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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自覺)과 신앙(信仰)]

허태기

view : 2011

[자각(自覺)과 신앙(信仰)]


불교(佛敎)는 자각(自覺)과 이성(理性)의 종교요,
기독교(基督敎)는 신앙(信仰)과 초이성(超理性)의 종교다.
하나는 진리를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종교요,
하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는 종교다.

각(覺)의 종교와 신(信)의 종교,
이성의 종교와 초이성의 종교,
얼마나 커다란 차이인가.

먼저 불교부터 생각해 보자.
불교는 이성의 힘으로 우주와 인생의 진리(眞理)를
깨달아야 한다는 종교다.

불교에 의하면 내가 곧 빛이다.
그러나 내가 그대로는 빛이 아니다.
내 속에는 분명히 놀라운 빛이 간직되어 있다.
다만 무명(無明)과 탐진치와 갈애(渴愛)와 번뇌(煩惱)의
어두움에 가리워서 그 빛이 밝게 비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 어두움이 걷힐 때 밝은 빛이 스스로 솟는다.
스스로 각(覺)하고 깨달아라. 이것이 불교의 기본 입장이다.
불교는 이성적 자각(理性的 自覺)의 종교이기 때문에
신비(神秘)와 기적(奇蹟)을 부정한다.
신비와 기적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이다.

불교는 합리주의자(合理主義者)의 종교다.
불교는 종교인 동시에 철학이요,
철학인 동시에 종교다.

8만 4천의 법문(法門)이 모두 철학적 종교요,
종교적 철학이다.
우리는 불교에서 철학과 종교의 아름다운 조화(調和)를 본다.
어디까지 철학이고 어디까지가 종교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철학과 종교의 대립적인 싸움을 볼 수가 없다.


기독교는 이성(理性)의 질서와 신앙(信仰)의 질서를 분명히 가른다.
이성이 끝나는 데서부터 신앙이 시작한다.
이성은 철학의 입장이요, 신앙은 종교의 입장이다.
이성은 이성의 진리가 있고, 신앙은 신앙의 진리가 있다.
여기서 이중 진리설(二重 眞理說)이 나온다.
이성의 요구와 신앙의 요구를 양립시키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적 사고방식이다.


불교에서는 이성과 신앙의 대립과 투쟁이 없다.
양자는 서로 보완(補完)하여 완전한 일체를 이룬다.
불교는 '믿어라'고 말하지 않고 '깨달아라'고 말한다.
사람은 저마다 놀라운 각(覺)의 힘을 지닌다.
내 속에 각의 빛이 있고 이 각의 빛으로 달마(Dharma)를 깨달으면 된다.
달마는 불교의 진리를 말한다.
불교의 진리를 법(法)이라고 일컫는다.



불교는 불타(佛陀)에서 시작한다.
불타는 'Buddha'란 말을 한어(漢語)로 옮긴 것이다.
'Buddha'는 범어(梵語)로서 '깨달은 자(The awakened, The enlightened)'란 뜻이다.
진리를 깨달은 자가 곧 불타다.
불교는 깨달은 자의 종교요, 또 깨달음의 종교다.
불타를 석가모니(釋迦牟尼)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는 'Sakyamuni'란 말을 한어로 옮긴 것이다.

사캬(Sakya)족에서 태어난 성자(聖者)란 뜻이다.
무니(Muni)는 수행(修行)의 완성자를 의미한다.
불타며 석가모니며 모두 각(覺)과 관련한다.

불타의 본명은 고타마 싯달타(Gotama Siddhartha)다.
싯달타는 석가족의 한 구도적 청년(求道的 靑年)으로
인생의 근본문제에 회의를 품고 29세에 출가하여
6년의 고행과 명상 끝에 35세에 보리수 밑에서
인생의 대진리(大眞理)를 깨달았다.


그는 깨달은 자, 즉 불타가 된 것이다.
그의 깨달음의 내용이 곧 불교다.
불타가 깨달은 그 깨달음은 인생의 커다란
깨달음이기 때문에 대각(大覺)이요,
올바른 깨달음이기 때문에 정각(正覺)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무상정각(無上正覺),또는 무상정등각이라고 칭한다.
더 할 수 없는 무상(無上)의 올바른 깨달음, 즉 정각이란 뜻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깊이, 바로, 크게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는 스스로 각(覺)하는 종교(宗敎)다.

그러나 각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
낮은 각에서 높은 각에 이르는 각의 수많은 계단이 있다.
범부(凡夫)의 각은 낮은 각이다.


수행(修行)의 단계를 높이 올라가면
아라한(阿羅漢---羅漢이라고도 한다)의 단계에 도달한다.
아라한은 'Arahan, Arhat'란 말을 한자(漢字)로 음사(音寫)한 것이다.
아라한은 일체의 번뇌를 멸하고 남의 공양(供養)과 존경을
받을 만한 높은 경지에 도달한 자를 말한다.
아라한을 응공(應供) 또는 복전(福田)이라고도 일컫는다.

응공이란 남의 공양을 받을 만한 자란 뜻이요,
복전이란 남에게 복을 줄 만한 말이란 뜻이다.
아라한은 범인으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각의 경지다.

각의 단계를 한없이 올라가면 보살(菩薩)에 이른다.
보살은 보디삿트바(Bodhisattva), 즉 보리살타(菩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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