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부처님의 자비 광명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자유게시판

기독교 비판하면서 닮아가자는 건가(3)

정재호

view : 1743

조성택 고려대 교수 마성 스님 비판

 

조계종 화쟁위원회가 최근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아쇼카선언)’을 발표한 것과 관련해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이 “화쟁위의 아쇼카선언은 불교고유의 법을 부정하는 것”이라며 이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에 조성택 고려대 교수가 ‘아쇼카선언’의 취지를 설명하고 마성 스님 등 일각의 주장을 비판하는 기고문을 보내와 이를 전문 게재한다. 편집자

 

▲조성택 교수

지난 8월23일 조계종 결사추진본부는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 초안을 발표하였다. 교계 내외의 언론들은 이 사실을 크게 보도하였으며 일부 중앙언론들은 사설과 기고문을 통해 이 선언의 내용과 의의를 긍정적으로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 선언에 대해 교계 내에 일부 비판적인 입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비판적 입장은 당연한 것이며, 또 바람직한 현상이다. 발표문을 ‘초안’이라한 것은 바로 이러한 대중적 논의와 소통의 과정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현안조차도 ‘남의 제사’ 바라보듯 하는 우리 불교계의 일반적인 풍토에서 선언문 ‘초안’을 꼼꼼하게 읽고 ‘고언(苦言)’과 ‘문제제기’를 하는 분들의 ‘주인의식’과 진정성에 대해서는 깊은 존경과 함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간 여러 매체를 통해 제기되는 비판을 보면서 초안의 기초와 작성에 참여한 한 사람으로서 어떤 ‘반응’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냥 찔러보는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묻고 따져서 바로잡고자 하는 질정(質正)의 진정성이 있는 비판에 대해서는 해명과 반론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 의무이자 도리이기 때문이다.

 

이번 선언에 대한 교계내의 일부 비판은 두 가지 유형으로 대별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선언’의 적실성, 발표의 형식과 절차 등 이번 선언의 배경과 절차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번 선언문 초안에 담겨있는 ‘열린 진리관’ ‘전법의 원칙’ 등 그 내용에 관한 것이다. 전자(前者)에 관해서는 해명이, 후자(後者)에 관해서는 반론이 필요할 것 같다.

 

선언문 초안 발표는 대중공사 전통 살리자는 취지

 

지난 9월7일자 법보신문에 실린 마성스님의 ‘아쇼카 선언에 대한 고언(苦言)’은 그 표현은 완곡하지만 이번 선언에 대한 불교계 일각의 ‘불편한 심정’과 ‘우려’를 잘 대변하고 있다. 이번 선언이 “뜬금없이” 발표된 것이라는 스님의 지적에는 공감할 바가 있으며, 비판의 상당부분도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선언문 초안을 발표할 당시 ‘선언의 취지와 배경’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었다. 자성과 쇄신의 결사와 이 선언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지금 우리 사회에 이 선언이 왜 필요한지, 이웃종교에 피해를 입어 온 불교계가 먼저 나서서 이런 선언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최종본이 아닌 ‘초안’을 발표하는 것은 어떤 이유인지, 이 선언 이후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지 등 선언의 배경과 선언 이후의 계획을 설명했어야 했다. 선언의 전후 맥락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는 가운데 선언 자체가 “뜬금없다”고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쉬운 일이지만 불교계가 이런 종류의 일처리에 미숙한 것도 사실이다. 자신을 타자화 하고 자신을 설명하기보다 공감과 유대감을 전제하는 전통적인 ‘식구의식’이 종단의 일반적인 정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선언의 경우 종단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타종교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고 대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처리 방식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늦었지만 향후 대중공사의 과정을 통해 선언의 전후맥락과 배경에 관한 충분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선은 이번 선언문 ‘초안’의 작성에 참여한 한 사람으로서 그 배경과 전후의 맥락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마성 스님이 “뜬금없다”고 느끼시는 점에 대해 해명하고자 한다.

 

이번 ‘종교평화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은 아무런 대책 없이 스스로 ‘무장해제’를 선언한 것도 아니고 법응 스님의 표현처럼 “일방적인 짝사랑”의 선언도 아니다. 이번 선언은 종단 내적으로 보면 ‘자성과 쇄신’이라는 결사의 기조 하에서 불교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실천이다. 이번 종교평화선언의 핵심내용은 말 그대로 종교 간의 평화이지만 이 선언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은 우리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갖가지 갈등과 분쟁을 극복하고 사회적 대통합을 이루는 불교적 처방과 모델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마성스님은 이것이 정부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부가 갈등과 분쟁의 한 당사자가 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런 기대는 무리라고 생각한다. 계시의 종교가 아닌 이법(理法)의 종교인 불교는 그 교리의 확장성과 적용에 있어 어떤 종교보다도 뛰어난 종교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며 평화적 태도를 견지해왔다. 그런 점에서 ‘피해자의 자의식’을 뛰어 넘어 우리사회의 분쟁과 갈등의 해결에 불교계가 먼저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편 이번 선언은 일회성의 단막극이 아니다. 이번 선언을 계기로 7대 종단 공동의 ‘종교평화선언’을 위한 준비 작업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중장기적으로는 관념적 선언의 차원이 아니라 법적 제도적 차원에서 종교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법안청원 작업도 준비하고 있다. 이번 선언은 이러한 일련의 계획 속에서 시작된 일이다. 종교평화선언은 우리의 짝사랑이거나 ‘넋두리’가 아니라 불교계의 대사회적 아젠다의 선점이며 갈등과 분쟁을 극복하고 상생과 공존의 사회를 위한 불교정신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내부적으로 완성된 최종본이 아닌 ‘초안’을 발표한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점이 바티칸의 교서와 구별되는 불교적 의사결정의 방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잘 알려진 대로 바티칸에서 나오는 교서는 토씨하나 고칠 수 없는 ‘최종안’이다. 신중하다고 볼 측면도 있으나 그 과정은 대단히 비민주적인, 상의하달의 중세교회적 전통이다. 오늘날 매체환경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대중지성’이 바로 불교계의 대중공사와 그 정신의 맥이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번 대중공사의 방식이 우리 사회의 다른 부문에도 적용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며 오히려 불교계가 자부심을 갖고 홍보할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양성 부정은 불교정신과도 괴리

 

한편 이번 선언의 내용에 대한 비판의 주류는 선언이 담고 있는 ‘열린 진리관’과 ‘전법의 원칙’에 관한 것이다. ‘열린 진리관’의 핵심 내용은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타종교의 가르침을 동일화 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나는 타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이 어떻게 불교와 타종교의 진리를 동일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열린 진리관의 핵심내용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선언문 초안에서도 “다양성은 곧 ‘차이’를 인정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불교와  타종교의 가르침을 “동일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또 다른 비판에는 타종교의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 “불교를 부정하는 행위”라는 주장이 있다. 한켠에서는 선언이 불교와 타종교를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하고 다른 한켠에서는 “불교를 부정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 기독교의 창조론을 들고 있다. 그 주장의 핵심은 “현 불교와 종교 갈등의 대표적 종교인 기독교계와의 중대한 차이는 절대적 신 즉 창조주의 인정 또는 불인정이다. 즉 ‘불변고정’이냐 ‘무상’이냐하는 절대 융섭할 수 없는 괴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입에서 나온 비판이라면 그러려니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불교인의 입에서 나온 비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기독교의 교리를 ‘창조설’ 하나로 수렴하는 해석도 문제이거니와 ‘창조설’에 관한 신학적 해석에도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내 종교의 언어로 다른 종교를 판단하고 재단하는 것은 극히 조심해야 할 일이다. 만약 다른 종교인이 불교를 윤회설 하나로 일관하여 판단한다면 이는 온당한 불교이해라고 할 수 없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한편 ‘불변고정’과 ‘무상’을 “절대 융섭할 수 없는 괴리”라고 하는 주장에는 아연해진다.

 

불교, 특히 대승불교의 근본 사상은 언어와 개념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언어· 개념의 차별과 대립적 구별을 벗어난 불이(不二)의 세계가 바로 불교가 추구하는 진리의 세계가 아닌가? ‘불변고정’과 ‘무상’을 대립적으로 본다면 ‘공’과 ‘색’, ‘일(一)’과 ‘다(多)’의 융섭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조론’의 ‘물불천론’(物不遷論)은 무상을 부정하는 것이던가? 불교가 인류에게 던져준 가장 큰 가르침은 ‘언어’를 넘어선 진리의 세계이다. 기독교 신학이 근대 이후 ‘코페르니쿠스적 대 전환’을 갖게 된 것 또한 동양종교, 특히 대승불교의 진리관에서 얻은 영감이라는 것은 많은 신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싸우면서 닮는 것인가?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의 지적대로 “한물간 지 오래인 서구 그리스도교를 열성적으로 추구”하는 한국 기독교의 단순한 맹목성을 지금 한국불교에서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이번 종교평화 선언은 한편으로는 종교근본주의자들의 ‘열린 태도’와 ‘각성’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쩌면 더 중요한 것으로, 진보적이며 열려있는 종교인들 간의 대화를 열기 위한 것이다. 이웃에게 대화와 평화를 제안하면서 내 종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불교계 일부의 우려처럼 다른 종교에 진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불교의 근본이 흔들리지 않는다. 2600년의 불교사는 그것을 증명해 준다. 끊임없는 자기 부정의 역사요,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확신과 함께 그 ‘확신’의 고정성을 끊임없이 반성하는 불교의 근본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다문화 다종교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 환경에서 또 한 번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번 선언은 그 시작이다.

 

종교는 삼차 서비스업이 아니다

 

“전법은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전법은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실현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다” 이 선언의 내용에 대해 “포교를 포기하는 선언”이라거나 “전법의 의지를 꺾는 선언”이라는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법을 설하라고 하는 것은 이미 부처님의 전법게에도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반응과 비판이 나오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교인 수를 늘이는 것을 전법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는 상품을 파는 행위가 아니다. 상품을 파는 경우조차도 요즘의 세련된 기업광고는 많이 팔고자하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상품을 판다.

 

선언의 어디에 전법의 의지를 꺾는 내용이 있는지 묻고 싶다. 선언에서는 “실천적 활동을 통해 내 믿음의 참됨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종교 활동이며 불교의 어른 된 모습 아닌가? 일부 지자체장들의 ‘성시화 운동’이나 어느 경찰청장의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종교인들은 많은 우려를 하고 있다. 기독교가 그러니 우리 또한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야 말로 패배주의자의 넋두리일 것이다. 민족불교를 얘기하고 한반도에서 17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불교가 먼저 올바른 포교의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 왜 문제인지 궁금하다. 이 또한 ‘싸우면서 닮아가는“ 또 다른 모습일까 걱정스럽다.

 

아일랜드 출신 신부이자 신학자인 윌리엄 존스톤(William Johnston)은 “종교의 목표가 교인수를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봉사하는 것, 그리고 인류의 구원을 증진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라고 하였다. 나아가 기독교인들이 선불교를 배울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기도 했다. 존스톤 신부의 이 주장이 기독교의 포교의지를 꺾었다거나 ‘훼종행위’라고 비난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중요한 것은 동양과 서양의 대표적인 두 종교가 만나 함께 바람직한 종교문화를 만들어 인류의 진정한 해방과 해탈을 이루어 가는 일이다. 이런 전제하에서 종교 간의 진정한 ‘대결’과 ‘경쟁’이 이루어져야 한다. 종교는 손님의 수를 늘이고자 하는 삼차 서비스업이 아니라 인류의 교사이기 때문이다.

법보신문 2011-09-15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자동입력방지 스팸방지를 위해 위쪽에 보이는 보안코드를 입력해주세요.

먼저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주세요.

창닫기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