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의 날 소고
허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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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날을 맞이하여
11월 1일,
오늘이 제24회 詩의 날이라고 한다.
나는 명색이 詩人이랍시고 오늘이 詩의 날인지 조차 몰랐다. 가산 시인의 말씀을 듣고 그런 날이 있는 줄 알았고 그런 행사가 있는 줄 알았다. 육당 최남선이 신문관(新文館)을 세우고, 1901년 11월 1일 종합 월간지 '소년'을 창간하면서, 창간호에 최초의 신체시(新體詩)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시점을 한국 현대시의 출발선이라고 보고 이 날을 기념하여 <시의 날>로 선포하고 매년 기념식을 갖는다고 한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가을 단풍을 머리에 인 남산자락에 자리잡은 문학의 집, 서울 중앙홀에서 적당한 수의 문인들이 모여 가을 정취와 더불어 오붓하게 시의 축제를 즐겼다. 행사를 마치고 조금 내려오다가 땅거미 짙어가는 시간, 벤치가 있는 길가에서 우연히 모인 문인들과 함께 즉석 뒷풀이가 벌어졌다.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 아무런 격의없이 시를 낭송하고 가곡을 부르고 어깨춤을 추면서 남녀노소와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어울림의 한 마당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이렇게 순수로 빛을 발하니 이 또한 시인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여럿이 하나로 즐김을 누리는 순간이었다. 흐름과 멈춤이 조화를 이룰 때 아름다운 것처럼 양식있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모임도 흩어짐도 자연스러웠다.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마무리 짓는 절제의 미덕과 아우러 발길을 옮겼다.
내가 시인으로 등단한 일도 그리 오래지 않다.
한 2년전 쯤 되는지 모르겠다.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나 나의 시를 본 몇 군데의 문학지로부터 시인으로 등단하라는 권유와 함께 원고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친구에게 내 심정을 얘기했더니 그 친구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서 권유하는 시인과 만나보았다. 그 분은 공무원시절 공무원 동인지에 시인으로 오래전에 등단하였으나 자기도 새로이 한국문인에 등단하였다고 하면서 자기를 믿고 원고를 내어 보라고해서 등단한 것이 사단법인 새한국문학회의 한국문인지인 것이다. 등단식이 있는 그날 그 사람의 차에 동승하여 황금찬시인을 모시고 시상식 행사에 간 관계로 그 날부터 황금찬선생님과 인연이 된 셈이다.
이후 가끔 행사 때마다 황선생님과 동행하면서 구면이 된 것이다.
내가 황금찬 시인을 언급하는 것은 한국문단의 시인 중 가장 연세가 많은 분(93세)으로 원로중의 원로이시기 때문이다. 서정주 시인을 비롯하여 그분과 같이 활동하던 분들은 이미 고인이 되셨고 황선생님만이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활동을 계속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황선생님은 아직도 수백편의 시를 암송하고 계시며 그 분의 시낭송은 지금도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저리게 하는 감동을 준다. 그렇게 연로한 나이에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시는 시인이 계신다는 것은 우리문인들의 자랑이며 표상인 것이다. 특히 김소월시인이 러시아 문학협회에서 세계의 3대시인으로 공인받게 된 것은 황금찬선생님의 공이 큰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훌륭한 분이 우리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시인들에게는 크다란 위안이 되는 것이다.
시인은 맑은 영혼의 울림이자 매개자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맑게 하고 한없는 기쁨과 함께 사람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주고 메마른 현실에서도 희망을 갖게하는 언어의 마술사이다. 내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십수년전의 일이다. 당시에 주변의 권유로 군에 관한 시를 써서 국방일보에 공모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그해 국군의 날을 앞둔 시점에 시를 써서 국방부 정훈부로 보냈더니 국군의 날을 기해 나의 시가 문학박사이자 문인협회장인 모인사의 시와 함께 나란히 실린 것이었다. 당시 국방일보로부터 원고료 대신 국방부장관의 손목시계를 받은 것이 고작이었다. 그 때 쓴 시제가 '전선에 핀 들꽃'이다. 이후에도 현충일 행사에 즈음하여 또 다른 나의 시가 국방일보에 게재되기도 하였다.
이 시를 어느 원로시인님이 읽고 감동하였다고 하면서 국방부와 재향군인회 등, 백방으로 나의 거처를 수소문하다가 동사무소와 연락이 닿아 당시 동사무소 직원이 직접 나에게 전화하여 이런 사실을 알려주면서 전화를 연결해도 좋겠느냐고 하기에 승낙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그분과 통화하고 따로 날자와 장소를 잡아 만나뵈었더니 70 노인으로 체격이 크고 외모가 단아한 노신사 분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육군대령으로 예편한 분으로써 육이오 전쟁시 백마고지 전투에서 초급장교로 참전하신 분으로 나의 글을 읽고 옛날 생각이 나서 꼭 한번 나를 만나보고 싶었다고 하셨다. 한편의 시가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으로 알았다. 언젠가는 이 시를 관광버스안에서 낭독하였더니 마침 그자리에 있는 분 중에서 강원도 화천이 고향인 분이 계셨는데 화천에서는 1년에 한번 화천군행사로서 '비목'(한명희작사)의 시행사가 있는데 군수명의로 초청토록 하겠으니 그 때 나의 시를 낭독해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원로시인님으로부터 등단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당시 나의 건강이 너무 좋지 않은 관계로
등단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없었기에 나중에 건강이 좋아지면 시집이나 내겠다고 하면서 등단을 사양했던 것이다. 사실 등단이고 뭐고 몸이 아파 만사가 귀찮을 지경인데 그런 일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2~3년 전에 시집을 낼만한 시가 모인 것 같기에 책을 내어볼 생각을 하니 아무래도 등단이란 문패를 다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등단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도 실은 시집을 내지 못하고 망서리고 있는 중이다.
내가 시인으로 자랑스럽고 보람을 느끼는 것은 내 글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사람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내가 쓴 단 몇 줄의 글이 타인의 가슴을 눈물로 적셔준다는 사실이 이외였고 그러한 일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희망을 준다는 것이 내겐 큰 용기와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다. 간혹 어떤 분은 내 카페에서 나의 글을 읽고 고맙다는 사례로 그 지역의 특산물을 손수 만들어 소포로 보내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어쩌면 詩는 그윽한 한송이의 향기로운 꽃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고귀한 詩와 詩人을 흉내낼 수 있는 내 자신이 가끔은 대견스러울 때가 있기도 했다.
새로운 한달이 시작되는 오늘이 마침 詩의 날이고, 선배시인의 연락으로 처음으로 이러한 행사에 참여하여 느낀 소회가 있어 이런 글을 써보는 것이다. 시인은 영원히 詩人이지 詩家가 될 수 없기에 경제적으로는 늘 가난하면서도 마음만은 청명한 가을 밤에 떠있는 보름달처럼 넉넉하고 여유로운 것이다.
詩人 ! 그는 영혼의 아름다운 노스탤지어이며 영원한 방랑자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詩人의 삶이 좋다.
겉으로 가진 것은 없지만 안으로는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한없이 맑고 향기로운 사유의 세계가 나를 반기고 있기 때문이다.
詩의 날을 맞이하여 모처럼 가을 객기를 부려본다. 별이 빛나는 한 밤에......
[2010년 11월 1일 청강 허태기/지우 포교사]
늦게나마 시인의 날을 축하 합니다.시인으로, 포교사로 맑고 향기로운 삶을 살아가시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항상 건강하시고 좋은글 많이 올려 주세요. 철우_()_ 2010-11-02 1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