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공산화는 反美*反戰 데모를 주도했던 간첩과 시민*종교단체의 조직적인 선전 선동결과 미군의 전면 철수후 공산화 되었다.
강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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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南韓의 '5만 간첩', 南베트남의 '5만 간첩'
황장엽 "남한 내 간첩들 권력핵심부에 침투해있다"
"남한 내에 고정간첩 5만 명이 암약하고 있으며 특히 권력 핵심부에도 침투해있다…. 그쪽(한국) 권력 깊숙한 곳에 이쪽(북한) 사람이 있다…. 우연히 김정일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보았더니 그날 아침 여권 핵심기관의 회의내용과 참석자들의 발언내용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망명 당시 서신)
남베트남은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당시 기준 세계 4위, 병력 58만 명)에서도 북베트남(월맹)을 훨씬 앞질렀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급 인사의 자제와 돈 있는 집 청년 10만 명 이상이 병역기피 및 해외 유학을 갔거나 군 출신 장군이 운영하는 사기업에서 일했다. 지도층의 사리사욕, 부정축재, 황금만능주의가 체제 파괴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일례로 남베트남 대통령 티우는 패망 당시 철수하는 미군을 향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허겁지겁’ 미군이 마련한 군용기에 몸을 실었다. 티우를 수행한 미국의 CIA 요원은 그의 트렁크를 옮길 때마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금덩이가 한쪽으로 쏠릴 때 나는 소리였다. 미군기는 티우의 금괴를 싣고 첫 망명지인 대만으로 날았다. 티우는 이란의 팔레비나 필리핀의 마르코스에 앞서 스위스 비밀은행계좌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197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전면 철수 하자 사이공에는 100여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 개의 언론사를 양산해 베트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이들은 베트남 전쟁은 민족 간 내전으로 미국 등 외세가 내정 간섭 할 문제가 아니라면서 미국을 고립시켰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수많은 간첩을 파견, 동조자를 포섭하고 각 분야에 간첩을 침투시켜 혼란을 조성하는 등 정부가 힘을 집중시키기 못하도록 했다.
1975년 남베트남은 북베트남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개 이상의 좌익 단체의 선전전에 당했던 것이다. 패망 당시 베트남에는 공산당원 9500명,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 인구의 0.5% 정도가 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5만 명의 월맹간첩들은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한 채 시민·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 등 권력핵심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미군의 전면철수 후 베트남패망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간 이후에나 확인됐다. 1967년 치러진 베트남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된 야당지도자 쭝딘쥬도 대표적 간첩이었다. 그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냐"면서 월맹에 대한 ‘포용정책’을 주동했다.
간첩들이 가장 많이 침투했던 것은 시민·종교단체의 부패척결운동과 反美·反戰평화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선전선동을 통해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해가면서,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또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반공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애국인사, 언론인들이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됐고, 이들의 가족-친지들이 사회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베트남은 공산화 이후 지식인, 공무원, 군인, 종교인, 부유층, 그리고 자유 베트남 정부에 협조한 사람들은 전부 재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적대(敵對)계층으로 분류됐으며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로 간주되어 승자의 보복대상이 됐다.
탄압과 차별, 학대와 폭정이 자행되었고 전국 각처에 재교육 수용소가 설치되어 적대계층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잡아 가두고 공안경찰을 증원(增員)하여 국민의 일상생활을 감시하고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것을 통제했다.
특히 가혹한 육체노동을 강요했다. 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규정하여 "부모의 흘린 피와 땀, 자식이 흘린 피와 땀이 합쳐야 나라가 번영한다"고 선전하면서 무자비한 노동을 강요했다.
논과 밭은 국유화되고 영농은 철저한 3모작을, 일반 국민은 헌금을 강요받았으며 돈이 없는 자는 노력봉사를 해야만 했다. 노동자는 한 달에 15kg의 쌀을 배급받아 생활해야 했고, 전쟁부채 상환비, 전비(戰費)기금을 내야 했다.
먹는 것을 철저히 통제하고 수중에 돈이 없게 하여 국민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철저한 국민재교육을 시행했다. 또한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종래 부를 축척한 모든 것을 부정해 자살을 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공산주의자들의 국민 재교육은 "공무원(公務員)은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경찰(警察) 및 정보요원은 제국주의의 도구(道具)로, 군인(軍人)은 무력으로 총을 가지고 대항했던 사람으로, 문예(文藝)인은 민족정신을 교란시킨 사람으로, 종교인(宗敎人)은 국민을 유혹하여 미신에 빠지게 하고 우매하게 만든 사람으로, 자본가(資本家)는 국민을 착취해 강압적 노동을 시켜 반혁명에 앞장을 섰으며 국민에게 피의 부채를 지고 있다"는 죄를 물어 재교육을 시켰다.
이와 함께 "우리 공산당은 반역자들을 재교육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에 동참할 선량한 국민으로 개조하고, 사회에 필요한 사람으로 선도할 것이며 노동을 경험하게 하여 자력갱생(自力更生)의 길을 열어준다"라고 선전했다.
한 수용소에 2000명 정도 수용했으며 성(省) 별로 1개 이상이 있고 사이공 주변 등 도시 주변에는 대상자가 많음으로 여러 곳에 설치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밀림지대에 위치시켜 탈출을 방지하고, 나무를 벌목하여 수용소를 짓고 개간하면서 식량은 월 9kg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자급자족하도록 했다.
수용소 방침 자체가 체형(體刑) 및 학대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작업 실적에 따라서 수용소장의 재량으로 급식의 양을 결정했다.
따라서 제거해 버리고 싶은 적대계층의 사람은 굳이 사형을 집행하지 않더라도 제거할 수 있게 제도를 만들었다. 가족이나 다른 국민들, 외국(外國)의 항의를 벗어나기 위한 교묘한 방법을 강구해 냈다. 수용소 기간에는 면회가 일체 사절되었고, 편지도 1년 또는 2년에 한번 보낼 수 있었으며 의료혜택은 전무하여 병에 걸리면 바로 죽는 것이었다.
말라리아 등의 열병과 뱀 전갈의 독충과 영양실조 및 미래에 대한 포기는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혁명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제거했다.
즉결처분된 사람들을 포함, 그 인원은 최소 30만에서 최대 2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확한 통계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군 출신의 경우 하사관 및 초급장교까지 수용소로 보냈으며, 공무원 종교인 경제인 월남 정부 협조자와 그 가족까지를 포함하면 최소한 100만 명 이상의 인원이 재교육을 받았다고 판단된다.
공산치하에서 살기를 거부한 수많은 남부 베트남인들은 즉각 해외 탈출을 시도했다. 철수하는 미군을 따라 망명길에 올랐던 1세대 탈출자들은 미국 등 서방으로 이주하여 비교적 쉽게 그곳에서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6년부터 탈출한 대부분의 베트남인들은 안전한 이주 및 재정착의 보장 없이 무작정 국경을 넘거나, 배를 타고 공산베트남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다른 나라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고, 동남아 일대의 바다를 정처 없이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들이 바로 보트피플(Boat People)이라 불리는 베트남 난민이다.
1976 년부터 1992년 말까지 동남아지역으로 탈출한 사람들의 수는 총 792,893명에 이르렀다. 1979년부터 1992년 말까지 동남아국가들의 난민 수용소를 거쳐 최종적으로 난민자격을 인정받아 서방 등 제3국에 정착한 난민 수는 438,436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정일은 “한반도 적화(赤化)통일 달성 시 1천만 명은 이민 갈 것이고, 2천만 명은 숙청될 것이며, 남은 2천만 명과 북한 2천만 명으로 공산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 공산집단의 이 같은 주장을 절대 흘려들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운명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명 및 재산을 수호하는 것은 미국과의 방위공약도 아니고 공산당과의 협상도 아니다. 북한 공산 집단에 맞서 우리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의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전쟁은 결국 ‘의지의 대결’이다. 한반도에서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북한은 핵무기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강성대국’ 진입시기인 2012년부터 한미연합사가 해체되는 2015년을 ‘남조선 혁명의 성숙기’로 보고 있다. 북한 급변사태에 앞서 북한에 의한 남한 급변사태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전면전(全面戰)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오히려 위험한 생각이다. 군사 안보전략은 반드시 비관론적 가정에 근거해야 한다. 근거 없는 낙관론을 배격해야 한다. 지금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철통같은 총력안보태세를 다짐해야 할 때다.
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
민노당은 노동자를 지지 기반으로 사회주의 실현을 黨의 기본이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민노총 위원장 출신의 권영길이 주도했던 ‘국민승리21’이 민노당의 前身(전신)으로 2000년 1월30일 창당됐다. 2000년에는 원내 진출에 실패했으나 2004년 총선에서 지역구 2석, 비례대표 8석을 획득해 종북·좌파 정당 최초로 원내 진출에 성공했다. 당시 민노당의 지역구 당선자는 권영길, 조승수이며, 비례대표 당선자는 강기갑, 노회찬 등 8명이다.
2008년 이전까지 黨內 세력은 크게 ‘민족해방(NL 주사파) 계열과 ‘민중민주’(PD) 계열로 양분되어 있었다. 초창기에는 NL계열이 대의원 숫자 등에서 우세를 보이며 당내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당내 노선 차이는 운동권 내에서의 분류일 뿐이다. 북한문제와 관련해 NL-PD는 모두 從北的(종북적) 태도를 보여 왔다.
민노당은 2008년 1월12일 2007년 대선에서 큰 성과를 못 이룬 책임으로 지도부가 사퇴하고, PD계열의 심상정(現진보신당) 위원장을 중심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심 위원장의 당 혁신안이 부결되면서 심 위원장은 2월4일 사퇴했다.
이후 비상대책위원장을 사퇴한 심상정을 대신해 천영세 대표가 민노당을 탈당해 진보신당을 창당했다. 민노당은 18대 총선에서 진보신당과의 분당에도 불구하고 지역구 2석, 전국구 3석을 확보했다. 이후 2008년 7월 강기갑을 대표로 선출해 체제를 정비했으며, 2010년 민변출신의 이정희(前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공동대표)를 중심으로 4기 지도부를 선출했다.
1) 창당에서 2002년 대선: 민노당의 핵심인사들을 세대별로 보면 80년대 운동권과 노동운동을 한 ‘신세대 좌파 운동권 2기’라 할 수 있다. 해방직후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및 인민당과 근민당, 그리고 건국 이후의 진보당을 이끈 박헌영, 여운형, 백남운, 조봉암 등이 구세대 좌파 1기라면 4.19 이후 전두환 정부까지 좌파 정당들을 이끈 김달호, 윤길중, 박기출, 고정훈, 김철 등은 구세대 2기이며, 민주화운동 참여한 이우재, 이부영, 장기표, 이재오, 김근태 등은 운동권 신세대 좌파 운동권 1기라 할 수 있다. 민노당은 권영길이 주도한 민노총을 중심으로 ‘민족해방(NL 주사파) 계열과 ‘민중민주’(PD) 계열 등 다양한 운동권 세력이 참여하고 있다. 창당에서 2002년까지 민노당의 주요 활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97~2000년: 민노당의 전신 ‘국민승리21’로 활동 ▲1997년 대통령 선거에 권영길 출마(1.19% 득표) ▲2000년 1월 민노당 창당, 권영길 대표로 선출 ▲2000년 4월: 16대 총선 출마, 출마지역 평균 13.1% 득표 ▲2000년 10월: 北노동당 창건 기념행사 관련 방북 ▲2001년 6월: 금강산 통일 대토론회 참가 ▲2002년 2월: 부시방한규탄 범국민대회 개▲2002년 3월: 노회찬 민노당 정기 당 대회에서 사무총장에 선출 ▲2002년: 지방선거에서 기초단체장 2, 광역의원 11명 당선 ▲2002년: 대선에 권영길 출마(98만 표 획득)
2) 2004년 총선 전후: 민노당은 2004년 총선에서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면서 제도권 정당으로 진입했다. 지역구 당선자(2명)는 권영길과 조승수이었으며 나머지 8명은 비례대표였다. 총선 직후 시행된 제2기 지도부 선거에서 김혜경(現진보신당 고문)이 대표로 선출됐다.
그러나 17대 총선 당시 울산 북구의 음식물 자원화 시설 관련 간담회에서 있었던 조승수 의원(당시 국회의원 후보)의 발언이 빌미가 되어 2005년 9월 조승수 의원이 의원직 상실에 해당하는 대법원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10월에 시행된 울산 북구 재선거에서 민노당 정갑득 후보가 한나라당 윤두환 후보에게 패해 전체 의석이 총 9석으로 줄어들었다.
2004년 총선에서 2007년 대선까지 민노당의 주요 활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004년 7월: 국군의 이라크 파병저지 민노당 대표단 무기한 농성 ▲2005년 8월24일 김혜경 당시 민노당 대표가 방북 기간 중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을 참배. 김혜경은 당시 방명록에 “당신들의 ‘애국의 마음’을 길이길이 새기겠다”는 내용의 서명 ▲2005년 8월: 北사회민주당과의 교류를 위한 지도부 방북(남한정당 최초)▲2005년 10월: 북구 국회의원 재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김혜경을 비롯한 전 지도부가 총사퇴. 이후 민노당은 비상대책위원회(임시대표 권영길) 체제로 운영 ▲2006년 1월20일~24일: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는 당직선거가 시행. 대표 후보로 주대환, 문성현, 조승수 세 후보 도전. 이후 문성현·조승수 후보와의 2차 투표 끝에 2006년 2월10일 문성현 후보가 새 대표로 당선 ▲2006년 5월: 제4회 지방선거에서 광역의원 15명(비례 10명 포함), 기초의원 66명 당선 ▲2006년 6월: 한미FTA 중단. 국민투표실시 촉구 100만 서명운동(남한 정당 최초) ▲2006년 10월: 북한 핵실험 이후 남북관계 해결 명목으로 민노당 대표단 평양 방문 ▲2007년: 대선에서 권영길이 민노당 내부경선을 통해 대통령 후보로 선출. 대선에서 3% 득표율(712,121표) 기록. 당시 각 시도 중 가장 높은 지지율을 얻은 곳은 울산광역시(8.4%)
3) 2008년 총선과 그 이후: 민노당은 2008년 총선에서 권영길·강기갑 후보가 각각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비례대표는 곽정숙, 홍희덕, 이정희 세 명의 후보가 당선되어 2004년보다 5석 줄어든 5명의 국회의원이 당선됐다.
총선이 끝난 5월 초부터 韓美 쇠고기 협상 논란이 불거져 나오자, 민노당은 강기갑을 중심으로 정부를 상대로 대대적인 투쟁에 들어갔다. 黨 지도부가 일주일 동안 단식농성을 치렀으며, 좌파단체들과 연대해 촛불 집회에 참여했다. 이 같은 활동으로 5월 말에는 민노당 지지율이 10.3%에 이르기도 했다. (2008년 5월 마지막 주 리얼미터 조사)
2008년 7월 강기갑이 민노당 대표에 선출되고, 이정희가 정책위의장이 되는 등 국회의원단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는 구조로 당 체제가 개편됐다. 같은 해 10월29일 실시된 재보궐 선거에 4명의 후보가 출마, 여수시 시의원후보 선거에서 김상일이 당선됐다. 2009년 실시된 재보궐선거에서는 호남 지역에서 1명의 광역의원, 1명의 기초의원을 당선시켰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 국민참여당 등과 함께 야권 후보 단일화에 합의해 인천에서 기초단체장 2명을 배출했고, 36명의 광역의원을 당선시켰다. 같은 해 7월에는 이정희(前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공동대표)를 당대표로, 장원섭(前광주금속노조 부위원장), 김성진(前평화와참여로가는인천연대 공동대표), 정성희(前민노총 대외협력실장), 우위영(前여중생범대위 문예위원장), 최은민(前민노총 총연맹 부위원장), 윤금순(前6.15민족공동위원회 남측여성본부 공동대표), 이혜선(前민노총 공공연맹 부위원장), 이영순이 최고위원으로 선출됐다.
2008년 총선에서 2010까지 민노당의 주요 활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008년 2월: 강기갑 의원, 한미FTA 국회비준 반대 단식 ▲2008년 4월: 강기갑 의원,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단식 ▲2008년 6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길거리 토론회 개최, 촛불집회 참석 이정희 의원 연행 ▲2008년 11월: 북한의 조선사회민주당과 정당교류를 한다는 명목으로 평양방문 ▲2010년 7월 제4기 민노당 지도부 선출(당대표: 이정희)
정리/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 2011-08-18 18:20
그러나 이들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미군의 전면철수 후 베트남패망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간 이후에나 확인됐다. 1967년 치러진 베트남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된 야당지도자 쭝딘쥬도 대표적 간첩이었다. 그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냐"면서 월맹에 대한 ‘포용정책’을 주동했다.
간첩들이 가장 많이 침투했던 것은 시민·종교단체의 부패척결운동과 反美·反戰평화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선전선동을 통해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해가면서,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또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2011-08-18 22:53
아님,
글을 해독할 줄 모르는 분들께 제가 시간 낭비하고 있는 건가요?
호~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라니요?
저는 그런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죽은 이데올로기에 그만 목숨거시고...
밝은 세상으로 나옵십시요.
많은 사람들이 밝고 따뜻한 마음으로 '모두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진 저희들만 더 가져야 하는데, 같이 잘 살자했으니... 저더러 빨갱이 생각을 가졌다하겠지요?
수구보수들은 할 말 없으면 다 색깔론, 즉 빨갱이로 몰지 않습니까.
근데, 저는 빨갱이도 아니고 파랭이도 아니고예...
그저 부처를 믿으며 삶의 질이나 행복이 많은 사람들에게 미치길 바라고 사는 사람입니데~이. 2011-08-21 23:59
댁들이 여기 도배하다 시피하는 허접한 글들을 보니 참 답답하여 진정어린 충고를 하지 않고서는 그냥 지날 수가 없네요.
댁들은 소련의 붕괴로 이미 끝나버린 이데올로기 망령에 아직 사로잡혀 계신...
아니, 지배당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당신들을 그런 점에서 지진아들입니다.
이데올로기를 대신한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이미 막강한 재력과 권력을 쥐고 세계를 국가를 경제를 정치를 흔들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라고 들어보셨나요?
이미 자본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국가 위에 서고자 하고 있습니다.
당장, 삼성을 보십시요.
부당하게 세습(예 그렇지요. 그들도 세습하고 있습니다. 그건 인정하시지요? -댁과 같은 부류들은 북한의 3대 세습에 관해서는 난리도 아니더만 삼성의 3대세습은 왜 마무 말도 않으신지 궁금합니다.)된 재산에 대해 정당한 세금 내지 않고 있으며, 세무 조사라도 할라치면, 난리도 아닙니다.
'한국을 떠나 사업을 하겠다나요?'
그러면... 한국경제는 망한답니다.
못된 것들.... 저거 회사 키워준 사람이 외국인입니까?
다... 착해빠진 우리 국민들이 애국하는 길이라고... 저거회사 물건 사줘 오늘에 이른건데... 배은망덕한 놈들... 그렇잖습니까?
위 글에 민노당을 적으로 규정하셨던데,
혹시 삼성 이건희 아버집니까?
아님 삼촌이십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대기업 오너입니까?
또... 그것도 아니라면 작은 기업의 오너라도... 되십니까?
(만약, 오너이시면 이해합니다. 오너 만 이윤을 많이 가지지 말고, 직접 일을 하는 노동자들과 조금 더 나누자는 이야기... 를 하면 오너 입장에서는 당연히 싫겠지요.)
자유게시판에 허접한 글들로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는 것을 그만하십시요.
부처님의 가르침인 중용은 이런 상황에도 이데올로기에도 해당된다고 가르쳐드리고 싶네요.
세상에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은 없습니다.
손에도 손등과 바닥이 있으며,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기 마련입니다.
댁들이 그렇게도 집착하는 이데올로기는 이미~ 저세상 갔습니다.
젊은 사람 보기 부끄럽지 않으세요?
부처님도 당시 진보주의자셨습니다.
(댁들 정말 불교 공부하시는 분들 맞으세요?)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북한은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우리와 북한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하나의 언어로, 같은 문화와 풍속을 가진 하나의 국가였었습니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되었다가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미국과 소련의 힘의 균형을 위해 잠정 분단된 상태로, 지금까지 통치자들의 이데올로기에 따른 결과로 놓여 있을 뿐입니다.
해방과정의 이야길 많이 늘어 놓으셨던데.... 그럼 더 잘 아실거 아닙니까.
북한의 모든 주민들이 원해서 사회주의체제로 살고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러저러한 이유로 많은 분들이 통일을 원하고 있습니다. 저도 평화통일을 원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고요.
그리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그리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가 있는 것 아닙니까?
댁들과 생각이 같지 않다고 해서....
선거로 다수의 사람들에 선택되어 의정활동을 하고 있는분들께 적이라고 하시면 안됩니다.
도대체 댁들이 민노당을 불온하다고 이야기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댁들의 머리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뻬껴오지마시고... 당신의 생각을 써서 동감을 이끌어 내보세요..
누구나 자유롭게 종교를 가지고, 자신의 뜻과 맞는 정당을 지지할 권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도 할말이 있고, 하지 않을 말이 있는 겁니다.
(어디가서 빼껴 오는 것도 생각을 해가면서 하시란 말씀입니다.) 2011-08-22 14:59
등록금 못 내는 대학생 편들어도 빨갱이고, 저임금 청소부 격려해도 빨갱이며, 해고노동자 복직을 말해도 빨갱이다. 북한과 대화하자고 해도 빨갱이고, 북한과 전쟁하지 말자고 해도 빨갱이다. 김대중·노무현 칭찬하면 빨갱이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명박 욕하면 빨갱이다.
그래서 빨갱이라면 나는....
빨갱이다.
하하하하.... 2011-08-22 13:15
그것은 친일파에 동조하거나 독재자를 흠모하는 길이다.
물론 친일파에다 독재자를 겸하면 금상첨화다.
그것은 곧 신성한 '반공 파시스트'로 거듭 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
이런 이야기까지 해서 안됐습니다. 무슨뜻인지... 아시겠습니까? 2011-08-22 13:19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는 사람이 더... 안그런 척 악날하게 굴거든요.
혹시....
댁의 집안에 종북좌빨이었던 자가 있었던건 아닙니까?
하도 종북좌빨 종북좌빨 하셔서 ㅎㅎ
제가 도리어 궁금해서 여쭙습니다. 2011-08-23 18:10
휴~
불쌍하긴 하지만, 포기하고 싶따....
시민들 핏켓들고 있으면, 어버입네 하며 가스통 지고 오는 분들이지요?
이제 그만 하고 싶을 만큼 질리네요...
말귀가 통하는 것도 아니고...
무섭네요.
가스통할배들... 2011-08-23 1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