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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간화선 지침-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김창엽

view : 2020

14.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요사이 절에서 목탁치고 기복(祈福)하면 절 운영이 잘 안 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전문화된 지식이 이미 그러한 기복(祈福)의 성향에서 떠나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불교가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고 마음의 길을 일러주면서 지식의 한계를 극복해주는 그러한 불교라야 발전할 수 있겠다.

이것은 불교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살아계실 당시의 가르침으로 회귀(回歸)함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곧 진리의 불법(佛法)이다.

불법(佛法)을 믿기 때문에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불교는 생산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불교를 사람들이 묻어놓고 믿으니까, 미혹(迷惑)한 기복(祈福)과 산사음악회 등등으로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려고 하는 어리석음만 반복하고 있는 실정이다.

간화선(看話禪)은 가려버린 내 마음의 싹을 다시 트이게 하는 것이 고, 숨겨놓고 안 쓰던 부분을 일으켜서 쓰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며, 막아서 차단되어 방해된 것에 붙들리지 않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간화의 화두법(話頭法)이다.

부처는 형상(形相)이 없는 것이기에 부처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또 중생도 아니다.

그럴 때 생불(生佛)이 살아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속세의 지혜를 여읜 출세간적 불법(出世間的 佛法)의 지혜이다.

이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며, 만져지지도 않는다.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이것이 마조 스님의 ‘이 뭣고?’ 화두이다.

생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오랜 세월동안 증명이 되었다.

중생생각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중생들은 몸이 움직이고 생각하고 번뇌망상이 일어나는 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뭣고!’가 되는 것이다.

공부가 안 되면 안 되기 때문에 ‘이 뭣고!’가 되는 것이다.

중생생각으로 만든 ‘이 뭣고’ 는 안 된다.

조사스님들의 화두(話頭)로 받아들여야 한다.

생각이 끊어져 버렸을 때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이 뭣고! 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화두에 의심(疑心)이 끊어지지 않으면 이름을 “참의심”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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