 물을 먹으려면 돈을 내고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어다 먹고, 집도 생선박스를 모아서 만든 판자집 같은 곳에 살던 시절에 제가 서울에 올라온 것 같은데, 지금 보면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된 것 같아요.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요. 제가 통도사 강당에 처음 갔을 때만 하더라도 집 한 채 사려면 마음만 내면 샀어요. 그런데 지금은 마음을 내도 안되잖아요? 그만큼 세상이 변했어요. 제가 보기에도 인간의 이기심, 인간의 욕심, 흐름에 의해 이만큼 변했는데, 요즘은 마음만 내면 KTX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어요. 대전이든 부산이든 다이렉트로 두시간 10분이면 어디든 갈 수 있어요. 제가 고향인 경기도에서 서울 올라오는데 하루가 걸렸는데, 지금은 부산도 하루면 왕복 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을 보면, 그만큼 인간이 인위적으로 세상을 바꿨다는 거예요. 인위적으로 바꿨다면 당연히 대가가 있잖아요?
불교가 어렵다고들 하는데 저는 불교가 제일 쉽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렵게 보는 분들은 어렵고 쉽게 보는 사람은 쉽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잖아요? 불교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 중 가장 쉬운 게 뭐예요? 우리나라 전래 설화가 있고, 민간에 내려오는 구전된 내용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보면 내용이 무엇으로 꾸려져 있는가, 다 인과응보에 관련된 것이고 윤회에 관련된 것들이잖아요. 어떠한 것을 하느냐에 따라 어떤 결과가 온다고 하는 것, 결국 인과잖아요.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반복해 일어나는 것이 윤회잖아요. 가장 일상적인 불교를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인과법을 믿는 것이고 저도 그렇게 합니다.
우리 절에서 신도들에게 법문을 할 때 이렇게 얘기를 해요. 사람을 믿지 마라. 절에 오면 무엇을 믿어야 하느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 하는 말과, 자기만의 고유한 인식을 상대에게 전해주려 하고 상대가 그것을 믿게 하려는 것, 거기에 속아넘어가면 안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왜 그렇게 이야기 하냐면, 사찰에서 부처님을 의지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다보면 오래 다니신 분들이 실망을 하는 경우들이 있어요. 그렇게 실망을 해서 절을 비방하거나 또 부처님법을 의지하지 않거나 하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다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런 분들이 계셔요. 그건 어떤 절을 찾아갈 때 그 절에 계신 부처님이 품고 있는 진리를, 진리에 대한, 참됨에 대한 것을 좇기보다는 거기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찰을 보면 주지스님이 바뀌면 신도들이 갈라서는 경우가 있잖아요. 전임 주지의 생각을 따라가시는 분, 새로 오신 스님의 생각을 따라가시는 분, 제가 초임 주지를 맡았던 곳이 그런 곳이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제가 처음 주지로 임명받아 가는데 신도들이 이렇게 나뉘어진 곳을 저보고 봉합을 하라고 해서 갔어요. 그래서 생각을 해 봤는데 부처님 열반경(涅槃經)에 보면, 성행품(聖行品)에 보면, 여래성품(如來性品)에 보면 사람을 의지하지 마라, 사람의 말에 의지하지 마라, 사람의 인식에 속지 마라. 이게 부처님이 마지막 열반경에 하신 말씀이예요.
첫째로 우리가 믿음이라는 게 뭐예요? 삼보를 믿어야 하잖아요. 삼보를 믿음에 있어서도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거잖아요. 제가 충격을 받은 일이 있는데, 국회 정각회 법회를 갔더니 삼귀의를 하는데,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를 바꿔서 하더라고요. 거룩한 스님들이 아니고 승가가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충격을 받았는데, 결국은 그것은 사람을 믿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출가한 사람도 사람이고 여러분도 사람이고 다들 똑같은 사람이예요. 똑같은 생각들을 가지고 똑같은 생활을 한단 말이예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이 무유정법(無有定法)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그럼 무엇을 믿어야 하느냐, 그 절에 존재하는 법칙을 믿어야 합니다.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이고 부처님 가르침이잖아요. 진리의 진실한 의란 말이지요.
둘째로 사람의 말을 믿지 말라는 것은, 사람은 때로는 자기 이익이나 자기 삿된 견해를 피력할 때가 있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삿된 견해를 피력해서 내 뜻에 동조해 줘야 한다고 하는 것, 내 뜻에 함께 해 주면 좋은 사람이고 내 뜻에 동조하지 않으면 성질이 고약한 사람이고 별난 사람이고 그렇단 말이예요. 그런데 그렇게 현혹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죠? 언어로써, 말로써 꾸며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그 말에 떨어지면 결국 불교는 어렵다고 하는거예요.
셋째로 우리 인식도 그렇잖아요? 우리 포교사 되신 분들이 보면 이런 분들이 계세요. 간혹 가다가 “스님. 신도 대상으로 강의할 수 있는 시간을 내 주시면 제가 강의를 해 보겠습니다.” 하고 불교 강의를 하겠다는 분이 계세요. 물론 그것도 좋지만 그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인식이잖아요. 그렇죠? 인식이예요. 요새 사람들이 자기가 무엇인가를 할 때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인식입니다. 우리도 스스로 생각해보면, 내 육신에 대해 생각해 보면 속는 게 있어요. 맥을 짚어보면 맥이 뛰는 시간, 횟수가 있을 거예요. 그렇죠? 하지만 우리 몸이 맥에 따라서 한꺼번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에요. 인식이라는 것이 이렇단 말입니다. 안다고 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만큼, 상대가 그만큼 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야 해요. 그래서 불교는 지식보다는 지혜를 우선으로 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의 말에 의지하고, 사람의 인식에 의지하면 항상 속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불법을 믿어도 옳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믿느냐? 불교의 법성을 믿어야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건 지식을 쌓는게 아니라 지혜를 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진실하게 살지 않으면, 참되게 살지 않으면 남한테 속는다 이 말이예요. 속으면 그 대가는 속는 내용에 따라서 온다, 이게 또 인과법이잖아요. 그래서 불교는 쉬운거예요. 어렵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우리 종단이 포교사님들을 양성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종단 입장에서 포교사를 양성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포교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용어로 말하면 정법구주(正法久住)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의 정법이 세상에 오래도록 머물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요. 종단이 포교사 제도를 만들고, 포교사를 운용하고 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진리의 법인 정법이 이 세상에 영원토록 유지되게 하기 위해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정법구주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부처님 말씀을 제공을 하잖아요. 첫째로 이고득락(離苦得樂) 해야 한다. 중생들의 삶이, 우리들의 삶이 어렵다고 한다면 힘들다고 한다면, 고통 속에서 산다고 한다면, 괴로움 속에서 산다고 한다면 즐거움 속으로 이끌어줘야 하는 겁니다. 두 번째. 방비지악(防非止惡) 하는 것. 그릇됨을 막고 악함을 그치게 한다, 이말 이예요. 악함을 그치게 한다. 세 번째는 뭐예요? 전미개오(轉迷開悟) 우리는 어리석으니까 미혹함을 돌이켜서 깨달음으로, 그 사람이 참된 세계로 나가게 한다고 하는 거잖아요. 정법구주를 위해서는 이렇게 세 가지가 중생들에게 필요하다고 던진 거예요. 그렇잖아요? 어렵다고 하면 어려움으로부터 즐거움으로 가게 해 주고, 어리석다고 하면 어리석음을 또 지혜로써 개발해 주고, 또 잘못된 길로 간다면 막고 잘못된 악은 그치게 한다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화엄경(華嚴經) 현수품(賢首品)에도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본 말씀이 있어요.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源功德母)요, 장양일체제선법(長養一切諸善法)이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이다. 이게 무슨 말이예요? 자기 근본에 대해서 믿어야 하는데 사람을 믿거나 말을 따라가거나 그러면 안 된다, 이말 이예요. 세상에 존재하는 진리성을 믿어야 한다.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깨달음을 얻으신 ‘세상에 존재하는 진리성’이란 말이지요. 달리 없는 법을 만들어서 이것이 생명이요, 소금이요, 이게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은 우리들 삶 속에 들어있는 법칙성을 발견하신 분이란 말이지요. 그것을 체계화시키고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사성제(四聖諦)니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이니, 이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생기고, 저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이 전부 그런 거잖아요.
제가 기자회견이나 또 8대 포교원의 생각을 언론에 이야기를 했는데 첫째로 전임 원장스님께 저는 “물이 흐르듯이 하겠다. 번개쳐서 뛰쳐 올라가는 그런 개인기를 하지 않고 물이 흐르듯이 종단에서 하는 일들 계승해서 계속 하겠다.” 라고 했어요. 신위도원공덕모라고 하는 것은 저도 세상에 대한 믿음이 있을 것이고 사람에 대한 신뢰가 있을 것 아니에요? 믿음이 근본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가 되지요. 우리 종단이 어떻게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고 따르게 노력해야 하는데 우리 포교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우리 승단을 이루고 있는 집단에 대해서 봐야겠지요. 그리고 승가가 존재하고 있는 환경이 어떠한 환경인지를 봐야하고, 세 번째로는 그럼 이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맞춰줘야 한다는 것, 이게 제 소신이예요. 그래서 포교원은 강물처럼, 물처럼 흐르듯이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고요. 우리 종단이 지금까지, 7대까지 포교원에서 쌓아왔던 포교원력들, 소원들, 이것들을 계승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단념시키고 내가 새롭게 8대 포교원을 새로이 이끌겠다는 것은 오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사회고 어느 집단이고, 여러분들도 다 ‘장’ 들이시니까 나름대로 다 뜻을 펼치시겠지만, 그래도 앞사람이 무엇인가 나아요. 제가 보기엔 그래요. 제가 여태까지 60평생 살아오면서 보면 앞사람이 훨씬 나은 것 같고, 또 뒤를 돌아보면 뒷사람이 나보다 능력이 뛰어난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누구도, 앞서서 깃발을 들었던 사람이나, 그 깃발을 따라오는 분이나, 틀린 것이 아니예요. ‘보는 사람 입장에서 가르는 것일 뿐 그것은 그냥 흘러가는 물이다’ 이말 이예요. 제가 출가하기 전에 감명 깊게 읽은 책 가운데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라는 책이 있어요. 머리 깎고서 기억나는 게 싯다르타가 강물에 손을 담그고 발을 담그면서 바라보던, 그 물이 흐르는 장면만 생각이 나요. 그렇듯이 우리도 흐름이라고 하는 것이 있잖아요?
여러분들도 저와 같이 머리도 희끗희끗하고 염색도 하셨을 것이고 어느 정도 세상을 살다 보니 이제 욕망도 저하될 시기이고, 저보다 연배가 위일 수 도 있고, 비슷한 분도 있고, 아무튼 욕망은 좀 저하됐죠? 욕심이 좀 줄어들지 않았어요? 저도 이 세상을 살면서 나이가 들다보니 몇 년 전부터, 울산에서 서울로 올라오고 종회의원까지 올라와서, 안암동에 갈 때까지 욕심이 좀 있었어요. 그런데 개운사에서 김포 쪽으로 가면서 욕심이 줄어들더라고요. 누군가 무엇을 갖다 줘도 그것을 보거나, 내 옷을 보거나, 내 머리를 보거나, 왜 그걸 해야 되지? 내가 그것을 왜 욕심을 내지? 하는 걸 들여다보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하는 게 순리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잖아요. 그렇게 못하죠? 불교 용어 중에서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는 말이 있어요. 교학을 버리고 선에 들어간다는 말인데, 나이 들면 교학을 못해요. 제가 보니까 그래요. 나이 들면 자연적으로 교학을 못하겠더라고요. 왜 그런지 아세요? 눈이 어두우니 안경을 써야 하고 귀가 어두우니 보청기를 껴야 하고, 그러니까 입선(入禪)하는 거예요. 입선이 뭐예요? 가만히 있는 거잖아요. 그저 가만히 세상의 흐름을 관하는 거잖아요. 자기를 관하고 세상의 흐름을 관하고. 교학이라고 하는 게 그런 거잖아요. 이렇게 봐야 하고, 글씨 살펴야 하고, 이게 문장이 맞는가, 뜻에 맞는가, 살펴야 되지만, 선은 안 그렇잖아요. ‘이 뭣고?’ 만 찾으면 되요. 뭐지? 이것이 뭐지? 이것이 뭘까? 왜 머리가 희지? 왜 코는 거꾸로 되어있지 않고, 왜 하늘을 보지 않고 밑으로만 보고 있지? 이게 의심이잖아요. 이 의심만 가지면 되요. ‘이 뭣고?’ 의심만 가지면 돼요 그런데, 교학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옛날에 어른들이, 선생님들이 그랬어. “나이 들면 자연적으로 사교입선 해야 하느니라.” 그렇잖아요. 교학을 버리고 선을, 참선을 해야 한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이가 드니까 그 말이 와닿더라고요. 뭐라고 해도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요. 그리고 욕심도 그렇게 나이가 들면 줄어드는 거예요. 신위도위공덕모요, 장양일체제선법이라고 했잖아요? 장양일체라고 하는 것은, 장양은 기른다는 뜻이잖아요. 그렇죠? 기른다. 뭐를? 모든 것을, 일체를. 뭐를? 제선법을.
제가 원장으로 왔을 때 누가 그러더라고요. “스님 8:2라는 비율을 아세요?” “모르겠는데?” “누가 뭘 해도, 아무리 좋아도 여덟 명이 스님을 좋아해도 두 명은 항상 싫어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이게 법칙입니다.” 라고 그랬어요. 그렇듯이 세상에 누구나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다 겪어보셨으니까 아시겠지만 내가 어떤 모임을 잘 하기 위해서, 나의 회사를 잘 하기 위해서, 나의 가정을 잘 가꾸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쓰셨을 거예요. 그렇죠? 평생 아낌없이 내 머리가 희도록, 내 얼굴이 주름이 생기도록 노력을 했더라도 한번 자기 주위를 돌아보면, 자기 자신의 내면적 소리를 들어보면 이웃에 대해서, 나를 비롯한 사람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관심을 줬는가 한번 봐주세요. 뜯어보세요. 또 나하고 지금 인연 맺고 있는 사람들이 어떠한 인연으로, 어떠한 이유로 나하고 지금 가까이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어요? 생각해 보면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어요. 자기 자신을 볼 수가 있어요. 스님들하고 여러분하고 틀린 건 뭔지 아세요? 스님들은 자기 자신을 잘 알 수 있어요. 출가한 사람들은. 어떻게? 같은 동료를 봐도 승복입고 있네, 머리 깎고 세상 사람들과 다르네? 내 머리를 만져봐도 어? 다르네? 그리고 나 스스로를 조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린 잃어버리잖아요? 그렇죠? 어떤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포교사단복을 입었지만 사회에 돌아가서 일반 옷을 입을 땐 나를 깜빡 잊을 때가 있잖아요. 그게 뭐예요? 선법(善法)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말 이예요. 우리는 스스로 선법을 내는 것은 길들여야 됩니다.
제가 오늘 우리 포교사단 단장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딱 이말 입니다. 마음의 근육을 강화시켜야 합니다. 마음의 근육을 강화시키지 않으면 내가 지금까지 주어졌던 인연들에 대해서, 나의 반연(攀緣)들에 대해서, 나의 떠나간 반연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즉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자각하려는 노력을 한다고 하면 불자들은 어떻게 하느냐, 마음 근육을 강화시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육체를 단련하기 위해서 헬스장을 다녀도, 10년을 다녀서 근육이 울룩불룩해도 어떤 정신적 타격을 입으면 하루아침에 가는 게 사람의 근육이예요.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여러분이 수행자 반열에 들었으니까, 잘할 수 있는 게 뭐예요? 마음을 관리를 하는 것이죠. 마음 관리 속에서 뭘 해야 하느냐, 마음공부를, 마음의 근육을 강화시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마음 근육을 강화시키려면 뭐냐,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아야 해요. 그렇죠? 그 사람 이름만 대도 “아 그 사람은 그냥 좋은 사람이야.” 그게 착한, 선법이란 말이예요. 내가 착한 일을, 그 사람은 어디 내놔도 방비지악 하고 이고득락 하고 전미개오 할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해요. 그러니까 마음의 근육을 강화시키는 건 다른 게 아니에요. 내가 선법에 대해서, 세상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되겠는가, 그 생각을 하면 되요. 그렇게 하면 삼보를 믿을 때 그냥 일반적으로 믿겠어요, 나의 신념 속에서 믿음이 나오겠어요? 신념 속에서 믿음이 나와야 해요. 신념 속에서 나와야 믿음이 내가 되고, 나의 나래가 되고, 내가 그 근육을 키울 수 있는 거예요. 그냥 같이 간 사람이 하니까 신발 벗고 법당 들어가서 향 피우고 절 하는거 아니잖아요. 누가 뭐래도 내 마음이 일어나서, 내 마음을 내가 일으켜서 부처님 앞에 나가 아무리 벗기 불편한 신발을 신었어도 신발을 벗고 부처님 찾아뵙고, 향 하나 켜고 촛불 켜고 절을 할 수 있으면 되요. 그게 뭐예요? 내 마음의 근육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예요. 내 마음의 근육을 강화시키지 않고 그냥 일반적인 생각들만 따라가면 어떠한 계기, 어떠한 일을 만났을 때 그냥 나가떨어지는 거예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것, 내가 모아놓은 것, 아무 쓸데가 없어요. 하루아침에 그냥 물난리 만난 것처럼 되어버린다는 것이지요. 내 마음의 근육이 강화되면, 그런게 와도,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맞고, 벼랑이 있으면 벼랑을 건너갈 수 있고, 어려움이 있으면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포교사단장, 지역단장님들은 지역에서 가장 으뜸가는 분들이잖아요. 그리고 지역 속에서 인정받는 분들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포교원장이 여기 와서 떠들고 있는 거잖아요? 인정받은 만큼의 우리 신심을 강화시키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다른 사람은 나가떨어지더라도 나는 나가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야지요. 지역단장으로서의 역할만 하면 안되고 내 스스로 내면적인 근육이 내면적인 수행력이 쌓여있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어디다 던져놔도 나는 부처님 삼보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 부처님이 나를 외호해 주시니까, 또 내 스스로 자성불(自性佛)을 믿는다고 한다면 나에게 있는 자성불은 끊임없이 무한한 공정력을 나툴 수 있는, 일체 모든 선법을 나투는 역할을 내가 한다고 하는 거예요. 세상은 누구도 믿지 말고,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다, 그렇잖아요. 여러분이 중심이예요. 이건 내가 어느 법회 자리를 가도 꼭 얘기하는데, 세상은 내가 중심이다, 이거예요. 여기 단장님 가족이 별안간 세상에서 없어지면 단장님이 계셔야 세상에서 없어진지 아닌지 알지, 안 계시면 어떻게 알아요. 그래서 내가 세상의 중심, 우주의 중심이다, 내가 동서남북의 주인이라는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해요. 그런 의지력을 가지고 사는 게 뭐예요? 자기를 항상 강화시키는 것인데, 그것은 마음으로 강화시키지 않으면 가르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에요.
지혜라고 하는 것이 아무데서나 나오는 게 아니에요. 그렇죠? 지혜가 지식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서 나와야 합니다. 자기 마음에서 나오려고 하면 뭘 믿어야 되느냐,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믿어야 한다. 자신에 대한, 누구도 자신을 대신해 줄 수 없다, 부처님이 그랬잖아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이게 뭐예요? 세상의 누구도, 사방을 들여다봐도 걸음 걸을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구나 하는 것이잖아요. 그 말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뭐예요? 우리에게 알려 주는 건 세상에 내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세상이 아무리 못살거나 제약이 있거나 잘살거나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그거잖아요. 내가 생존해 있을 때, 내가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게 뭐냐, 내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걸 꼭 믿고 의지해야 자기 신념도 생기고 그 다음에 신념이, 믿음이 공덕의 어머니가 되고 도의 근원이 되고 공덕의 어머니가 됩니다. 그리해야지 내가 세상에 베풀 수 있는 게 있다, 그게 선법이라는 거잖아요. 좋은 일을 한다는 게 뭐예요. ‘그 사람은 하는 대로 옳다’ 라고 하는 거잖아요. 마치겠습니다.
불기 2565(2021)년 5월 4일
대한불교조계종 제8대 포교원장 해산 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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