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가 있던 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계사 마당에서 만난 갓 100일을 넘은 아기의 머리에 손을 얹고 광명진언을 외우니, 아이 엄마가 좋아한다. ‘박카스’를 떠올리는 건 스님의 대중공양 때문이다.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의 포교원장 집무실 냉장고에는 박카스가 채워져 있다. 언제 어느 때나 손님이 오면 손수 꺼내주며, 어른 스님을 찾아온 객들을 편안하게 맞이한다.
포교원장으로서 지난 5년간 자상하고 따뜻하게 스님과 신도들을 맞아줬던 혜총스님이 퇴임을 앞두고 있다. 스님은 오는 11월3일 이취임식을 갖고, 신임 포교원장으로 선출된 지원스님에게 바통을 넘긴다. 퇴임 한 달 여를 남겨둔 지난 9월18일 포교원장 집무실에서 혜총스님을 만나 소회를 들었다.
만난 사람=이성수 편집국장
- 퇴임을 앞둔 소회는.
= 5년이란 시간이 짧게 느껴진다. 최선을 다해 포교했지만 미진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포교원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처음도 포교, 중간도 포교, 끝도 포교’라는 마음가짐으로 임기동안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부족한 역량이지만 종단 포교를 위해 헌신한다는 각오로 1년을 하루같이, 5년을 1년같이 살려고 노력해 왔고 임기를 다하는 날까지 그렇게 할 것이다.
그간 흔들림 없이 맡은 바 소임을 다해주었던 부실국장 스님들, 포교원 종무원들, 포교원 산하단체 임원들, 중앙신도회를 비롯한 신도조직 임원들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린다. 지금까지 해온 종단사업과 지침들에 조금씩 다른 견해가 있더라도 종단발전과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 더욱 노력하고 분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임기동안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사업은.
=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사업들이 없고, 눈이 가지 않는 일들이 없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초기에는 종단 핵심사업으로 선포했던 ‘어린이청소년 포교 3개년 사업’에 충실했고, 임기 중 후반에는 ‘신도교육과 조직화’, ‘사찰중심의 지역포교 활성화’에 매진했다.
그리고 다음 포교원장인 지원스님과 제6대 포교원 집행부가 보다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제도 정비작업을 진행했다. 특히 포교의 근간이라 할 어린이.청소년포교에 많은 힘을 쏟았다.
포교의 근간이라 할 어린이청소년포교 주력
전법중심도량제 도입해 전국 110개 사찰 선정
- 어린이청소년포교분야 성과는 무엇인가.
= 어린이.청소년포교의 경우 임기 초중반 핵심과제로, 종단 차원의 3개년 사업이 완료 된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 어린이청소년위원회 설립, 어린이청소년 전법중심도량 선정 등을 추진했는데, 우선 예산확보가 필요했다.
종단의 사업예산 외에도 안국선원, 한마음선원, 화성 신흥사 등 뜻을 같이하는 사찰에 도움을 요청해 10억 원 이상의 목적기금을 조성했다. 이를 토대로 종단 예산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사업들을 집행했다. 지속적인 발전 토대를 구축하겠다는 일념으로 어린이청소년포교중심도량 제도를 시행했다.
초반에는 포교원 규칙으로 제정하여 지정 운영하다가 최근 전법중심도량 운영에 관한 령으로 법적 근간을 마련했다. 현재 110여개 사찰이 어린이청소년 분야 전법중심도량으로 기능을 하고 있다. 종단의 어린이 청소년 포교 종책을 수립할 종령기구인 어린이청소년위원회도 설립했다. 사단법인 동련과 사단법인 파라미타청소년연합회를 두고 있으며, 종단 차원에서 장기적으로 계층포교를 지속하기 위한 사업을 담당한다.
- 신도교육과 조직화, 멤버십 신도증 발급도 주요 성과로 꼽힌다.
= ‘신도교육과 조직화’ 사업은 임기 중후반 핵심과제이기도 하다. 그간 포교원은 신도의 등록과 교육, 교육 및 신행경력에 따른 단계의 설정 등을 고민했다. 또 신도회와 신도단체의 체계 재정립, 종단 정체성 확립에 기반한 조직화 등 제반 분야에 대한 재설계와 구체적인 사업을 추진했는데 그 첫 번째가 신도등록 사업이다.
5대 포교원은 1996년부터 시행되어 온 신도등록과 신도증 발급사업을 전면 개편해, 신도와 사찰, 종단에 이익이 되는 멤버십 신도증 사업을 시작했다. 2009년 4월 개편이후 2년 6개월만에 멤버십 신도증을 발급받은 분들이 15만 명에 이르고 있다.
- 새로 도입한 신도품계제도는 어떤 것인가.
= 신도품계제도는 그간 신도법 상에만 있는 상징적인 조문이었지만, 5대 포교원은 이를 교육 및 신행 단계별 현실에 맞도록 구체화하고 올해부터 신도품계제도를 전면적으로 시행했다. 이에 따라 조계종 신도는 신도증을 발급받는 것으로 종단신도의 기본품계인 발심 품수자가 됐다. 현재 15만 명 이상이 신도등록을 해 발심품계를 품수 받은 것으로 등록돼 있다.
이와 함께 기본교육을 받은 신도에게 수여하는 행도품계 품수자가 5만 명 이상에 달할 것으로 보이며, 전문교육 또는 그에 상응하는 재교육(신행경력)을 받은 신도에게 수여하는 부동품계 품수자가 3만 명 이상일 것으로 예상된다. 마지막 단계인 선혜품계 품수자까지 매년 그 수가 확대돼 종단 신도조직화의 기본토대를 형성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그간 종단의 신도회 및 신도단체 등 신도조직 전반에 대하여 종단 정체성 함양과 확립을 추진했는데, 이 또한 지난 7월5일 관계 종법령 개정완료로 이를 시행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지역·계층별 전법단 구성 200여 명 스님 활동
지도법사 활동 주지 스님 지원하는 방안도 마련
- 전법단을 창립한 것 또한 지역포교의 구심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 분야별, 지역별 전법단은 사찰중심의 지역포교활성화 사업을 추진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 사업이다. 지난 2010년 4월 전법단 출범식을 봉행한 뒤, 현재까지 분야별 전법단과 지역별 전법단 11개가 조직됐다. 지도법사단과 지원단으로 구성된 전법단에는 200 여명의 스님들이 결합해 함께 포교에 대해 고민하며,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광주전남 전법단의 경우 섬포교 등 새로운 시도를 통해 부처님 가르침을 하는 등 향후 전법단은 종단 포교의 중추적 역할을 해 나갈 것이다. 특히 관련 령을 제정해 지도법사로 활동하는 주지스님에 대한 특례를 부여한 것도 성과 중 하나다.
- 체육인포교에도 많은 관심을 쏟은 것으로 알고 있다.
= 종단 차원에 선수촌 위로방문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체육인 불자들의 신행을 독려하고 지도할 수 있는 매개가 없는 것이 항상 아쉬웠다. 그래서 지난 2007년 불자 체육인 신행단체 설립을 추진했다. 여기에는 한마음선원 등 여러 사찰의 후원이 뒷받침됐다.
2007년 8월 창립대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한 뒤 발기인총회를 거쳐 10월 체육인불자회가 탄생했다. 이듬해에는 선수촌에 법당도 개원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는 현장을 직접 방문해 불자선수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불교계 노력도 남다르지 않았나.
=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는 강원도민과 전국민의 관심으로 성사될 수 있었다. 특히 불교계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 두 번의 도전기간 동안 강원도지역 사찰을 비롯한 전국에서 십수차례 올림픽유치기원 행사를 개최했다.
특히 올해는 종단차원에서 동계올림픽 평창유치를 위한 대규모 기원법회를 태릉선수촌에서 봉행하고, 개최지가 발표는 날까지 21일간 전국 사찰에서 기도를 올렸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21일간 하루도 빼놓치 않고 조계사 법당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기원하며 1080배 기도정진했다. 전국의 많은 스님과 불자들의 노력 덕분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가 가능했다고 본다.
체육인불자회 설립 주도 동계올림픽 유치에 힘써
포교원 산하 단체 위한 공간 마련 못해 아쉬워
- 포교원장 소임을 맡아 어려웠던 점은.
= 굳이 고충이라고 말한다면 예비비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포교원은 다른 기관이나 부서보다 예측가능한 사업을 하기가 힘든 곳이다. 어떤 현안이 발생했을 때나 예산 외에 꼭 필요한 사업이 생겼을 때 예산이 없어 사업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법도량사업을 추진할 때나 체육인불자회를 설립할 때도 주요 사찰의 지원이 없었으면 어려웠을 것이다. 향후 포교원이 원활히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예산지원이 돼야 한다. 예산항목에 예비비 규모를 확대해야 할 것이다.
- 임기 내 부족했거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 종단운영의 여건 상 포교원에서 사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일들이 수월하지는 않다. 그러나 복이 많아서인지 임기초반에는 전 총무원장 지관스님의 배려 덕분에 다양한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현 총무원장 자승스님 역시 취임과 더불어 포교와 신도조직화에 많은 힘을 실어줘 좋은 여건에서 지금까지 일을 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신도교육과 조직화 사업을 임기 초반에 시작하지 못한 것이다. 좀 더 서둘렀더라면 더 많은 성과를 다음 집행부에 인계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지 못했다. 또 일반불자나 시민을 위한 불교문화회관을 건립하지 못한 것이다.
그 이전에 포교원 산하 포교단체들에게 제대로 된 활동공간을 마련하지 못한 것도 마음이 아프다. 이들의 안정적인 활동과 사업을 위해 공동 사무공간과 교육공간 마련이 절실하지만,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다음 포교원 집행부에 넘긴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
- 퇴임 이후 계획은 무엇인가.
= 부처님께서 45년간 포교하신 면면을 들여다보면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일관하셨다. 그걸 생각하면 우리 스님들도 당연히 포교해야 한다. 제도권 밖에 나가서도 나의 일로 알고 다음, 그 다음 생에도 포교할 것이다. 수행이 곧 포교요, 포교가 곧 수행 아닌가.
- 끝으로 당부의 말씀이 있다면.
= 부처님께서 전도선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불교는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한 종교다. 이게 곧 우리가 포교하는 목적이다. 많은 불제자들이 부처님 마음을 갖고 말하고 행동하길 바란다. 그렇게 하면 본인은 물론 이웃에게도 이익이 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사진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 혜총스님은…
열한살 때인 1953년 어머니 따라 절에 갔다. 당시 스님이 찾아간 곳은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율사인 자운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통도사. 거기서 자운스님의 상좌인 보경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출가 당시 자운스님은 혜총스님에게 참회하라며 3000배를 시켰는데, 뜻도 모르고 한 3000배가 스님에게는 중요한 수행법이 됐다.
그렇게 사문의 길에 들어선 혜총스님은 1956년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3년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63년 해인사승가대학과 1966년 범어사승가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동국대에 입학한 스님은 1972년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석사과정을 이수한 뒤 강원에서 학인들을 지도했으며, 동화사 선암사 범어사 등 제방선원에서 안거를 했다.
특히 혜총스님은 자운스님을 40여년 간 시봉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자운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을 때 스님은 40년간 자운스님을 시봉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1977년 부산 감로사 주지 소임을 맡은 스님은 자운스님이 열반한 1992년까지 가까운 거리에서 어른을 모셨다.
스님은 어린이청소년포교 및 복지활동에도 큰 기여를 했다. 대한불교어린이지도자연합회장, 사회복지법인 불국토 대표이사, 용호종합사회복지관장, 부산불교사회복지청소년기관협의회장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포교활동을 벌였다.
이런 활동을 인정받아 조계종 포교대상 공로상(1989), 종정 표창(1992), 국민훈장 동백장(1988), 국무총리 표창(2003)을 수상했다. 지난 2006년 11월 제5대 포교원장으로 취임한 스님은 오는 11월3일 퇴임식을 앞두고 있다.
[불교신문 2757호/ 10월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