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의 선구자들,그리운 법정스님,김수환 추기경,강원용 목사.
강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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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요동치는 역사의 굽이에서 나라와 민족의 앞길을 보여주고 선두에서 걸어가는 인물을 선각자 혹은 선구자라고 부른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암울했던 독립운동기에도 우리에겐 그런 선구자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되었다. 하지만 광복과 분단으로 시작된 지난 66년의 한국 현대사는 수다한 시련과 우여곡절을 거듭해 온 고난의 행군으로 지금도 우리의 꿈과 힘을 모아 민족공동체 건설을 달성하겠다는 대행진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우리들에게 일상적 말씀과 몸가짐으로 공동체의 논리와 윤리가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었던 우리 시대의 선구자들 가운데서 강원용 목사, 김수환 추기경, 그리고 법정 스님 세 어른을 특별히 기억하는 것은 그들이 서로 다른 종교의 지도자였지만 지극히 공통된 가르침을 전파하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5년 사이에 연이어 세상을 떠나신 세 어른들을 많은 국민이 그리워하는 것은 그들이 지닌 공통의 성격, 특히 추상의 세계보다는 구체적 현실을 중시하며 항상 국민과 함께 어려운 문제를 풀어가려는 인간적 따뜻함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렵고 추상적인 교리나 법리보다는 항시 국민과 이웃이 당면한 오늘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속한 기독교, 천주교, 불교는 한 가지로 보편적 진리를 핵심으로 한 종교로서 인류 즉 지구촌 모든 가족의 삶과 죽음을 상대하고 있지만 강원용, 김수환, 법정 세 어른은 언제나 한국적 특수성에 깊이 뿌리를 내린 민족적 지도자들이었기에 국민들과의 끈끈한 일체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 한국은 지난 반세기에 걸쳐 국민의 땀과 눈물에 힘입어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취할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치른 희생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서도 분노보다는 관용을, 대결보다는 대화를 추구하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섰던 세 어른들의 공(功)은 결코 가볍게 넘겨버릴 수 없다. 이들이 끈질기게 사회적 화합과 정의를 강조한 것은 바로 이들이 공유한 인간과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철학의 산물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세 분에게 하나님과 부처님의 위치가 얼마나 절대적인 것이었는지는 감히 우리가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사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는 언제나 인간이 그 중심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 자비, 믿음을 가지고 그 인간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가꾸어가는 데 혼신의 노력을 집중하도록 강력히 설파하였던 것이다. 첫째로,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상호 신뢰하며 충분한 대화를 통해 공동의 규범을 만들고 함께 번영할 수 있다는, 특히 우리 한민족은 충분히 그러한 민족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을 앞장서 전파하였다. 둘째로, 인간은 예외 없이 한계를 지닌 존재이므로 서로 간의 관용과 아량을 통해 공동체의 화합이 유지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지금 우리 정치는 여야 대결이 내부분열과 겹쳐져 문자 그대로 사분오열의 양상을 띠고 있다. 이러한 정치권의 분열이 우리 사회 전반의 파편화로 이어지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아마 세 어른도 저세상에서 같은 걱정을 하고 계시리라. 못내 우리 곁에 안 계신 것이 아쉬울 뿐이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
정치인 정동영은 집권당 대통령 후보를 지냈고 지금은 제1야당 최고위원이다. 그의 성장에는 ‘언론’이란 두 글자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메인 뉴스 앵커(main news anchor)를 지낸 스타 방송기자 출신이다. TV가 없다면 그의 출마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언론이 그를 국민 속에 심어주었고, 정치인으로 키워냈다. 언론은 그의 은인이다. 그가 은혜를 갚는 길은 언론인 출신답게 행동하는 것이다. 누구보다 진실과 논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거꾸로 간다. 다른 분야 출신보다 더 심하게 진실과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
6·15 남북정상회담 11주년인 지난달 15일, 그는 라디오 인터뷰에서 “(정부가) 천안함 사건의 과학적 설명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부분에 대해서 북한 아니면 할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태도는 우격다짐”이라고 주장했다. 천안함 사건은 북한 어뢰 잔해가 발견됐고, 선진국이 참여한 국제조사단이 결론을 내렸으며, 선진국 의회 모두가 이를 인정했다. 그런데 정작 피해국의 통일부 장관과 대통령 후보를 지낸 사람이 “과학적 설명에 실패”를 외치고 있다.
지난해 11월 말 시국대담에서 그는 연평도 사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연평도를 포격한 그 포탄 속에는 상대방을 죽이려는 증오와 적개가 서려 있지 않는가. 또 정당방위였지만 거기에 대해 응사한 것 역시 증오심이 묻어 있다.” 아니 그렇다면 1950년 6월 북한의 남침이나 남한의 반격이나 모두 똑같은 증오란 말인가. 20년 가까이 기자를 한 사람이 도발의 증오와 응징의 분개심도 구분하지 못하나. 그는 마치 주사파 선배 밑에서 ‘남북화해론’을 공부하는 운동권 신입생 같다.
강희남 목사는 이적단체 범민련의 초대의장을 지낸 골수 종북(從北)주의자다. 그는 ‘김일성 영생(永生)론’과 김정일의 선군정치를 옹호했다. 그는 2009년 6월 유서에서 “살인마 리명박”에 대한 민란을 선동하며 자살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정동영 의원은 “불의 앞에 불꽃같이 살다 가신 분”이라고 칭송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통일부 장관 시절 그는 김정일에 대해 “통 큰 지도자라고 밑에서 얘기” “국제정세에 관심이 높고 정통”이라고 묘사했다. 2007년 저서에서는 “대단히 시원시원하고 결단력을 갖춘 인상”이라고 예찬했다. 그의 말대로 김정일은 ‘통 크고 시원시원하게’ 어뢰로 46명을 죽였다.
손학규 대표가 최근 민주당 내 ‘종북진보’ 흐름을 경고했다. 늦었지만 올바른 문제 제기다. 그런데 정동영 최고위원은 당내에는 햇볕정책만 있을 뿐 종북진보는 없다는 취지로 반박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종북진보의 증거다. 살인자 북한보다 피해자 남한을 다그치고, 도발자 북한의 증오와 반격자 남한의 분개심이 같다고 하는 게 종북이 아니면 뭐가 종북인가. 골수 종북주의자를 의인(義人)으로 치켜세우고, 긴장 속에서 의연히 다뤄야 할 북한 독재자를 공개적으로 칭송하는 게 종북이 아니란 말인가.
더욱 심각한 건 일탈(逸脫)이 그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였던 지도자가 그러니 다른 일탈이 이어져도 당이 제대로 규탄할 수가 없다. 당이 추천한 천안함 조사위원이 ‘좌초설’을 주장하고, 헌법재판관 후보가 ‘직접 보지 못해 천안함 폭침을 믿을 수 없다’고 해도 이를 꾸짖는 목소리가 당에는 없다.
정동영 최고위원은 진실의 낙오자다. 진실의 바위에서 이렇게 미끄러지는 사람이 통일부 장관이 되고 대통령 후보가 됐다. 정동영은 과거 자신이 보도했던 뉴스테이프를 다시 봐야 한다. 자신에게도 한때는 진실을 추구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권력으로 가도 언론인은 언론인이어야 한다. 언론의 자력(磁力)을 벗어나선 안 된다. 언론인 출신은 다른 이에 앞서 진실의 개척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개척자는 못될망정 낙오자여서야 되겠는가.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2011-07-04 0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