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건국투쟁
허태기
view : 2118
이승만의 건국투쟁
어수룩한 미국과 영리한 이승만
이승만은 워싱턴D.C.에서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듣자마자 귀국을 서둘렀다. 그러나 애치슨이 이끄는 미국무성은 그가 미국시민이 아니라는 핑계로 여행증을 금방 발급해 주지 않았다. 국무성 관리들은 이승만이 1940년 이래 국무성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라고 요구했고 또 말로나 글로써 기회 있을 때마다 소련을 비방해왔기 때문에 그를 맹목적인 반공․반소 주의자로 낙인찍고 있었다. 한미디로 골치 아픈 존재였다.
당시 미국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미국의 동맹이었던 소련을 중시하여 전후 한국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반드시 소련과 협의하여 처리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승만의 반공․ 반소 노선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국무성은 이 승만이 한국에 돌아가면 미국의 대한정책 실천에 방해요소가 될 것을 우려했다. 이것이 바로 미국정부가 그에게 여행증을 속히 내주지 않은 이유였다.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던 이승만은 하는 수 없이 1945년 7월부터 편지로 인연을 맺은 미태평양지구 총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장군에게 부탁하여 맥아더가 마련해준 미군용기 편으로 뒤늦게 서울에 도착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33년에 걸친 미국망명 생활을 마감하고, 해방 2개월 후인 10월 16일에야 비로소 71세의 노구를 이끌고 귀국할 수 있었다.
서울에 도착한 다음에도 이승만은 2년 이상 미 국무성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미군정의 총책임자 하지(John R. Hodge) 중장과 ‘견원지간’의 관계로 사사건건 충돌했다. 요컨대 이승만은 1947년 9월까지 미국정부의 지지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의 대한정책을 비판하면서 건국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소련의 야욕 간파한 이승만
이승만은 1945년 10월 25일에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 이하 ‘독촉협’)라는 범민족적 정치단체를 조직하고 그 단체의 총재로서 건국운동을 이끌었다. ‘촉성’이란 ‘빨리 이룬다'라는 뜻이다. 그는 독촉협을 가동함으로써 ‘카이로 선언’에서 연합국 수뇌들이 약속한 ‘적당한 기간을 거친 다음에' 한국을 독립시켜준다는 강대국의 일방적인 계획을 무산시키고 한국민 스스로의 힘으로 하루 빨리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고 서둘렀던 것이다.
그는 한국민이 일치단결하면 이것이 가능하다고 믿었고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라는 구호 아래 좌․ 우익의 정파들이 이데올로기적 장벽을 초월하여 모두 자기 밑에 결속할 것을 호소했다. 그 결과 고하 송진우, 인촌 김성수 등의 한국민주당과 대부분의 우익 정당들이 독촉협에 가담했으며 심지어 해방직후 재건된 조선공산당(나중에 남로당)도 한때 독촉협에 참여했었다.
그러나 얼마 후 공산당이 독촉협을 탈퇴하면서 독촉협은 순수 우익단체가 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1946년 초부터 남한의 우익세력을 총망라한 최고 지도자로서 김구 와 함께 미국과 소련이 획책하는 신탁통치안을 배격하고 ‘자율적으로' 통일독립국가를 건설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후 미․소는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상회의를 통해 한국에 5년간 4대국(미․소․영․중)의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르면, 신탁통치를 실시하기에 앞서 우선 한반도에 주둔한 미․소 양군의 대표자들로써 미소공동위원회(The US-USSR Joint Commission, 이하 ‘미 ․소공위)를 구성하고, 이 위원회가 신탁통치에 필요한 자문기구로서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the 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를 조직하게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1946년 3월부터 5월까지 서울 덕수궁에서 제1차 미.소공위 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이 회의에서 미․소 대표들은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에 참여시킬 한국인 정당들의 자격기준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 논쟁을 벌인 끝에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5월 16일에 무기 휴회를 선언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미국과 소련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했던 신탁통치 계획에 중대한 차질이 빚어졌던 것이다.
정읍의 단독정부 발언 이전에 이미 북한정권 수립
이승만은 처음부터 신탁통치안에 반대했고 또 미․소공위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을 예상했지만 제1차 미소공위 회의를 방해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 귀추를 관망하던 차에 예상대로 그 회의가 결렬되자 미․소 합의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46년 6월 3일의 정읍발언을 한 것이다.
이를 놓고 좌익들은 이 ‘정읍 발언'을 꼬집어 이승만에게 남북분단 고착화의 책임이 있다고 뒤집어 씌운다. 이들은 이승만이 자기의 정치적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주창하였고 이어서 미국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결국 남한이 북한보다 먼저 건국하자는 의지를 밝혔기 때문에 분단이 고착되었다는 것이다.
최근에 소련이 붕괴한 다음 1993년에 공개된 소련의 한 비밀문서(전보문)에 의하면, 소련 수상 스탈린(Joseph Stalin)은 1945년 9월 20일 시베리아 연해주의 군관구및 제25군 군사평의회 앞으로 38선 이북 한반도지역에 ‘부르조아 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 전보문은 해방 후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문서다.
그것을 분석해 보면, 스탈린은 해방 후 1개월 남짓 지난 시점 즉, 이승만이 서울에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최고 사령관에게 미국과의 협상 결과를 기다리지 말고 38선 이북에 친소정권을 수립하라고 지시했음을 알 수 있다. 스탈린이 왜 하필 그 시점에 그러한 조치를 취했느냐 하면, 원래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 1주일 전, 즉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2일째 되는 날에 대일선전 포고를 하고 그 후 1주일 동안 ‘이미 전의를 상실한 일본’과 전쟁을 한 끝에 38선 이북의 한국 땅을 점령했던 것이다. 스탈린은 소련이 일본에 대한 승전국이라는 근거로 종전 후 한반도의 북반부뿐만 아니라 일본의 북반부까지도 점령하기를 기대했다.
스탈린의 이러한 야망은 9월 12일부터 10월 2일 까지 런던에서 개최된 전후 최초의 승전국 외상회의에서 표출되었다. 즉, 런던 외상회의에서 소련 외상 몰로토프(M. Molotov)는 미-영 외상들에게 소련이 ‘일본 점령’에 참여할 권리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 국무장관 번즈(James F. Byrnes)는 이 요구를 일축해버렸다. 그 결과 스탈린이 원했던 소련의 일본 점령계획은 좌절되었다.
런던 외상회의에서 이 같은 좌절을 경험한 스탈린은 미국과의 협조를 포기하고 한반도의 북반부만이라도 확실히 장악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바로 그 동기에서 연해주 군관구 및 25군 군사평의회에 앞서 소개한 전보문을 발송했다. 제1차 미․소공위 회의가 왜 공전 했는지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후 북한의 사정은 다음과 같이 변했다. 1946년 2월 8일 평양에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내세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행정기구가 발족되었다. 이것이 바로 스탈린이 원했던 북한의 친소정권이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것은 이 기구의 실체를 위장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붙인 명칭이고 사실은 북한의 단독정권이었다. 소련은 동구라파에서 위성국가를 만들 때 그것을 처음에는 ‘임시인민위원회'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정부로 고쳐 불렀다. 마찬가지로 38선 이북에도 사실상의 친소정권을 만들어 놓고 얼핏 보기에 정권이 아닌 ‘임시인민위원회'라는 완곡어(euphemism)을 사용한 것이다.
또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북한에 수립된 사실상의 단독정권이었음은 1946년 2월 김일성 위원장의 이름으로 발표되고 강행된 20개조의 개혁조항 안에 토지개혁, 산업국유화, 주민사상 개조운동, 경제계획 수립 등이 포함되어 있었던 사실로써 증명된다. 즉, 북 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강력한 정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토지개혁 등을 입안, 실행했으며, 당시 북한 지역에서는 “임시인민위원회는 우리의 정부이다.”라고 노골적으로 선전했다.
북조선임시위원회는 사실상의 정부였고, 그 시점이 1946년 2월이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그 시점은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된 1948년 8월 15일보다 2년 반 전이고,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 나오기 4개월 전인 것이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한반도 분단 고착화의 원흉은 이승만이 아니라 소련과 김일성정권이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우리는 잠깐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좌파들은 해방 후 미국이 한국을 자국의 식민지로 만들 의도로 남한에 미군을 주둔시키면서 군사기지를 구축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미국정부는 대체로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국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본만 장악하고 있으면 되지 한반도까지 탐낼 필요가 없다는 입장에 서 있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깝지도 않고 역사적으로도 한국에 이해관계가 적은 나라일 뿐만 아니라 해방 후 남한에 미군을 주둔시켜 보니 경비가 막대하게 들어 제2차대전후 군축을 서둘러야 할 판국에 하루라도 빨리 남한에서 미군을 철수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미국정부는 자국의 체면만 살릴 수 있다면 조속히 남한에서 철군을 단행하고 한국문제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미 육군 장관 패터슨(Robert P. Patterson)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가 적다고 판단하고 1947년 4월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해야 된다고 공언한 바 있었다.
반면에 소련의 입장은 달랐다. 소련은 1860년부터 한국과 이웃이 된 이래 한반도에서 꾸준히 부동항을 얻으려 했던 나라로서 한반도내에 친소정권이 세워지는 것을 원했다. 그리고 소련군은 철수하더라도 두만강 건너편에 주둔하면서 한국에 언제든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련은 이승만을 위시한 남한의 대다수 우익인사들이 판단한 대로 38선 이북지역에 친소정권을 수립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기회를 만들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여 자국의 영향권 안에 묶어두려고 했다.
이승만의 고군분투
이승만은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의 정책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남한에서 철수하려는 미군을 당분간 붙들어둔 상태에서 대한민국을 수립하고 이어서 UN에 가입한 다음 UN의 권위와 외교력을 동원하여 북한에서 소련군을 철퇴시키고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정부를 세우려 했다.
그는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 단정수립 불가피론을 제창한 다음 미국으로 건너가 트루먼 대통령을 위시하여 의회 지도자들과 국무성 관리들, 언론계 인사들 등을 만나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기 전에 한국인이 스스로 정부를 세우는 것을 도와야 된다고 설득하려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단서가 있었다.
새 나라를 건설함에 있어 미국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1945년에 창설된 UN이라는 국제기구의 권위를 이용할 것을 주장했다. 왜냐하면 미국의 권위를 빌어 새 나라를 세우게 되면 그 나라는 미국의 괴뢰국가가 되지만 UN의 권위를 빌린다면 정당성을 지닌 떳떳한 나라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이 일찍이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와 국제법을 전공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기발한 발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승만은 1946년 겨울 미국 워싱턴을 방문하여 1947년 3월까지 체류하면서 미국 조야의 지도자들과 만나 자기의 건국 방안을 설명하고 이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그는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은 만나지 못했다. 그 대신 그는 국무성의 점령지역 담당 국무차관보 힐드링(John R. Hilldring) 장군과 면담할 수 있었다. 한국 사정, 특히 북한의 실정에 정통했던 힐드링은 이승만의 주장에 동조했다. 나중에 미국무성은 이승만의 입장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정책전환을 했다. 아마도 이러한 미국의 정책전환의 배경에는 힐드링 차관보의 영향력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승만이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인 1947년 3월 12일에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그리스에서 발생한 공산주의자들의 내란책동을 계기로 ‘트루먼 독트린(The Truman Doctrine)을 발표했다. 이것의 요점은 미국은 앞으로 공산주의 침략에 대항하여 자유 민주주의 제도와 영토보전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세계의 모든 국민을 원조할 것, 즉 미국은 앞으로 공산주의 세력의 직.간접적 공격의 위협 하에 있는 국가와 제도를 지원.수호하겠다는 것이었다.
트루먼 독트린의 선포를 계기로 미국은 그때까지 소련에 대해 유지해왔던 유화-협력정책을 버리고 대소 봉쇄정책으로 선회했다.
이 시점이 되어서야 비로소 미국은 소련을 가상적국으로 간주하면서 소련이 책동하는 전 세계적 공산화 정책에 적극 대처하기 시작했다. 트루먼 독트린은 원래 한국문제 해결을 염두에 두고 고안된 것은 아니지만 이승만이 그동안 취해왔던 반공-반소 노선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원칙이 한반도에 적용되자 이승만은 비로소 미국정부의 지지를 받게 된 것이다.
1947년 여름에 제2차 미소공위 회의(47.5.21-10.18)가 서울에서 다시 열렸다. 그런데 이 회의 역시 제1차 미소공위 회의 때(46.3.20-5.12)와 마찬가지로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구성함에 있어 한국의 여러 정당 중 어느 정당을 협의대상으로 삼느냐는 라는 문제로 미소 대표 간에 평행선을 달리는 설전을 벌이다가 1947년 10월 21일, 해체되고 말았다. 이에 마샬(George C. Marshall) 국무장관은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소가 합의했던 신탁 통치안을 완전히 포기하고 9월 17일, 한국문제를 국제연합(UN)에 상정했다. 이승만이 주장해왔던 대로 UN을 통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한국문제를 UN에 이관했다.
한국문제를 껴안게 된 UN총회는 1947년 11월 14일의 본회의에서 전국적인 총선거를 통해 한국에 독립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함과 동시에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UN한국임시위원단(The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UN위원단')을 구성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국제연합의 감시 하에 본 결의문 부록에서 제정한 절차에 의하여 조선 국회를 창설하고 조선민족정부 수립을 지향하는 제1계단으로 양 점령지에서 각각 점령군은 1948년 3월 30일 한 선거를 시행함을 건의함”
이러한 UN의 결의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국, 엘 사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등 8개국 대표로써 구성된 UN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여 남북을 아우르는 총선거를 실시하기 위해 현지조사를 펼쳤다. 그 과정에서 UN위원단이 1948년 1월 12일, 38선을 넘어 북조선에 ‘입경'하겠다고 요청했지만 애당초 총선거를 반대했던 소련의 점령군 당국은 1월 23일부로 UN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했다.
그 결과 UN위원단은 총선거 실시가 가능한 남한지역에서만 선거를 하기로 UN에 건의했고, 1948년 2월 26일에 소집된 UN소총회는 그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5월 10일 드디어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된 것이다.
2011.8.15.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트루먼 독트린을 2년 앞선 이 연설은 建國 지도자에 의하여 이뤄진, 2차 대전 이후 소련과 공산당에 대한 세계 최초의 정면 대결 선언이다. 趙甲濟
1945년 12월19일 저녁 7시30분 李承晩은 서울중앙방송국(KBS)를 통하여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그때 李 박사는 모든 정당과 政派(정파)를 통합한 汎國民 조직으로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李 박사는 이 일을 방해하는, 朴憲永이 이끄는 공산당을 지목, 결별 선언을 한 것이다.
당시 공산당은 대중 조직이 가장 강하였다. 30여년 만에 귀국한 李承晩은 카리스마는 있었으나 直系(직계) 조직은 없었다. 하지 사령관의 美軍政 당국도 공산당을 建國 과정에 참여시키려고 하였다. 트루먼 행정부도 아직은 對蘇(대소) 봉쇄정책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을 때였다.
소련과 공산주의의 인기는 세계적으로 절정이었다. 소련군은 2차대전중 나치 독일군을 상대로 영웅적으로 싸웠다. 특히 1943년 초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 결전에서 독일군을 逆攻, 섬멸한 것은 戰勢를 역전시킨 쾌거로서 세계인들의 가슴을 뛰게 하였다. 소련은 2차 대전으로 인구의 10%인 2000만 명이 죽었다. 미국 국무부, 재무부 要職엔 자발적으로 소련의 첩자가 된 高官들이 많았다.
이런 가운데 李承晩은 이날의 역사적 연설을 통하여 공산당 극렬분자들을 반역자요 파괴자라고 정확히 규정하였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반역세력이고 파괴자들이므로 국가 건설과정에서 함께 갈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 연설은 建國 지도자에 의하여 이뤄진, 2차 대전 이후 공산당에 대한 세계 최초의 정면 대결 선언일 것이다. 對蘇 대결 노선을 천명한 트루먼 독트린은 그 2년 후였다. 할아버지 李 박사가 무슨 배짱으로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하여 이토록 격렬한 직격탄을 날렸을까, 경이롭기만 하다. 더구나 이 연설엔 從北세력을 쳐부술 때 쓸 수 있는 비밀 폭탄들이 숨어 있다.
“(공산당 극렬분자들은) 제 나라를 파괴시키고 他國의 권리범위 내에 두어서 독립권을 영영 말살시키기로 爲主(위주)하는 자”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섞여서 共産명목을 빙자하고 國權을 없이하야 나라와 동족을 팔아 私利와 영광을 위하여 부언낭설로 人民을 속이며, 徒黨(도당)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며 軍器(군기)를 사용하야 재산을 약탈하며, 소위 공화국이라는 名詞(명사)를 조작하야 국민 전체의 분열상태를 世人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렀더니, 요즈음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奸計(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희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야 민심을 현혹시키나니, 이 극렬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해서 남의 노예를 만들고 저희 私慾(사욕)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을 것이다.”
李 박사는 공산주의자들을 사대주의자-민족반역자-거짓말장이로 못 박았다. 독재를 공화국이란 말로, 공산주의를 민주주의란 말로 위장하는 저들의 숫법을 폭로한다.
李承晩은 선전 선동 부분에서도 공산당에 결코 밀리지 않는 戰略과 기술을 가진 분이었다. 그는 공산당이 소련을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이라고 찬양하는 것을 약점으로 잡고 재차 직격탄을 날렸다.
“이 분자들이 러시아를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희 조국에 들어가서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찾아서 완전히 우리 것을 만들어 가지고 잘하나 못하나 우리의 원하는 대로 만들어가지고 살려는 것을 이 사람들이 한국 사람의 形容(형용)을 하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가 저희 조국에 갖다 붙이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지 않는 것이니, 우리 삼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어놓고 싸울 결심이다.”
李 박사는 박헌영 김일성이 이끌던 남북한 공산주의 세력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 이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이 자들이 스탈린의 졸개로서 소련을 위하여 봉사하는 賣國奴(매국노)들이란 점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폭로한 정치인은 해방공간에서 오로지 李承晩 한 분뿐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한국 사람의 形容을 하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 가” 소련에 갖다 바치려는 민족반역자로 묘사하였다. 한국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소련을 위하여 복무하는 간첩들이란 지적이었다.
공산주의가 세계적으로 得勢(득세)하던 시절에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표현인데, 적중한 예언이기도 하다. 66년이 흐른 지금도 유효한 분석이다. 남한의 공산주의자들, 즉 從北(종북)세력은 민주투사나 한국인의 形容을 하고 있으나 賣國奴 김정일을 위하여 복무하는 간첩세력인 것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공산주의와 싸우는 방법도 제시하였다.
“먼저 그 사람들을 誨諭(회유)해서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내용을 모르고 따라 다니는 무리를 권유하여 돌아서게만 되면 함께 나아갈 것이오…”
거짓선동엔 진실의 햇볕을 비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변할 수 없는 공산주의 골수분자들이 아니라 附和雷同(부화뇌동)하는 무리들을 설득의 대상으로 보았다.
李承晩(이승만)은 교정이 되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은 ‘親父兄(친부형) 親子姪(친자질)이라도 원수로 대우해야 한다. 大義를 위해서는 愛憎(애증)과 親疎(친소)를 돌아볼 수 없는 것이다’고 비장하게 못 박았다. 공산당을 정상적인 인간집단으로 봐선 안 되다는 경고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어서 공산주의자들을 파괴자, 민족주의자들을 건설자로 규정하였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건설자와 파괴자는 협동이 못되는 법이다. 건설자가 변경되든지 파괴자가 회개하든지 해서 같은 목적을 가지기 전에는 완전한 합동은 못된다.”
나중에 李 박사는 "공산주의자들은 호열자(콜레라)와 같다. 인간은 호열자와 함께 살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文明건설자인 대한민국 세력과 文明파괴자인 공산당은 절대로 한 덩어리가 될 수 없다. 김대중 노무현 종북세력은 공산당과 대한민국이 서로 화해하고 존중하면서 공존할 수 있다고 사기를 쳤지만 李 박사 눈엔 진실이 보인 것이다.
李 박사는 끝으로 이렇게 호소하였다.
“이 큰 문제를 우리 손으로 해결치 못하면 종시는 다른 해방국들과 같이 나라가 두 切分으로 나뉘어져서 동족상쟁의 禍(화)를 면치 못하고, 따라서 우리가 결국은 다시 남의 노예 노릇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경향 각처에 모든 애국애족하는 동포의 합심 합력으로 단순한 民主政體下에서 국가를 건설하야 만년무궁한 자유복락의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하자.”
이 연설은 70세 老鬪士(노투사)의 위대한 先制공격이었다. 급소를 얻어맞은 조선공산당 박헌영은 중앙위원회 대표 명의로 ‘세계민주주의전선의 분열을 책동하는 파시스트 이승만 박사의 성명을 반박함’이라는 長文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표현은 극렬했지만 守勢的(수세적)일 수밖에 없었다. 박헌영 등 공산세력이 주도한 좌익의 통일전선체인 조선인민공화국은 李承晩이 귀국하기 전에 그를 主席으로 추대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래 놓고 그를 파시스트라고 공격하니 국민들에겐 잘 먹히지 않았다. 대중의 李承晩에 대한 신뢰는 공산당의 선전 선동이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뿌리를 박고 있었다.
李承晩이 공산당을 賣國세력으로 규정한 지 1주일이 지난 12월2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美, 英, 蘇 3國 外相 회담은 남북한에 대한 5년 기한의 신탁 통치안을 발표하였다. 金九, 李承晩이 주도한 反託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朴憲永의 조선공산당은 熱火(열화)와 같은 민심에 동요하여 贊反(찬반)을 정하지 못했다. 지령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서울 주재 소련영사관을 찾아가 지침을 받으려 했으나 영사관측은 본국으로부터 훈령을 받지 못하였다고 했다. 박헌영은 12월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그는 김일성 등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간부들에게 신탁통치에 대한 남한의 민심이 반대쪽이라고 설명하였다. 김일성도 어쩔 줄 몰라 하였다. 모스크바에 갔던 북한주둔 소련군 民政사령관 로마넨코가 평양으로 돌아온 다음날 朴憲永에게 지침을 하달하였다. 신탁통치를 결의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라는 것이었다.
朴憲永은 1946년 1월1일 밤 평양을 출발, 2일 새벽 서울에 도착, 김일성과 보조를 맞추어 조선공산당 이름으로 모스크바 협정, 즉 신탁통치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李承晩의 1주일 전 예언대로 극렬공산주의자들은 民心을 거스르고, 소련의 지령에 충직하게 복무함으로써 민족반역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었다. 그들은 회복이 불가능한 敗着(패착)을 두었다. 좌익은 賣國세력, 우익은 民族진영이 된 것이다. 右翼(우익) 주도의 反託, 좌익 주도의 贊託(찬탁) 政局은 김구의 臨政(임정)세력을 오른쪽으로 몰았다. 그 뒤 한 동안 李承晩-金九 연합전선이 형성되면서 좌익은 더욱 고립된다.
李承晩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先制공격으로 역사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가 2010년 한국 대통령이었다면 연평도 도발 직후 평양의 금수산 기념궁전을 폭격하도록 명령하여 김일성의 屍身(시신)을 날려버리고 김정일-김정은을 昏絶(혼절) 시켰을 것이다.
李承晩의 공산주의자 배격 연설은 한반도 정세를 賣國者와 愛國者, 파괴자와 건설자, 敵과 동지, 善과 惡으로 가른 역사의 分水嶺(분수령)이었다. 오늘의 한반도 정세는 그 연설의 결과물이다. 공산당엔 공세적으로 나가야 이긴다. 2011-08-18 11:14
2012년은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운명의 해가 될 것이다.崔應杓(뉴욕거주)
개찰구에는 못 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병든 歷史가 화물차에 실리어 간다.
오장환의 詩 ‘The Last Train’의 한 구절이다. 오장환은 숨 막히는 일제 식민시대를 살면서 자기 꿈을 마음대로 펼칠 수 없는 자기 인생을 못 쓰는 차표에 비유하고, 우리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 민족의 진로를 화물차에 실려 가는 병든 역사라고 울분을 토하고 있다.
광복 후 66년이라는 세월을 지나오면서 세계 경제 10대국이라는 大성공을 이룬 대한민국. 그런데도 엄청난 풍요 속에 배부른 투정으로 스스로 자기 인생을 못 쓰는 차표로 전락시키는 한국의 역사는 원래 우리가 바라던 옳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반성과 진보의 메시지는 역사에서 얻는다고 했다. 오장환이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이 거북이의 등에 지도처럼 펼쳐져 있다’고 한 것처럼, 우리 역사에는 민주, 민족, 진보, 개혁, 민족끼리의 가시밭길이 대한민국의 등에 지도처럼 펼쳐져 있다.
하지만 그 지도처럼 얽혀져 있는 우리 역사에는 반성과 진보의 메시지뿐 아니라 분명히 그 이상의 가치를 얻을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비전의 메시지가 있다. 양심과 정의의 눈으로 현실을 제대로 본다면 말이다.
문제는 현실을 바로 보려는 意志와 주저 없는 決斷과 두려움 없는 勇氣에 있다. “인간은 가장 위험하고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과감하고 가장 용감한 행동을 하는 법이다.” 데카르트가 우리에게 하는 말이다.
지금 한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위험하고 가장 절망적인 시기를 맞고 있다. 데카르트의 말대로라면 대한민국 국민은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과감하고 가장 용감한 행동을 펼칠 때다.
레이건 대통령이 논란의 여지가 많은 정책을 결정할 때는 “양심이 가르치는 쪽을 택하라”는 단 한 가지 기준에 따른 원칙이 세계질서를 바꾸어 놓은 것처럼, 민족의 양심이 가르치는 쪽을 따라 결단하고 행동하면 2012년의 運命의 女神은 반드시 우리 편에 설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온 것이 바로 그런 것 아닌가.
미국을 지탱해 주는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알면 우리 행동의 지침이 보일 것이다. 다시 말해 필그림 파더(the Pilgrim Fathers)들의 개척정신과 건국 대통령을 비롯한 건국 주역들의 건국이념을 마음에 다시 새기는 국민 대각성 운동이 국민들에게 새로운 역사의식으로 이어지면서 오늘의 미국을 지탱해 주는 원동력이 됐다는 역사의 큰 흐름(時代精神, 시대정신)의 물줄기를 우리 쪽으로 돌리면 새 희망, 새 역사의 길은 반드시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다.
새 희망, 새 역사의 길은 ‘오늘의 우리 됨을 있게 한 뿌리’(문창극 대기자의 표현)인 대한민국의 가치에 대한 고마움을 국민들 가슴에 심는 기초적인 일에서 시작된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이 가는 길이 善의 길’이고, ‘김정일이 가는 길은 惡의 길’이라는 眞實이 국민의 의식을 깨우고 국민의 양심에 정의의 불을 붙이며 도덕적 각성 운동으로 이어져야 대한민국의 가치를 지킬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우리는 지금 사회주의로 가고 있다”는 박동운 교수의 우려의 목소리가 국민들의 가슴을 무겁게 하고 있다. 점잖게 말해서 ‘사회주의’지 사실대로 말하면 ‘김정일주의’ 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엄격히 따져서 한국에 진정한 ‘進步’, ‘改革’세력이 어디 있는가.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the Holocaust)은 없었다”고 엄연한 역사적 사실마저 부정하는 놈 촘스키 같은 스탈린식 ‘김정일주의자’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민족, 진보, 개혁 간판을 들고 민주를 떠드는 민주 팔이 세력을 惡의 세력으로 분류한다.
2012년을 맞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기원전 490년경,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국가에 위기가 닥쳤을 때, 나라를 지키고 자유를 지키며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마라톤 평원으로 달려간 아테네 시민의 애국심과 아테네의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41.6 킬로미터를 달려와 “우리 아테네 군이 승리했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숨져간 필리피데스의 精神이 아닐까.
진보란, 헨리 와드 비쳐가 “우리에게 씨앗으로 왔던 것이 다음 세대에 가서 꽃을 피우고, 꽃으로 왔던 것이 그 다음 세대에 가서 열매를 맺도록 열심히 살면서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라고 한 것처럼, 건설지향적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진보가 아닐까.
그리고 개혁이란, “오랜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다시 들여다보고 유효한 것이 최대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재구축하는 작업”이라는 시오노 나나미의 말처럼, 미래지향적 비전을 가지고 진실한 정신적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 참된 개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할 진보와 개혁이 우리나라에선 어떻게 역사 부정과 파괴 지향적이고 선동적이어야 개혁이 되고 진보가 되는지 알 수가 없다.
하긴 언제나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며 거짓과 선동과 파괴를 정치수단으로 삼는 공산혁명 세력이 판치는 사회에선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점점 크게 들리는 “한국은 지금 사회주의로 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가볍게 들어 넘길 일이 아니다. 월남은 그래서 망했다.
물론 첫째 책임도 분에 넘치는 풍요에 젖어 정신을 놓고 있는 국민에게 있고, 둘째 책임도 거짓과 선동에 홀려 지도자를 잘못 택하는 국민에게 있다.
하지만 레이건 대통령처럼, 惡을 악이라고 부르며 거짓말하고, 범죄를 저지르며 세계적 공산국가를 추구하는 소련에 대한 유화정책을 버리고, 확고한 철학과 원칙주의로 소련을 붕괴시킨 위대한 유산을 남겨주지 않고, 자기 영달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적장에게 나라를 팔아먹는 파괴적 유산만을 물려주고 간 김대중과 노무현의 역사적 죄악이 한국을 평양으로 끌고 가는 국가위기를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정식 조인되기 전, 8월 假(가)조인식을 마친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 받을 뿐 아니라 경제, 정치, 문화 등, 다방면으로 혜택을 입어 앞으로 몇 세대에 걸쳐 번영을 누릴 것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위대한 지도자란 바로 그런 지도자다. 오늘의 한국의 번영과 자유는 그런 리더십에서 나왔고 대한민국의 가치는 그 토대 위에서 창출되었다. 그런 위대한 유산을 기반으로 뻗어나가던 대한민국이 지금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한마디로 민족, 진보, 개혁이란 위장 열차에 실려 평양으로 가고 있다는 말이다. 엄격히 말해 사회주의가 아니라 김정일주의로 말이다. 2012년의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김정일에 대한 저들의 충성심 경쟁은 ‘평양 앞으로’를 외치며 더욱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길이 우리 미래의 발전 동력이 되느냐의 판단기준을 바로 세우느냐 못 세우느냐에 따라 한국의 운명이 결정되는 중대한 시기를 맞고 있다.
한나라당의 7.4 전대를 기점으로 정치권 전체의 흐름은 솔직히 왼 쪽으로 가고 있다. 민노당, 민주당, 한나라당의 이념적 구분이 거의 사라진 상태에서 대한민국 중심세력이 취해야 할 자세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대로 화물차에 실려 평양으로 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지금 우리에게 이런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지도자는,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원칙과 두려움 없는 지도력, 그리고 비전을 담은 해결책으로 세계 공산권을 무너뜨린 레이건 대통령의 성공 원칙의 소유자가 아닐까.
MB정부의 대북정책 변화와 민노, 민주당의 복지 포퓰리즘에 편승해 대중인기 경쟁을 버리는 한나라당의 좌경화 노선은 김정일주의자들의 北進(북진) 행렬에 붉은 카펫 깔아주는 꼴이다.
1637년(인조 15)의 三田渡(삼전도)의 굴욕을 기억하는가. 조선 왕이 淸太宗(청 태종)에게 무릎 꿇고 항복한 그 치욕 말이다. 지금 MB와 한나라당의 비굴할 만큼의 김정일 눈치 보기 자세, 삼전도의 치욕과 무엇이 다른가.
김정일에게 허리 굽혀 무엇을 얻어 보겠다는 발상은 김정일의 버릇만 더 고약하게 만들 뿐이다.
거리의 불량배에게 용돈 주고 술 사준다고 저들의 행패를 피할 수 있다고 보는가. 천원 주다 만원 줘야 하고, 만원 주다 십 만원 주게 되며 나중엔 기생집 요리 값까지 물어주다 멱살 잡히고 얻어터지게 되는 것이 불량배의 속성이다.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이 가는 길이 옳은 길이고, 소련이 가는 길이 잘못된 길이라며 결국엔 옳은 길이 이길 것이라는 신념으로 소련이 진정으로 변하지 않는 한 정상회담을 할 수 없다며 끝까지 정상회담을 갖지 않았다. 그 원칙이 결국 세계 공산권의 붕괴를 가져오지 않았는가.
2012년은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운명의 해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 어떤 가치도 국가 안보 위에 놓일 수는 없다. 돈을 주고 평화를 사겠다는 敗者의 정신을 버려야 한다. 그건 김대중의 사기수법이다.
지금 부터라도 레이건의 안보 의식, 철학, 원칙을 기준으로 한 대북정책을 보다 강하게 펼쳐 나간다면 2012년은 우리에게 다시없는 기회가 되겠지만, 김대중, 노무현의 대북 屈從(굴종)형 정책을 쫓는다면 2012년은 우리에게 최악의 해가 될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선택에 달렸지만, “거짓말도 백 번 되풀이 하면 眞實이 된 다”는 레닌 식 共産黨의 宣傳煽動(선전선동) 공작이 한국국민에게 쉽게 먹혀든다는 데 있다. 그 선전선동 공작을 막을 제도적 장치를 찾지 못 하면 2012년은 승산이 없다.
민주, 민족, 진보, 개혁에 이어 복지 포퓰리즘까지 국민을 선동해 한국의 민주 열차를 평양으로 끌고 갈 때, 그걸 제지할 수 있는 힘이 현재 우리에겐 없지 않는가. 이미 대한민국 중심세력에서 이탈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엔 희망이 없다. 우리의 보수적 가치를 지켜낼 대안세력의 출현이 시급한 때다.
고르바초프는 1989년, 당시의 동독을 ‘뚜껑이 꼭 닫힌 채 과열된 보일러’라고 표현했다. 지금 한국의 현실이 그렇다. 과열된 보일러 뚜껑이 어느 방향으로 터지느냐에 따라 역사의 진로가 바뀐다.
독일 통일은 원초적으로 레이건의 대소 原則主義와 고르바초프의 新思考의 산물이지만, 1989년 5월 2일 헝가리 정부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지역에 설치된 철조망을 철거한 작은 사건이 물꼬를 튼 것이다.
TV를 통해 철조망 제거작업을 본 동독 국민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바늘구멍 같은 기회가 왔다. 우리도 가야 한다.” (양창석의 ‘브란덴부르크 비망록’)는 불씨가 결국 “서독 마르크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 그리로 간다”는 결의를 분출시키면서 베를린 장벽을 허물고 통일의 길을 연 것 아닌가.
언제나 역사적 터닝 포인트는 작은 사건에서 이루어진다. 지금 한국에서 진정한 보수정당의 새 싹을 키우려는 희망의 씨앗이 우리의 미래를 열어주는 터닝 포인트가 될지 누가 아는가.
힘은 한 곳으로 모아야 힘이 된다. 그래서 이승만의 귀국 제일성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2012년을 위해 애국세력은 하나가 돼야 한다. 그래야 산다. 평양행 열차를 막지 못하면 전부가 죽는다.
김정일주의자들은 ‘대한민국 죽이기’란 하나의 목표를 위해 모든 사적 이익을 버리고 하나가 될 것이다. 산산이 부셔진 힘으로 저들의 뭉친 힘을 어떻게 당해낼 수 있는가.
심장이 썩어가는 대한민국을 살리는 길은 단 하나, 국민이 깨어나는 것이다. 전형적인 공산당식 선전 선동에 속지 말고 어떤 길이 생명의 길이고, 어떤 길이 죽음의 길인가를 잘 판단해서 행동해야 모두가 산다.
김정일주의 열차타고 평양 가면 최고의 복지 누리며 살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300만이 굶어죽은 지옥의 땅이란 사실을 기억하라.
월남 패망 후의 베트콩과 공산 월맹을 도와 공산 통일의 한 축을 담당했던 월남 공산주의자들의 최후가 어떠했는지를 상상해 보라. 지상 낙원을 꿈꾸며 북송선을 탔던 在日(재일) 동포의 처참한 삶을 보라. 그래도 평양행 열차에 몸을 실을 것인가.
배부른 투정은 이제 그만 해야 한다. 투정이 도를 넘으면 파멸이 온다. 새 희망을 담을 새 부대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새 부대 속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다. 2011-08-18 11:28
카펫 깔아주는 꼴이다. 2011-08-18 1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