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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간화선 지침-사량분별(思量分別)을 여의고 방하착(放下着)하다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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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여의고 방하착(放下着)하다

어째서 조주가 ‘무(無)’라고 했을까?

여기서 묻는 사람은 의식(意識)에 덮혀서 중생생각으로 물었고 ‘무(無)’라고 대답한 조주는 석가가 깨친 것과 똑같이 깨친 사람으로서 대답한 것이다.

그래서 조주를 선가(禪家)에서는 고불(古佛)이라고 부른다.

지금 부처와 중생이 만나서 중생이 질문하고 부처가 대답하고 있다.

그런데 석가는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조주는 없다고 했을까?

여기서는 조주의 뜻이 중요하다.

‘있다, 없다’ 의 분별적인 ‘무(無)’가 아니고 ‘유, 무’를 떠나서 양변(兩邊)을 떠나 있으면서 중생의 견해로 하는 그러한 ‘유, 무’가 아니라는 뜻이다.

조주가 깨달음을 경험한 그러한 조주의 마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의 골수를 그대로 말한 것이다.

‘무(無)’는 있는 ‘무(無)’도 아니고 없는 ‘무(無)’도 아니다.

지옥, 천당, 선악, 유무, 시비 등등의 양변을 떠나서 있는 그러한 ‘무(無)’인 것이다.

즉, 언어로 생각하여서는 안 되는 ‘있다, 없다’ 를 떠난 자리라는 뜻이다.

이 공부는 하나를 알고 전체를 꿰뚫는 공부이다.

단계별로 하는 공부가 아니다.

공부의 계단이 없다.

처음에 막 들어가서 공부해 가면서 중생생각이 없어진다.

특별한 기법으로는 절대 안 된다.

언어(言語)는 거짓이며, 이 공부는 정직하기에 언어의 속임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언어는 도구로서 필요하기에 쓸 뿐이다.

그러나 언어에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상 언어은 본래 진면목(眞面目)을 모두 다 표현하기에는 불가능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로서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하기 때문에 상당부분에서 언어에 속고 있다.

즉, 의리선(義理禪)이나 문자선(文字禪)은 속아 넘어가는 공부이다.

선(禪)을 공부를 하면 아는 것이 없어진다.

그러면서 무심(無心)해지고 지혜가 번뜩거리며, 상황에 따라 매사에 잘 적응된다.

그래서 이 문중(門中)에 들어 올 때에는 아는 것을 놓으라고 하면서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莫存知解)로 표현한다.

‘네 안에 이미 신령스러운 빛이 있거늘 아는 것을 놓아라.’ 라고 한다.

선(禪)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삶의 전체를 중생심으로 스스로 구속하며 막아 버리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진다.

‘얻으려고 하는 그 마음이 중생심이구나!’ 라고 얼른 자각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급한 공부이다.

이것만 분명히 알고 있으면 부처는 그 자리에서 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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