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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간화선 지침-크게 의심하면 곧 큰 깨달음이 있다.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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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크게 의심하면 곧 큰 깨달음이 있다.

즉, 궁구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밖을 향하던 의식이 안으로 향하면서 자신을 자각(自覺)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허물을 보고 있게 된다.

이것은 보려고 해서 보는 것이 아니고, 가려져서 부처 마음이 등져 있으니까 가려진 것이 걷어지면서 그 내면이 보여 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주작(做作)된 생각이 끊어지게 된다.

생각이 끊어지면 의심만 보게 되며, 또한 생각이 끊어질수록 의심은 점점 크게 된다.

이것이 궁구(窮究)이다.

깨달음을 기다리거나 뜻으로서 깨달음을 구하지 말라.

이것은 중생생각이다.

이것이 병통(病痛)이다.

‘유(有)와 무(無)’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아야 한다.

부처가 있다고 하는 유(有)에는 얼른 지나가고, 부처가 없는 무(無)에는 잠시도 머물지 말라.

공(空)이라고 하는 알음알이를 짓지 말라.

공(空)이라고 하는 자(者)는 공(空)인가? 아니면 공(空)이 아닌가?

여기에서 막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상대적인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때문이다.

번뇌 망상을 쓸어버린다는 생각도 하지 말라.

이것은 중생생각이다.

그냥 자각하기만 하면 된다.

조주의 ‘무(無)’ 자는 일체의 명근(冥根)을 끊는 칼이며, 일체를 열어주는 자물통이고, 일체를 쓸어버리는 쇠 빗자루이며, 나귀를 매어 두는 말뚝이라고 하겠다.

어떤 한 곳에 집중해서 위빠사나처럼 묶어 놓지 말라.

자신의 생각이 움직임 없이 집중하여 관하는 위빠사나처럼 묶이지 말라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자각만 하면 부처가 드러나고 망상(妄想)이 고개를 숙이는데, 왜 하필이면 자신의 생각을 한 곳에 집중하여 묶어 놓고 불성(佛性)을 가려서 드러나지 못하도록 막아 두는가?

이것이 어긋나는 불교 공부이다.

간화선은 묶인 곳을 풀어 주어서 삶이 잘 돌도록 순환시키고, 중생생각을 자각(自覺)하게 하여 불성(佛性)을 만나도록 이끌어 가는 공부이다.

공(空)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고, 터득하고 실현해야 할 대상이 아닌 대상이다.

이해하는 것은 곧 알음알이이다.

화를 내면서 화를 안 내는 마음을 모른다.

화를 내면 안 좋다고 하면서 화 안내는 마음은 모른다.

화 대신에 지혜를 써서 산다.

씀씀이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손으로 도둑질할 것이 아니라, 돈을 벌어서 남에게 주고 살아간다.

불교를 무조건 비우는 것이라고 하면 안 된다.

중생생각으로 비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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