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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간화선 지침-일원상(一圓相)의 도리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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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일원상(一圓相)의 도리

전강스님께서 안수정등(岸樹井藤)이야기를 ‘어찌 하겠는가?’ 화두 라고 하셨다.

마조스님께서 원을 그려 놓고 들어가도 한 방망이, 나가도 한 방망이의 일원상(一圓相)을 ‘어찌 하겠는가?’ 화두라고 하셨다.

위와 같은 화두에 주눅이 들려서 선불교(禪佛敎)에 붙들리지 말아야한다.

마음공부로 붙들림을 풀어 버린다.

생사(生死)는 이치로 깨쳐봐야 소용없다.

선문답(禪問答)의 불교에 빠져 있음이 현재 한국 불교의 병(病)을 점점 키우고 있다.

어떤 스님의 견성을 점검하기 위해 일원상을 그려 놓고 들어가도 한 방망이, 나가도 한 방망이인데 어찌 하겠는가? 했더니 그 스님께서 일원상을 손으로 확 지워버렸다.

‘이것도 없다.’ 라는 뜻이다.

다른 스님께서 ‘묻어라.’ 라고 하신다.

이 뜻은 죽어 버렸으니 못 깨달았다는 뜻이다.

그 스님이 일원상을 지웠을 때에 다른 스님이 그린 일원상의 도리를 안 것이다.

기록에서는 처음 깨쳤을 때에는 흥분, 벅참, 환희 등으로 자유자재(自由自在)함을 보이게 된다.

그런 후에는 위의 흥분, 벅참, 환희가 점차 가라앉으면서 평상시로 돌아가게 된다.

일원상(一圓相)이란 자신의 심성이 비어서 거침이 없고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줄을 알면 붙들림이 없어서 진짜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라는 것이다.

형상(形相)이 없고 중생생각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실상(實相)이다.

이것을 표현하길 일원상(一圓相)으로 나타낸다.

이것은 또 다르게 금강경의 도리(道理)로 나타내어진다.

이러한 일원상은 중생의 견해로 설명할 수 없는 심법(心法)을 뜻한다.

일원상(一圓相)에서는 부처나 조사도 살아나올 수 없다.

‘살불살조(殺佛殺祖)’란 단어도 또한 이와 같은 뜻이다.

중생심이 비켜 주어야지 불심(佛心)이 살아 나온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한다.

일원상에서는 부처도 못살고, 법(法)도 세워놓을 수 없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어 있다는 것이다.

빈 곳에 들어가서 살아서 툭 떨어져 버린다.

손대면 툭 끊어져 버린다.

일원상은 방편(方便)에 떨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몸이 있는 한, 이치적으로는 편안할지 모르겠으나 실제로는 편안 하지 않다.

죽을 때의 상황을 보면 몸 때문에 실제로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이 공부를 하면 이 몸이 편안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고통이 고통이 아닌 줄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중생은 이 고통의 끄달림에 들어가는 반면에 공부한 사람은 이 고통을 놓고 보게 된다.

고통을 놓고 보기 때문에 거기에서 혼란함을 벗어날 수 있다.

이러한 것이 다른 뿐이지, 색신(色身)은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색신(色身)인 이 몸은 불안정한 것이다.

처음 타고날 때부터 불안정하게 나온 것이다.

마치 부부사이에 문제가 없을 수가 없는 이치와도 같다.

문제가 있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간화선이 어렵다고 하는데, 간화선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몸을 가지고 세상을 살기 위해서 나온 이것이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바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몸을 갖고 세상을 편하게 살려고 나왔는데 이렇듯이 이러한 어려움 속에 살고 있다.

간화선 만이 이러한 어려운 것을 해결해 준다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함에도 간화선이 어렵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이렇게 잘못된 판단이 안 바뀌면 선문답(禪問答)의 의리선(義理禪)에 빠진 것이다.

인생을 살려고 나온 이 몸이 불완전하고 모순이고 윤회 속에 있으며, 그곳에는 높고 낮고 상대적 견해도 소용이 없다.

바로 이와 같은 것을 해결해 주려고 하는 것이 간화선이다.

그러하기에 간화선은 우리의 삶의 커다란 영역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것이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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