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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간화선 지침-본래면목(本來面目)과 심절로(心截路)

김창엽

view : 1894

19.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심절로(心截路)

화두는 하면 할수록 하는 만큼 중생심이 줄어든다.

그냥 달라져서 변화가 오기에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런데 “이 뭣고?” 해 놓고 하나에만 묶이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앉아서 공부하는 이유는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기운이 단전에 모여서 생각의 생멸(生滅)이 잘 보이니까 그렇게 앉아서 하는 것이지, 공부할 줄도 모르고 앉아 있는 것은 엉터리이다.

과연 우리가 수 없이 움직이는 상대적 양변(兩邊)을 어떻게 중생생각으로 믿고 따를 수 있겠는가?

이것이 참마음이 아닌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종횡무진(縱橫無盡)하는 중생생각을 떠나서는 결코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화두를 드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를 만나면 종횡무진하던 마음이 변한다는 것이다.

계정혜(戒定慧)가 보리(菩提)와 지혜로 변하면서 다툼이 없어진다.

중생은 부처를 못 만나니까 중생심이 치성해서 양변(兩邊)에서 싸우고 다투고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화두 공부인은 상(相)이 상(相)이 아닌 줄 아니까 상(相)이 멸해진 뒤에 그 자리에 지혜가 스며들어서 육식(六識)에 평화가 온다.

중생이 부처로 바꾸어진 결과 부처가 작용한 자리에 모든 중생이 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이러한 화두 하나만 잘 하면 종교도 초월하고 팔정도(八正道)가 그대로 드러난다.

금강경을 중생심으로 접근하면 어렵기 때문에 중생심으로 가려진 그 바탕에 근본체(根本体)를 두고 있는 마음을 본 뒤에 접근해야 쉽게 느껴진다.

일어났다가 꺼지곤 하는 그 생각을 화두로써 없애려고 하지 말고, 일어나고 꺼지는 그 마음하고 함께 살 줄 알아야 한다.

활구(活句)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불안하고 성가신 마음이 일어나는 구나!’ 하는 그것을 인식하고 그 놈과 함께 살아야겠다고 하면 불안과 성가신 마음은 숨을 죽이고 사라지기 시작한다.

여기에다 화두를 들여대는 것이다.

생각으로 ‘마음도 아니다.’ 라고 하지 말고, 그 불안한 그 마음을 자각하면서 그 마음을 보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도 아닌 것이 자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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