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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간화선 지침-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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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

그래서 이 공부는 시끄러운 장터에서도 가능하고, 일상 생활공간의 어떤 곳에서도 가능한 것이다.

화두삼매(話頭三昧)로써 만이 공부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부족함이 있다.

화두(話頭)는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있어야 한다.

사물을 정확히 보면서 사물에 물들지 않는다.

이것이 선의 매력이다.

잘 하고자 하는 생각은 중생생각인데, 또한 중생생각은 부처로부터 조금도 떨어져 있지 않다.

여기에서 묘(妙)함의 이치가 있다.

즉, 중생생각을 통해서 부처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부처는 이러한 중생생각에 물들어 있지 않고, 머물러 있지도 않고 여여(如如)하게 있다는 것이 깊은 뜻이다.

그래서 금강경에 있는 ‘응무소주, 이생기심’ 이라는 게송(偈頌)으로서 육조스님이 단박에 깨치신 것이다.

이렇듯이 화두를 해야 하는데 그냥 “이 뭣고!” 해서야 공부가 되지 않는다.

중생생각으로 그 생각의 딱지도 안 떼고 화두를 해서는 절대로 공부가 안 된다.

그래서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 라고 하는 것이다.

아는 생각을 반야(般若)의 지혜(智慧)로 바꾸고자 한다면 잘해 보려고 하는 생각과 한바탕의 충돌이 생긴다.

아는 생각이 잘못이 아니고, 아는 생각을 쓸 곳과 쓰지 말아야 할 곳을 자각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우선 아는 생각을 내려놓으라고 한다.

이와 같이 자기 마음을 아는 생각으로 가려 놓고 선(禪)을 하기 때문에 졸음에 떨어진다.

화두공부는 화두를 들고자 하는 그 마음이 스스로를 가리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무턱대고 ‘무(無)’, ‘이 뭣고!’, ‘하루 10시간 참선’, ‘참선을 30년 했다’ 등등의 일은 모두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의도적인 것으로는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

이 화두는 하면 한 만큼 획기적으로 변해간다.

변하기 때문에 변했다고 말하여지지 않는다.

의도적 생각과 표현이 절대로 드러나지 않게 된다.

세상 보는 눈과 생각이 달라진다.

사람 보는 눈이 다르게 변해간다.

세상은 그대로 있는데, 내 눈과 내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밝게 보인다.

그러나 한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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