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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쇼카 선언, 정법호지·파사현정 정신 퇴색(2)

정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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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조계종 화쟁위가 발표한 ‘아쇼카선언’을 두고 종단 안팎에서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이 본지에 ‘아쇼카 선언’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을 보내왔다.
마성 스님은 “화쟁위가 발표한 아쇼카 선언은 내 종교가 소중한 만큼 남의 종교도 인정하자는 취지로 생각되지만 자칫 잘못 이해하면 불교 고유의 법을 부정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스님은 “올바른 불교도라면 사교(邪敎)나 불의(不義)와 타협해서는 안된다”며 “이교도의 삿된 가르침을 인정하거나 용인한다면 이미 불교도이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스님은 또 “불교도가 먼저 전쟁을 일으키거나 타종교인을 박해한 역사가 없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제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다른 종교와 갈등을 일으킬 염려가 없다”며 “따라서 (불교도가) 다른 종교와 평화를 실현하겠다는 선언을 별도로 만들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마성 스님은 한발 더 나아가 “화쟁위의 이번 선언은 불교의 ‘정법호지(正法護持)’와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정신을 퇴색시키고 있다”고 주장해 논란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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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마성 스님의 기고문 전문.

<아쇼카 선언>에 대한 고언(苦言)
지난 8월23일 조계종 자성과 쇄신결사본부 화쟁위원회(위원장 도법스님)가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초안)을 발표했다. 화쟁위는 한국사회의 종교평화 실현을 위해 “열린 진리관, 종교다양성의 존중, 전법과 전교의 원칙, 공적영역에서의 종교 활동, 평화를 통한 실천”을 불교도가 앞장서서 실천하자고 제안했다.
조계종 화쟁위가 초안에 불과한 선언문을 발표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왜 불교계에서 뜬금없이 이러한 선언문을 발표하는지 의아했다. 그래서 선언문 전체를 자세히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몇 가지 문제점들이 발견되었다. 먼저 이 선언문의 문제점들을 짚어보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원효 스님 화쟁론, 불교내부 갈등 잠재우기 위한 것
첫째, 이 선언은 종교계 혹은 불교계 내부에서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가차원에서 해야 할 일을 조계종 화쟁위에서 먼저 들고 나온 것 같다. 그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화쟁위의 활동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원효스님의 화쟁(和諍)사상을 너무 확대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원효스님의 화쟁론은 당시 불교 내부의 종파와 이설로 인한 갈등을 잠재우고 하나로 묶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화쟁론을 불교와 다른 종교(이교도, 외도)와의 화해에까지 확대하여 적용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 같다.

둘째, 불교는 이와 같은 선언 혹은 규범을 별도로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불교도들은 이미 2,600여 년 동안 부처님이 제시한 ‘전도선언(傳道宣言)’의 정신에 따라 길을 잘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옛 법을 고쳐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은 권장할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도들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다른 종교와 사상은 물론 동물에게까지도 자비를 베풀고 있다. 불교사에서 불교도가 먼저 전쟁을 일으키거나 타종교인을 박해한 역사가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모름지기 불교도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제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다른 종교와 갈등을 일으킬 염려가 없다. 굳이 다른 종교와 평화를 실현하겠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완성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선언문은 시민단체에서 만들어 정부에 건의하거나, 국가의 법령으로 제정하여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가르칠 때 비로소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국민화합을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셋째, 이 선언의 전체적인 흐름은 포교에 대한 의지를 꺾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적은 아직 무기를 갖고 있는데 아군부터 먼저 무장을 해제시키는 모양새다. 종교의 생명은 포교에 달려 있다. 포교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종교는 소멸되고 말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붓다의 가르침일지라도 그것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없다면 문화유산이나 골동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불교의 철학이나 사상을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종교로서의 불교를 널리 포교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 붓다의 간절한 소망은 첫째도 포교, 둘째도 포교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넷째, 이 선언은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과 아쇼카의 비명을 토대로 작성되었지만, ‘정법호지(正法護持)’와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정신을 퇴색시키고 있다. 선언문에서 “불교는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언뜻 보면 이 문장은 종교다원주의를 표현한 것 같다. 즉 내 종교가 소중한 만큼 남의 종교도 인정하자는 취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칫 잘못 이해하면 불교 고유의 법을 부정하는 것처럼 들린다. 아직 불교의 교리에 투철하지 못한 초심자들의 신행에 큰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리고 올바른 불교도라면 사교(邪敎)나 불의(不義)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 이교도의 삿된 가르침을 인정하거나 용인한다면, 이미 불교도이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직은 파사현정의 깃발을 더 높이 들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종교평화선언, 불교계가 주도할 일 아니다
다섯째, 이와 같은 선언을 불교계에서 주도할 일이 아니지만, 이미 언론을 통해 발표해 버렸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보완하여 더 좋은 선언문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선언문의 제목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초안의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에서 ‘종교평화선언’으로 바꾸고, 부제인 ‘21세기 아쇼카 선언’은 삭제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왕 ‘종교평화선언’이 필요하다면, 그 대상을 불교도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이 선언문의 내용에 따르면, 불교도보다는 오히려 다른 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제인 ‘21세기 아쇼카 선언’이라는 제목은 어색할 뿐만 아니라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비록 이 선언문이 기원전 3세기에 생존했던 아쇼카왕의 칙령(勅令)을 ‘룰 모델’로 삼았다할지라도, 이것은 분명 오늘의 ‘조계종 선언’이다. 이것이 어찌 ‘아쇼카 선언’이 될 수 있는가? 아쇼카왕이 직접 선언했다는 말인가? 만일 아쇼카왕의 마애법칙(磨崖法勅) 제12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면, 그렇게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아쇼카 왕 행적 아전인수격 해석도 문제
여섯째, 엄격히 말하면 아쇼카왕의 마애법칙 제12장에 나타난 칙령(勅令)은 문자 그대로 ‘왕의 명령’이다. 이 칙령을 ‘아쇼카의 선언’이라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아쇼카왕이 칙령을 발포(發布)한 것은 자신의 통치이념, 즉 자신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선언문도 아니고 불교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아쇼카 비문 연구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츠카모토 게이쇼(塚本啓祥) 교수는 “아쇼카의 사신 파견은 그의 법(Dhamma) 보급과 감독을 위한 것이지, 붓다의 교법을 위한 것은 아니다.”(호진․정수 옮김, '아쇼까왕 비문', 불교시대사, 2008, p.84)라고 지적했다. 불교도들은 지나치게 아쇼카왕의 행적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일곱째, 마애법칙 제12장에 나오는 내용의 핵심 구절은 다음과 같다. 즉 “그것은 부적당한 기회에 자신의 종파를 칭찬하고, 다른 종파들을 비방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설사 적당한 기회라 해도 모든 경우에 [말을] 삼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위의 책, p.119)로 되어 있다.
사실 아쇼카왕은 종교인이 아닌 통치자로서 나라 안의 다양한 종교, 즉 불교․바라문․아지비까(邪命外道)․니간타(자이나교)를 하나로 화합시키기 위해서 그러한 정책을 펼치게 되었던 것이다. 결코 불교를 위해서 그와 같은 정책을 펼친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덕택에 불교포교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아쇼카왕은 비록 불교도였지만 “모든 종파를 보시와 여러 가지 공양으로써 존경한다”(마애법칙 제12장)고 했다. 즉 다른 종교에도 관용을 베풀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 나라의 통치자가 취할 태도인 것이다.
오늘날 이명박 대통령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비록 기독교 신자일지라도 나라 안의 다른 종교에도 관심을 갖고 차별 없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여덟째, 마애법칙 제12장을 지나치게 해석한 측면이 있다. 선언문에서 “내 종교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종교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웃종교에 대한 인정과 관용이라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그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라는 대목은 패배주의자의 넋두리처럼 들린다.
다른 종교를 내 종교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 즉 종교 간의 상호존중의 자세는 꼭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웃종교에 대한 인정과 관용이라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그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가 없다.
백보 양보하여 설령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불교계에서 굳이 공개적으로 언급할 필요가 있는가? 불교계에서 먼저 ‘다른 종교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배우자’고 선동해서야 되겠는가? 이것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에서 할 말인가? 만일 다른 종교의 가르침을 인정하고 용인한다면, 이미 불교도이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선언문의 전체적인 취지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문장들은 많은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 더 좋은 문장으로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불교, 다른 종교와 분명한 차별성 있다
아홉째, 이 선언문 내용에서 불교와 다른 종교의 진리가 같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 점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는 다른 차별성을 분명히 갖고 있다. 그 차별성을 강조해야만 불교의 존재이유를 부각시킬 수 있다. 모든 종교가 선(善)을 지향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그 궁극적 목표와 실천 방법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은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교만의 고유한 사상이다. 특히 무아설(無我說)은 다른 인도의 사상과도 확연히 다른 특성을 갖고 있음은 말할 나위없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것도 무아설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그 차별성을 잃어버리고 결국 힌두교 속에 습합되고 말았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열째, 이 선언문의 내용은 물론 문장과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너무나 형편없다. 불교학자의 자문을 받았다면서, 일반인들이 한번 읽고 그 뜻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글이 아니다. 이와 같은 선언문은 길어도 1,000자를 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홉 쪽이나 되는 선언문을 누가 끝까지 다 읽겠는가? 이것은 선언문이 아니라 기자회견문에 가깝다.
선언문은 아주 간결한 문장으로 그 핵심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글이어야만 한다. 이 선언문 발표가 일회성 행사로 끝날 것이라면 몰라도, 미래 세대에까지 남는 글이 되기 위해서는 ‘비명(碑銘)’과 같은 명문이어야 할 것이다.
그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아쇼카왕의 마애법칙 제12장과 ‘전도선언’의 내용을 담고 있는 󰡔잡아함경󰡕 권39, 1096경 「승삭경(繩索經)」이 될 것이다. 「승삭경」은 254자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는 불교의 존재의미와 포교의 목적은 물론 그 방법까지 아주 구체적이면서 명쾌하게 서술되어 있다.
21세기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언문이 기원전 3세기 아쇼카왕의 비명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렇게 압축된 선언문은 전국 사찰의 안내판이나 돌에 새겨,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한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이 글은 불교도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조계종 화쟁위에서 야심차게 추진하는 이 일이 원만히 성취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쓴 것이지, 결코 방해하거나 비방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마성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법보신문 2011-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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