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에서 읽는 오천퇴석장(五千退席場)의 충격
전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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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을 읽을 때마다 좀처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장면이 있다. 부처가 중대한 뜻을 밝히려는 바로 그 순간, 무려 오천 명이 자리를 뜨는 대목이다. 흔히 이 장면은 교만한 비구들이 묘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물러난 사건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나는 늘 그런 해석이 너무 손쉽다고 느껴 왔다. 그렇게 정리해 버리는 순간, 이 장면이 품고 있는 불길한 긴장과 사상적 폭발력이 오히려 지워지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부처의 설법 자리에서, 그것도 오랜 수행을 쌓아 온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집단으로 등을 돌린다. 이것이 과연 몇몇 수행자의 인격적 결함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일일까. 더구나 그들은 어떤 장황한 교설을 끝까지 듣고 반발한 것도 아니다. 부처가 이제 중요한 뜻을 밝히겠다고 하자, 그들은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물러난다. 나는 바로 이 점이 핵심이라고 본다. 그들이 감당하지 못한 것은 어떤 세부 교리의 난해함이 아니었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자신들이 의지해 온 깨달음의 질서 자체를 뒤흔드는 어떤 진실의 기미였을 것이다.
우리는 보통 법화경의 핵심을 일불승(一佛乘), 불지견(佛知見), 제법실상(諸法實相) 같은 말로 요약한다. 물론 이 말들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하다. 그것들은 핵심 그 자체라기보다 핵심을 가리키는 표지판에 가깝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표지판이 향하는 방향이다. 내가 보기에 법화경이 끝내 말하려 한 것은 훨씬 더 급진적이다. 인간은 부처의 길 바깥에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인간 존재 안에 이미 부처의 근거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 바로 그 불편하면서도 거대한 진실이 법화경의 깊은 바닥에 놓여 있다.
만약 부처가 설하려 한 것이 수행론의 보충이나 단계의 확장 정도였다면, 오천 명이 굳이 그 자리에서 일어설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기존의 수행 질서 안에서도 더 높은 경지, 더 미세한 지혜, 더 엄격한 실천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법화경은 그런 식의 덧붙임이 아니다. 이 경전은 아예 판 자체를 바꾸려 한다. 지금까지 완결이라 믿어 온 것을 완결이 아니라고 하고, 이미 끝났다고 여긴 자리에서 다시 길을 열어 놓는다. 일부 수행자의 성취로 닫혀 있던 깨달음의 세계를, 모든 존재의 궁극적 가능성으로 다시 돌려놓는다. 충격은 바로 거기서 생긴다.
이 때문에 나는 그 유명한 퇴장(退場)을 몇몇 수행자의 교만을 꾸짖는 교훈적 장면으로만 읽지 않는다. 그것은 교만한 자들의 퇴장이 아니라, 닫힌 깨달음의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에 벌어진 집단적 동요다. 이미 얻었다고 믿어 온 이들, 더는 넘어설 것이 없다고 여긴 이들, 자기들이 도달한 자리를 최종이라 확신해 온 이들에게 “아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라는 말은 충고가 아니라 해체다. 자기 수행의 의미도, 자기 존재의 자리도, 자기 구원의 완성도도 한순간에 흔들리는 자리에서, 어떤 이들은 더 이상 듣지 못하고 물러났을 것이다.
내가 오천퇴석장에 천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많은 경전 가운데 부처의 설법을 앞에 두고 이처럼 대규모로 돌아서는 장면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대목은 우연히 끼어든 삽화가 아니라, 법화경 전체의 긴장을 압축해 놓은 핵심 장면이어야 한다. 경전은 오히려 이 파격을 통해 말한다. 지금부터 드러날 것은 익숙한 가르침의 연장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종교적 상식을 뒤엎을 만큼 낯선 진실이라는 것을.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법화경이 후대의 선불교와 이어진다고 본다. 선은 훗날 “이 마음이 곧 부처다(卽心是佛)”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은 이것을 후대의 과감한 비약으로 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법화경이 에둘러 열어 놓은 문을 선(禪)이 정면으로 밀고 들어간 것에 가깝다. 법화경은 노골적으로 “너 자신이 곧 부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비유하고, 암시하고, 방편을 두며, 끝내 직접적인 표현을 유보한다. 그러나 바로 그 우회가 내용을 증언한다. 너무 급진적이기에 정면으로 말할 수 없었고, 너무 거대한 전환이기에 비유와 선언의 형식을 빌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 조심스러움에서 법화경의 진심을 본다. 말하려는 바가 단지 교리 하나를 덧붙이는 정도였다면 그렇게까지 에둘러 갈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인간과 부처 사이의 거리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기존의 수행 질서를 흔들고, 성문(聲聞)의 완결성을 무너뜨리며, 인간 존재를 바라보는 눈 자체를 바꾸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먼저 회중이 갈라지고, 그다음에 비유가 이어지며, 끝내 독자가 스스로 뜻을 더듬어 가게 만드는 법화경의 방식은 우연이 아니다. 내용이 급진적이기 때문에 형식 또한 우회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내가 내리고 싶은 결론은 분명하다. 오천퇴석장은 단순히 수행자의 교만을 꾸짖는 장면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부처를 갈라놓던 마지막 벽이 흔들리는 순간이며, 그 충격 앞에서 어떤 이들은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물러난 사건이다. 그리고 후대의 선이 “이 마음이 곧 부처”라고 직설할 수 있었던 것도, 이미 법화경이 그 문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법화경이 변죽을 울리며 암시한 것을, 선(禪)은 마침내 정면으로 말한 것이다.
오천퇴석장은 그래서 법화경의 주변부가 아니다. 오히려 그 대목이야말로 법화경의 심장을 가장 날것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누가 왜 자리를 떴는가를 묻는 일은, 결국 부처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를 묻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질문 끝에서 우리는 아마도 하나의 위험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인간은 부처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일 뿐 아니라, 이미 그 진실을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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