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간화선 지침-부처가 항상 함께 따라 다닌다.
김창엽
view : 1639
48. 부처가 항상 함께 따라 다닌다.
남악스님이 마조스님에게 일러준 게송 중에서 땅 속에 있는 씨앗은 비가 오고, 적셔져서 때가 되면 싹이 저절로 나온다. 라고 하신 말씀이 있다.
이 공부를 경험해 놓으면 저절로 변화가 오게 되어 있고, 방해를 받더라도 저절로 성취되게 되어 있다.
마치 물이 흐르다가 막혀서 차게 되면 다시 골짜기로 흘러내리듯이 물의 흐름이 계속 이루어서 변화가 다가온다.
물이 흐르다가 막히듯이 공부 과정에도 방해와 장애 요인이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끝나서 정지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막힌 물이 차게 되면 다시 넘쳐흐르듯이 때가 되면 저절로 이루어진다.
고통은 있지만 반드시 공부한 만큼의 싹은 나온다.
이것으로 인해서 공부가 가속(加速)되는 역할도 있다.
완산스님께서 만약 그렇지 못하면 어찌 법(法)그릇을 이루리오!
마땅히 성인(聖人)들의 본보기를 잘 살필지언정 결코 엉뚱하고 출처(出處)가 애매하면서 지혜와 방향이 없는 말에 이끌리어 자신이 막히도록 하지 말라.
그래야 속에서 싹이 벌어져서 성품(性品)이 드러난다.
외로움이란 어떤 마음에 붙들려서 허전할 때 다가오게 된다.
이 공부는 붙들림을 놓아 버리기 때문에 외로움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렇기에 몸과 마음이 홀가분해지며, 무슨 마음이든지 부처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반복할 때 자신이 익혀온 훈습(薰習)이 ‘무슨 마음이든지 부처와 함께 있음’ 이라는 사실에 숨이 죽어서 자신을 괴롭히던 마음이 자신에게 보여지면서 드러난다.
자신을 괴롭히는 마음을 없애려고 하면 더욱 치성하게 드러난다.
자신의 성품에는 본래로 자신을 괴롭히는 마음이 없는데, 헛것에 붙들려서 그것을 없애려고 하고 집착하게 된다.
자신을 괴롭히는 마음을 모를 때에는 그렇게 없애려고 집착하지만, 그 마음을 알게 되면 괴롭히는 마음이 ‘살아 있기에 일어나는구나!’ 라고 하면서 자각(自覺)을 하게 된다.
마치 구름이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지듯이 한다.
이러한 사실을 가지고 ‘어디서 왔는가?’ ‘왜 이러한가?’ ‘남이 그렇게 해서 그렇지!’ 등등의 생각으로 지어서 붙들리니까 헛것에 억매이게 된다.
‘무슨 마음이든지 항상 부처와 떨어져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던데!’ 라고 암송한다.
‘이러한 번뇌망상을 끊고 있는 곳에 부처가 있다는데!’ 라고 궁구(窮究)하고 참구(參究)하는 것이 올바른 참선(參禪)이다.
자신이 듣고 아는 대로 이 공부를 하려고 하니까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이 공부를 잘 성취하려면 자신과 함께 있는 부처를 믿음으로 대(對)하여야 한다.
즉, 바깥의 지식으로는 안 되고, 자신의 안에 확실히 부처가 있다고 믿어야 된다.
신심(信心) 분심(憤心) 발심(發心)에서 신심이 최우선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한 말 중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곧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이와 같이 모든 철학도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잠잘 때에는 부처와 함께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잠에서 깨어 일어날 때에는 부처를 깨워서 함께 일어난다.
부처가 있는 곳을 알고자 하거든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곳을 보아라.
마음 가는 곳에 부처가 항상 함께 따라 다닌다.
이것이 깨달은 사람들의 말이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위와 같은 믿음을 머리로 헤아리려고 하거나, 불교를 대상으로 갖고 다니려고 하기에 이 공부가 어긋난다.
불교를 바깥에서 가져오지 말고, 이미 자신의 안에 있음을 믿어야 한다.
따라서 잘못 접근하는 불교를 내려놓고, 자신과 함께 있는 불교를 믿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각(自覺)이 필요하다.
이것이 참구(參究)하여 참선(參禪)을 해야 한다.
이러한 부처의 마음에는 모든 공덕(功德)이 갖추어져 있기에 모든 일이 쉽게 풀리게 된다.
그래서 나날이 변화가 생긴다.
이렇게 정진(精進)해가는 길이 ‘선(禪)’이다.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