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간화선 지침-법문(法門)을 들으면서 듣는 자신을 돌이키다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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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법문(法門)을 들으면서 듣는 자신을 돌이키다.
선(禪)은 알음알이나 궁리(窮理)하는 것이 아니다.
법문(法門)을 들으면서 듣는 자신을 돌이켜야 한다.
법문(法門)을 들으면 기억을 하게 되는데, 기억 자체는 흠이 아니지만, 그 법문이 자신의 마음에 닿아서 지혜로 바꿔지지 않으면 기억한 것이 오히려 짐이 된다.
자기 안에 이미 있는 마음이 무엇으로 가려져서 있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알아차리면 이미 있는 것이 드러나도록 되어있는 것이 불교 공부이다.
불교는 배워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에 부처가 있는데 법문(法門)을 들으면서 무엇이 나를 가리고 있는가를 궁구(窮究)하다 보니까, 가려진 것이 스스로 보여 지면서 즉시 나가 버린다.
이렇게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것이 바로 배워서 알게 된 지식이다.
이렇게 가려진 것을 스스로 보게 되면 자신의 안에 있는 부처가 드러나서 공부길이 바로 잡히게 된다.
그리하여 언하(言下)에 도(道)를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이 공부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서로 항상 만나보고 싶어 하듯이, 잠시도 놓치고 싶지 않고, 가까이 두고 싶은 열정이 가득할 때 성취의 길이 보인다.
그러나 놓아서 내려놓으면 본심(本心)의 불성(佛性)이 드러나서 걸림이 없게 되므로 자유롭게 된다.
한 스승으로부터 공부를 받아서 방황이 쉬면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귀하게 여겨지고,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스승과 같은 부처의 성품이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어른 스님들의 가르침에 지나치게 주눅 들려 있게 되면 또한 공부길이 막히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경시하면 아만(我慢)의 병통(病痛)에 빠진다.
붙들림 속에 있으면 몸도 있고, 마음도 있고, 부처도 있다. 그러나 붙들림 속에 있지 않으면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도, 부처도 아닌 형상(形相)에서 벗어난 실상(實相)을 증득하게 된다.
이것이 화두(話頭)이다.
그러니까, 붙들리지 않더라도 이 마음은 일어난다.
붙들리지 않았다고 해서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은 있는데 자신의 마음이 형상에 섞여 있지 않게 된 것이다.
즉, 물들지 않는 무념(無念)의 도리(道理)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려짐이 없고, 집착이 없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생각이 자신을 방해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성품은 ‘마음이 아니다.’라고 표현된다.
또한 몸은 더더욱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라고 들을 때에 마음이란 것 속에서 의식으로 ‘마음도 아니다.’ 라고 한다.
즉, 마음 속에서 ‘마음도 아니다.’ 라고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마음을 바로 알고 자각 속에서 ‘마음도 아니다.’ 라고 알면 바르게 한 것이다.
이렇듯이 깨달아 보면 여기서 자성(自性)이 드러난다.
자성이 드러나면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화두이다.
모든 공안(公案)이 여기서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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