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간화선 지침-처처불, 사사불공(處處佛, 事事佛供)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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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처처불, 사사불공(處處佛, 事事佛供)
번뇌망상에 의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해 봐야 둥둥 떠다니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놈을 귀하다고 하더라도 바람 속에 휙 날려지니 이러할 때에 그는 자신의 생각을 놓쳤다고 표현한다.
잘못 의지한 것도 불안할뿐더러, 귀하다고 믿었던 것이 사라지니까, 거기에서 커다란 공허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바로 중생의 고통이다.
그런데 선(禪)을 하게 되면 위와 같은 것을 처음부터 붙잡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있었던 번뇌 망상조차도 사라져 버린다.
이것을 열반(涅槃)과 적멸(寂滅)의 즐거움이라 한다.
즉, 고통이 멸(滅)해가는 즐거움이다.
이것이 바르게 하는 불교라고 한다.
부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밖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 잘못된 불교이다.
부처가 어디에 있는지 들여다보는 그 마음에 부처가 함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돌이킬 때, 우리는 자신의 헛된 생각을 보게 된다.
생각으로 생각을 보려고 하면 안 보인다.
번뇌망상으로 망상을 보려고 하면 안 보인다.
망상(妄想)이 부처와 같이 있다고 믿고 있을 때, 그 때에 비로소 번뇌 망상이 보여지면서 헛것인 줄 알게 된다.
그러면 저절로 없어지고 부처가 나타나는 지혜가 일어난다.
자신의 안에 부처가 있기 때문에 보고 듣고 작용하는 것이다.
또한 부처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부처를 ‘금강(金剛)’이라고 표현하여 나타내기도 한다.
이 공부의 길이 바로 금강경에 있다.
이것을 바로 깨달은 것이 바로 화두법이다.
그리하여 헛것에서 벗어나게 된다.
처처(處處)가 불(佛)이고, 사사(事事)가 불공(佛供)이다.
“무(無)” 자 화두의 뜻은...
승(僧)이 조주에게 묻되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이르되 ‘무(無)’라고 하였다.
다만 이 ‘무(無)’자는 종문 중의 한 관문이니 유심(有心)으로도 뚫을 수 없고, 무심(無心)으로도 뚫을 수 없다.
만약, 털끝 만큼이라도 있다고 하면 문 밖의 일이니라.
석가나 조사가 깨달은 불성은 우리 중생들에게 맞추어진 익숙된 그러한 성품이 아니라, 중생들에게 작용하는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성품을 보아서 깨치기 전에는 개에게 불성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는 매우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자신의 마음의 지혜가 의식(意識)에 덮여서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지혜가 못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시야가 좁아져서 캄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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