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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한 지성, 이어령 2

허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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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 탄식, 고통, 절망

 

부처님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분해하여 설명한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몸과 마음을 다섯무더기로 나누었을 때 나(), 내것, 고정된 자아. 불변하는 영혼이 있을 수 없고 다만 오온의 상호작용으로서만 존재하는 임시적인 나’, ‘일시적인 나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나를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또 집착하고 살아 갈 때 모든 고통이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현상이 변하기 때문에 무상하고, ‘고통스럽고 무아인 것을 아는 것이 불교적 지혜이다.

 

이처럼 불교적 지혜로 보면 자아, 영혼, 이 세상, 이 우주, 초월적 존재, 창조주 등 모든 이름 붙여진 것들은 모두 개념으로 보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불교적 세상은 철저하게 자신이 주체가 되어 바라 보는 세상을 말한다. 그런 세상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강조 하였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세상의 일어남인가?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 혀와 맛을 조건으로 …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 마노와 법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생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세상의 일어남이다.

(S35:107, 상윳따니까야 세상경)

 

 

사람들은 삶의 과정에서 근심하고 때로는 탄식하고 비통해 한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부처님은 이 모든 원인을 무명갈애때문이라 본것이다.

 

 

궁극적 행복이란

 

지금 육체적, 정신적고통을 받고 있다면 과거의 요인때문이다. 그 것의 가장 큰 원인을 무명으로 보고 있다. 단지 몰라서, 지혜가 없어서 과거에 저지른 행위에 대한 과보를 그 업의 계승자인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이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이 해결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적 고통, 육체적 고통, 근심, 탄식, 비탄, 절망으로 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자기자신을 객체로 보는 사람들은 신에게 의지하겠지만 자기자신을 주체로 보는 사람들은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갈애는 미래의 고통, 근심, 걱정, 비탄, 절망, 탄식의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생이 고통을 격을 수밖에 없고, 끊임 없이 윤회 할 수밖에 없는 요인을 무명갈애로 본 것이다.

 

부처님은 무명과 갈애만 제거하면 궁극적 행복에 이르는 길로 갈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 궁극적 행복이 닙바나(열반)’이다. 닙바나란 악업은 물론 선업도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때 성취된다. 여기서 '선업을 짓지 않는다'는 뜻은 '댓가를 바라며 선행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업을 짓지 않고 죽었을 때 마음을 일으킬 수 없는 대상이 없어서 더 이상 재생(再生)할 수 있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 태어남이 없는 것을 말한다.

 

태어남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객관적인 기세간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이상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 인식할 수 없다면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이 세상이 있어서 내가 태어 났고, 또 내가 태어 나기 이전에도 세상은 있었던 것이다라는 그런 세상이 아닌 것이다.

 

더 이상 마음이 일어 나지 않으면 이 세상, 이 우주도 만들어 지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소멸과 함께 모든 것이 소멸된다. 그런 상태가 닙바나인데 불교가 추구 하는 궁극적인 목표이자 궁극적 행복이다.

 

 

나약한 지성

 

누구나 삶의 과정에 있어서 문제는 계속 발생되고 그에 따라 근심, 탄식, 비탄, 고통을 겪는다. 이런 때 가장 일반적인 탈출 방법은 신에게 떠 넘기기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스스로 주인임을 포기하고 이 세상을 객체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에서 이 세상과 우주를 주체적으로 본다면 탄식, 비탄, 절망,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도 달라지게 된다.

 

지성의 상징 이어령 전장관은  수 많은 지식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딸의 시련과 그에 따른 기도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가 불교적 지혜가 있었다면 스스로 삶의 주인임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신에게 떠 넘기는 나약한 지성이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을 것이다.

 

 

2010-11-14

진흙 속의 연꽃

 

진흙 속의 연꽃 - 이 고뇌의 강을 건너 

http://blog.daum.net/bolee591

 

한국불교개혁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

 

  • 서용칠 흔히 누구에게나 일어날수있는일을 시절인연으로 만난것을 큰 감동으로 받아들인것뿐이다 2010-11-19 10:08 댓글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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