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간화선 지침-도리(道理)를 알고 화두를 해야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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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도리(道理)를 알고 화두를 해야
이 공부는 사람 속에 있는 법(法)을 쓰는 공부이다.
펄펄 끓는 번뇌망상이 지혜로 바뀌어져야 법(法)이지, 이러한 번뇌망상과 중생심을 떠나서 다른 어떤 어록(語錄)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도피는 불법(佛法)이 아니다.
번뇌속에서도 물이 안 들어야 공부이고, 번뇌 속에서 법(法)이 나와야 바른 법(法)이다.
현재 우리나라 선불교(禪佛敎)는 알음알이 불교이며, 지키는 불교로서 화두심(話頭心)이 약하다.
현실 속에 법(法)이 있으니, 경계(境界)속에서 경계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
믿음으로 앉아서 마음을 관찰하여 화두를 바로 잡고 앉아야 한다.
중생생각이 끊어지지 아니하면 돌로 눌러 놓은 풀에 의지하고, 나뭇가지에 붙은 도깨비에 의지할 뿐이다.
이 공부는 믿음의 방향을 잡아서 드러내는 공부이다.
드러나서 갖추고 있는 모든 것이 모두 지혜로 바뀌어진다.
이렇게 지혜로 바뀐다는 뜻은 삼독인 탐진치(貪瞋癡)가 계정혜(戒定慧)로 바뀌고, 육적(六賊)인 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가 육바라밀(六波羅密)로 바뀌면서 좋은 일이 자꾸 생긴다.
우리 안에 있는 중생의 경계가 끊어져서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는 본래 주인이 작용하면 저절로 공부가 순조로워진다.
‘유, 무’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며, 비어서 없다는 알음알이도 짓지 말며, 쇠로 만든 비로 번뇌 망상을 모두 쓸어버린다고 하면 안 되고, 또한 비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 바뀌어 지는 것이다.
양변(兩邊)을 떠나지 않고, 양변에 있되, 양변에 물들지 않고,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바른 믿음이다.
또한 문득 환희심을 내지 말며, 잘 되든지, 잘 못되든지, 내버려 두고, 잘됨과 안 됨이 따로 없으니 무의식계(無意識界)인 것이다.
의식(意識)에 붙들려서 정직하지 못하면 이 공부는 본래와 등지게 되고 먼 밖의 일이다.
얼른 자각하면 중생심을 떠나게 된다.
여기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이 솟아 나온다.
안될 때에도 부처가 있고, 잘될 때에도 부처가 작용하니, 잘되고 안 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양변(兩邊)에 붙들려서 휘둘리지 말라.
중생생각으로 ‘무(無)’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모르는 곳에 불성(佛性)이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불성이 없다고 한다면, 조주란 불성을 어떻게 경험한 것이길래 ‘무(無)’라고 했을까?
이렇게 지어가다 보면 내 생각이 떠나게 된다.
이렇게 된 상태를 ‘어째서’라고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째서’이지만 나중에는 ‘무(無)’ 해 버린다.
능히 마음을 잘 써서 홀연히 ‘정(定)’에 들게 될 때에는 ‘정(定)’을 탐하여 ‘화두’를 잊어서는 안 된다.
화두가 잘 되게 되면 공부가 거의 끝나는 경지에 이른다.
부처가 되는 경험에 곧 다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처의 경험에 다다른 사람은 화두를 하고 있다는 생각조차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도리(道理)를 알고 화두를 해야 한다.
따라서 현재에는 화두를 바로 해 가려고 노력하는 중에 있는 것이지, 화두가 잘 된다고 하는 말은 거짓이다.
화두는 잘 되거나, 안 되는 그러한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두라는 것은 그대로 조주 ‘무(無)’자를 말하는 것인데, 간화선은 부처가 경험한 것을 바로 막 들어가는 공부이다.
따라서 화두(話頭)라는 것은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하듯이
‘응무소주 이생기심’ 이며,
‘아라한이 아라한이라고 하면 이미 아라한이 아니다’ 이고,‘보살이 중생을 건졌다고 하면 이미 보살이 아니다’ 이고,
‘보시하고 나서 보시했다고 하면 이미 공덕이 없다.’ 라는 도리와 같이 무주(無住)와 무심(無心)을 체득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공부가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를 꿰면 모두가 꿰어지는 것이 이 공부이다.
이 공부는 ‘되고, 안 되고’ 의 문제가 아니라 공(功)을 들여야 하는 도리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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