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불교의 현실..박성배 교수(2)
허태기
view : 1777
“깨달음이란 곧 實踐하는 것” (2)
-그렇다면 한국 불교의 바른 역사전개를 위해 어떤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나는 1년간 고국에 머물면서 "중생불교(衆生佛敎)"의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중생불교는 과거 한국 불교의 전통인 "고승불교(高僧佛敎)"에 대한 반성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고승불교와 중생불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고승불교는 과거에 있던 고승들의 관념적 깨달음의 불교, 중생의 구체적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 행동이 없는 불교를 말합니다. 그러나 중생불교는 이웃을 동체(同體)로 알고 대비(大悲)를 실천하는 앞으로 "있을, 있어야 할" 불교입니다. 고승불교가 청산돼야 할 이유는 간단합니다. 중생이 고승을 존경하는 것은 중생이 못하는 "중생을 위한 일"을 고승이 온몸으로 하기를 바라는 뜻에서인데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존경에 대한 배신입니다. 이와는 달리 중생불교는 중생을 그대로 부처로 알고 모시는 불교이기 때문에 반드시 있어야 할 불교입니다. 중생이 그대로 부처란 말이 戱論이어서는 안됩니다. 고승불교는 말로만 중생이 부처라고 했지 실제로는 "중생" 이고 "남" 이었습니다]
-고승에 의한, 고승을 위한 고승불교를 중생에 의한, 중생을 위한 중생불교로 전환하기 위해 선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입니까?
[관념적 깨달음을 실천적 깨달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존재의 실상(實相)은 연기(緣起)이고 연기(緣起)는 동체이며 동체는 대비이고 대비는 바로 실천이고 행동입니다. 대비를 실천하자면 동체인 이웃의 고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산중에 독좌(獨坐)해서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현대 사회의 조직화 메카니즘은 중생을 구조적으로 억압하고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는 인간을 평등치 못하게 하고 공산주의는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조직이나 제도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그것에 대해 분명히 아니라고 말하고 고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잘못된 현실을 보고도 자비라는 이름으로 방관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죄악에 대한 봉사가 됩니다. 불교인들은 흔히 적극적인 행동을 중도(中道)정신에 어긋난다하여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중도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옳고 바른 것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中" 은 좌우의 가운데가 아닌 "正"입니다.
종단이 망하고 불교가 망해도 중생이 망하면 안된다. 이것이 불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중생불교의 이념은 여기에 있습니다.]
-사회적 구조악과 싸워 중생을 고통으로 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은 요즘 얘기되고 있는 민중불교(民衆彿敎)와 비슷한 논리인데 중생불교는 그것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한국에서의 민중이란 개념은 억압받고 빼앗기고 소외된 계층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중운동은 민중이 뭉쳐서 억압하고 빼앗는 계층과 투쟁하여 승리하자는 것입니다. 왜 투쟁해야 하느냐에 대한 이들의 대답은 "민중의 권익은 기득권자의 선심으로 확보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들의 이기적 탐욕으로 억압구조가 강화되기 때문" 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법은 갈등과 투쟁 뿐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로 사용되는 민중불교는 어느 일방을 증오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불교는 빼앗고 억압하는 사람조차 구제해야 할 중생이요 동체라고 인식합니다.
그들은 증오와 적개심의 대상이 아니라 자비로 구제해야 할 대상입니다. 여기서 자비란 반드시 관용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매를 들어야 하고 심하게 썩은 부분은 잘라내는 것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폭력도 자비란 말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