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광복을 맞은 요즈음 이승만이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조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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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종류불문! 손닿는 대로 책을 즐겨 읽는 편이나, 아직은 남을 설득 시킬만한 능력은 가지지 못하여... 쟁쟁하게 공부하는 분이 많은 포교사단에서 글 쓰는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다시금 조명되는 이승만과 kbs방송국 때문입니다.
지금,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kbs 방송국에서 보수골통 기독교인이었던 이승만을 구국의 아버지로 미화하여 방송하겠답니다.
이승만을 겪었거나 그를 잘 아는 독립운동 하셨던 분들의 자손과 뜻있는 시민들이 kbs 앞에서 방송반대를 위해 농성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방송의 여파는 포교사님들도 아시다시피 엄청납니다.
잘못된 자료를 가지고, 혹은 의도하는 바를 가지고 각본을 쓰고 그것을 바탕으로 방송을 한다면... 선량한 국민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될 것입니다.
웬 상처냐구요?
...
예(例)를 들겠습니다.
지금 일본에서 독도를 죽도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영토라고 억지 주장을 하며, 자라는 아이들에게 그것도 제도권에서 발행하는 교과서에 그렇게 실었습니다. 이대로 배우고 자란 아이들은 독도가 자신들의 땅이라고 잘못 인식하게 될 것이어서, 앞으로 한일 외교에 많은 장애와 시련으로 작용되리라 여겨집니다.
“방송(신문)에서 방영(보도)하는데, 설마 틀린 것을 보도하겠어?”라고... 많은 분들이 맹신(盲信)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의식에 아무런 의심 없이 그대로 주입합니다. 그렇게 되면 역사는... 다수(多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거슬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포교사님들은 진리(眞理)를 찾아 길을 떠난 선재동자처럼... 참된 공부를 하고 계십니다.
8정도(八正道)에 관해서는 불교에 관해 일천한 저보다 더욱 깊이 해량하고 계실거라 생각하지만, 아래에 다시 八正道를 간략히 써보는 이유는 正見을 이야기 하고 싶어서입니다.
正見은 정도를 향한 첫 시작의 발걸음으로 바르게 보아야 올바른 견해를 가진 수 있으며 다음 단계의 수행(修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8正道
①정견(正見) : 올바른 이해로서, 존재의 본질에 대하여 사성제로 설해지는 불교적 眞理觀을 확신하는 것이다.
②정사유(正思唯) : 정견에 따라 철저히 실천하겠다는 각오이다.
③정어(正語) : 거짓말, 중상하는 말, 모욕하는 말 따위를 삼가는 것이다.
④정업(正業) : 생명을 해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부정한 성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⑤정명(正命) : 불교의 가르침에 부응하지 않는 직업은 택하지 않는 것이다.
⑥정정진(正精進) : 나쁜 마음가짐을 피하고 바른 마음가짐을 계발하는 것이다.
⑦정념(正念) : 신체와 감정과 사고의 움직임에 대하여 깨어 있는 것이다.
⑧정정(正定) : 바르게 집중하여 명상하는 것이다.
이렇게 긴 글을 쓰는 것은 어떤 이권이나 대가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포교사님들께서 우리나라 역사와 불교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 도움이 되고자 함입니다.
1910년 경술국치를 알고 계시지요?
우리 임금의 옥쇄를 도둑질 당하여 일본과의 강제합방에 조인되었습니다. 이 부분을 일본이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어 요즈음... 일본과의 강제 합방은 무효다! 라는 주장이 재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불법이거나 합법이거나... 결국 1910년 합방은 되었지만, 일본은 그 이전부터 우리나라의 정치와 치안 경제 문화를 모두 쥐락펴락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저질은 못된 행태는 저보다 연배가 많으신 분들이니 더 잘 알 것입니다. 그치요?
1800년대가 저물고 1900년이 시작되면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합니다. 그들은 우리 국민들을
식민지의 노예로 취급한 결과가 인신매매였습니다.
“응! 인신매매도 했어?” 하실테지요.
한 예를 들면 갑자기 ‘토지조사’를 시행하여 그 과정에서 너무도 부당하게, 법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목숨인 땅을 빼앗아 버려 ‘폭력을 유도’하는 등 일본 경찰은 일반 백성들에게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법에 걸리도록 조작하였습니다. 힘없는 백성들은 억울했지만, 형을 치르거나 돈으로 갚거나 몸을 팔아야 했습니다.
정말!!!!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른 채 배를 탄 사람들은 미국의 마지막 주(州)인 하와이에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로 팔려 나갔습니다.
십오륙 세의 여자들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동남아 각지의 일본 군대가 주둔된 곳으로 팔려 나갔구요.
십여 년 전부터 연로하신 정신대할머니들이 모임을 결성하여 수요일 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꾸준히 항의 집회를 하고 있어 이제 많은 분들이 정신대할머니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와이로 팔려간 분들은 그곳에서 나라 잃은 백성의 아픔을 겪으며 많은 착취를 당했지만, 독립에 대한 희망과 부지런함으로 어려움을 견뎌내셨었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하와이의 한인들이나 조정래님의 아리랑을 읽어보시길 권유합니다.)
그곳 하와에서 사셨던 동포2세가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요즈음 우리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이승만’을 좀 더 정확히 알리러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자료를 가지고 입증하는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니터 상에서 긴 글은 저도 잘 못 읽는 편인데... 이렇게 긴 글을 쓰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꼭 읽어 보시길 권하여 드립니다.
읽어보시고 요즈음 mb에 아부하는 kbs의 행태가 정말 국민을 위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 판단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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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부터 1905년 사이 7200여명의 한국인들이 갤릭호를 타고 미국 하와이 州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하와이 여러 섬에 있는 사탕수수 놏장에서 일하기 위한 이 대규모 노동이민은 그 뒤 크게 불어날 美國 한인사회의 계기가 됐다. 그들에 의해 1909년 만들어진 ‘국민회’는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단체로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에서 각각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모국(母國)을 잃어버린 하와이 한인(韓人)들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된 일을 하면서도 언젠가 올 독립을 바라며 ‘국민회’에 피 같은 성금(獨立資金)을 냈다.
1912년 네브래스카 대학에서 군사공부를 한 독립운동가 박용만을 초청해 국민회 임원을 맡기고 소년병학교를 지원해주었던 것은 당시 한인들의 바람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1913년 국민회와 박용만의 초청으로 이승만이 하와이에 온 뒤로 모든 것이 변했다. 이승만에게 하와이 시절은 美國社會에 한인 독립운동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알린 시기였지만 하와이 한인들에겐 불열과 반목, 대립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하와이 동포2세 이자 사료(史料) 수집가인 로버타 장(80)씨는 “한인사회의 분열은 이승만으로부터 비롯됐다.”고 힘주어 말한다.
(1910년대 하와이에서 일어난 하와이 한인사회의 분열에 대해서는 법정소송 자료, 당시 한인사회 내부에서 일어난 폭등에 대한 신문기사 등 다양한 기록들을 찾아 조사한 후 기록한 것들이다.)
무력투쟁을 강조한 박용만 파와 외교노선을 강조한 이승만파의 대립이 분열의 중심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장씨는 한인사회 분열의 정확한 실체를 보기위해 다른 접근법을 택하고 있다.
국민회와 이승만의 부동산 거래 내역을 들여다본 것이다. 하와이 등기소에서 찾아낸 기록들과 법정송사 기록 등을 꿰어보면, 당시 한인사회를 분열로 몰아간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다.
1915년은 국민회에 커다란 혼란이 있었던 해로 꼽힌다. 당시 회장이었던 김종학과 박용만 등 주요 간부들은 자금횡령의 의혹을 받고 남학생들의 습격을 받아 부상1)을 입고 있었으며 그 후 홍한식 목사가 새 회장직을 맡는 등 이승만 지지자들이 국민회 주요 간부직을 차지해 버렸다.
로버타 장씨는 이 사건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선 1914년 이승만의 부동산 거래를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승만은 1914년 7월 16일 여학교 기숙사를 만들기 위해 한인사회에서 거둬들인 자금 2400달러로 부동산을 구입하고, 같은 날 그 부동산을 담보로 연리 8%로 1400달러를 대출 받았다.
1년 뒤 상환일을 앞둔 상황에서 국민회를 장악한 것이다.
실제로 국민회를 장악한 직후인 1915년 7월 27일 국민회는 국민회의 자산인 여학교를 1달러에 이승만에게 매각했다. 그러나 대출받은 돈을 어디에 썼는지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있지 않고, 상환의 책임은 국민회에 있었다.
이처럼 하와이에서 이승만은 줄곧 국민회의에 그림자만을 지우고 국민회 자산과 한인사회 공동의 자산을 자신개인의 것처럼 쓸 수 있도록 하는 작업에 매달렸고, 이를 위해 한인사회를 극심한 분열로 몰아갔다며 부동산 등기 기록들과 법정소송 기록이 그 증거라고 장씨는 주장했다.
이승만은 1916년 자신의 이름으로 4500달러에 사들인 부동산과 여학생 기숙사를 담보로 삼아 4250달러를 대출받았고, 국민회 자산인 남학교를 양도받아 이를 담보하여 3500달러를 대출받았다.
그러나 대출금은 어디에 썼는지 기록을 남기지 않고 상환의 책임은 국민회에 떠넘기는 패턴은 계속되었다고 했다.
이에 반대했던 새 국민회 회장 홍안식목사는 별다른 이유 없이 다른 섬으로 전출을 갔고, 다른 이승만파 국민회 간부들이 이를 승인했다.
그 과정에서 1918년 이승만이 주도한 자금 집행에 의문을 품고 반발한 국민회 회원들이 살인미수 혐의로 고소를 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장씨의 기록을 보면, 이런 패턴은 이승만이 임시정부 수반이 되기 위해 상해로 떠났다가 다시 하와이로 돌아온 1921년 뒤에도 계속된다.
임시정부 수반의 권위로 국민회를 해체하고, ‘교민단’이라는 새로운 한인단체를 세운 이승만은 “마치 부동산업자처럼 끊임없이 부동산을 사고 팔았”고, 1918년 자신이 독자적으로 만든 ‘한인 기독학원’에 국민회 자산을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국민회의 재정감시를 피하기 위해 가짜 임원들로 구성된 이사회로 부동산 매각을 승인 받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패턴에 이승만 지지자들도 결국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새로운 한인촌 개간, 벌목사업 등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기 위해 이승만이 주도해 만든 ‘동지식산회사’를 두고 벌어진 폭동이 그 대표적 예이며, 동지식산회사가 잇따른 사업실패로 파산에 이르자 여기에 투자했던 지지자들마저 크고 작은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장씨가 문제로 삼은 것은 하와이 한인들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면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선뜻 냈던 자금이 독립운동에 쓰이기는커녕 출처도 제대로 알 수 없이 쓰였다는 점이다.
장씨는 “중국과 한국의 독립운동 투사들에게 자금 지원을 하려던 것이 국민회의 본뜻이었는데, 이승만이 한인사회를 장악한 동안 단 한 번도 그들에게 자금이 전달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장씨는 “한인사회를 분열시켜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챙긴 것이 이승만이란 인물의 본질”이라고 비판했다. 장씨의 자료를 검토한 재미한인 독립운동사 전문가인 안형주씨는 “기존의 연구 성과에 더해 부동산 기록을 통해 하와이에서 이승만이 어떤 일을 벌였는지 직접적으로 밝혀줬다.”며 “이 부분에 대해 역사학자들이 연구를 집중해 이승만의 실체적 모습을 더욱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시 |
사건 |
부동산과의 관련성 |
1915년 01월 |
*국민회 자금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승만파가 박용만, 김종학 등을 몰아내고 nrals회를 폭력으로 장악 |
*국민회 자산인 여학교를 이승만에게 1달러에 매각 |
1916년 12월 |
*자금집행 승인을 거부한 새 회장 홍한식목사가 임기 중 다른 섬으로 전출 |
*국민회 자산인 남학교를 이산만에게 명의 이전 |
1918년 03월 |
*파리평화회의 파견을 앞두고 이승만이 박용만의 일본군함 폭파계획을 언론에 노출 *한인기독학원 설립 |
*이승만이 갖고 있던 국민회 자산인 여학교, 여학생기숙사, 남학교 등을 모두 매각 |
1921~1924년 |
*상해임시정부 차원에서 국민회를 해체하고 교민단을 설립 *동지식산회사 운영 및 동지촌 개간 |
*국민회 자산을 한인기독학원에 1달러에 매각 *한인기독학원 자산 일부를 국민회 승인 없이 매각 |
1926~1930년 |
*동지식산회사 파산 및 교민단 내부에서의 대대적인 소송 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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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우신 이대통령 우리대통령 그이를 길이길이 빛내오리다 ..
이 노래 아십니까? 이승만대통령 집권시에 불리워졌던 이대통령 찬가입니다...
그저 헛웃으만 나옵니다... 2011-08-23 1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