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부처님의 자비 광명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자유게시판

`5.18 - 친일파 기술 안한 교과서, 검정통과 어려울 것`

조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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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요즈음...

우리 정부는 '이슈'에 상당히 민감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에 근현대사 상당부분을 윗분들 눈치를 봐가며 알아서...

뺄건 빼고...

기술하겠다해서 지난 주 상당히 논란이 되었었습니다.

(역사를 기술함에 있어서 자신들 쪼대로 하겠다는 이 어리석은 배짱의 힘은 어디서들 나는지 ....)

 

 

대한제국이 탄생하기 전 우리민족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백성이었습니다.

조선은 유림과 사림으로 대표되는 선비의 나라였습니다.

왕은 근면과 검약 애민을 배웠고, 실천하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에서 만든 조선왕조 실록이라고 들어보셨지요?

조선왕조 실록은 세계적 기록유산으로, 그 역사적 의의를  간단히만 살펴보아도 엄청납니다. 

...

역사기술에 있어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높은 역사 기록물이었으며,

조선왕조 실록의 기초자료 작성에서 편찬기술까지 담당했던 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기술에 대한 비밀성을 보장받던 전문관료였고, 사관의 기록은 군주라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으며, 비밀이 보장되는 제도가 이 실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보장하였습니다....

 

연산군도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한 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성종때의 실록을 보고자 했으나, 사관과 신하들의 반대로 자신의 뜻이 꺾이게 되자 1498년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 등을 일으켜 많은 죽음을 불러 일이키기도 한... 역사기록을 가진 나라입니다.

 

죽음으로 역사를 지켜온 사람들의 정신이 아직 면면(끊어지지 않고 죽 잇따라 있다)한데... 말입니다.

...

 

 

 

 

 역사교과서 검정 권한을 지닌 국사편찬위원회의 이태진 위원장이 11일

 "새 중학교 역사교과서 지필기준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5.18 민주화 운동'과 '친일파 청산 노력'등을 서술하지 않은 교과서는 검정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8일 확정딘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중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 이런 내용들이 삭제된 데 대한 비판이 잇따르자 한발 물러선 것이다.

 

이 위원장은 이날 오후 교육과학기술부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변명이랍시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들어보시죠.

 "집필자의 자율성을 존중하기 위해 집필기준을 '대강화(요약)'하는 과정에서 자잘한 얘기가 빠졌다"며 

 "4.19 민주혁명, 5.16군사정변,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 국가 차원에서 사건의 명칭이 공식적으로 규정된 것들은 교과서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고 말했다.

(진작 이럴 것이지... 꼭 시민들이 나서야... 꼬리를 내리네.)

 

 이 위원장은 집필기준에서 함께 삭제된 '친일파 청산 시도'를 두고서도

 "역사교과서에 '친일파 청산 노력'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포함되어야 하고, 누락되었을 때는 검정 통과가 어려울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위원장은 교과서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밝힌 부분을 집필기준에 다시 포함시킬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에

 "집필기준 재고시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진명선 김민경 기사 torani@hani.co.kr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55113&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6

논란되는 글 보러가기....

 

 

 

 

 

이상입니다~ 각자 즐거운 연휴되십시요.

황당하게 "요즈음 요트가 많이 팔려서 경기가 좋다"고 하신 김대기 청와대 경제수석은 빼구요~

 

 

 

 

 

 

  • 조혜진 747공약을 그야말로 공약(空約)으로 만든...
    mb가카는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11-11-12 23:43 댓글삭제
  • 허태기 노면의 멘토인 선상님의 전력


    선상님의 출생


    김대중은 1926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1924년생이라는 주장들이 많다. 소위 “김대중의 출생비밀”에는 생년월일과 아버지의 성씨에 대해서도 불분명하다는 의혹들이 들어 있다.

    1980.5.18일자 경향신문에 나타난 출생비밀은 아래와 같다.

    김대중의 생모는 장오도 여인(71년5월9일 사망), 1911년 제갈성조와 결혼했다가 사별했고, 1920년에 윤창언의 셋째 첩으로 입적했으나 역시 사별했다. 그 후 본 남편 제갈성조의 친형인 시숙 제갈성복의 도움으로 주점을 경영하다가 김대중을 임신한 상태에서,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 사는 김운식의 첩으로 들어가 1924년 11월 16일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김대중을 낳았다.

    김대중은 김운식의 서자로 자라면서 국민학교와 목포상업을 졸업한 후 일본인이 운영하는 해운회사에 취직하여 일하다가 해방을 맞자 그 해운회사를 일본인으로부터 인수했다. 이때 그는 22세였다.


    청년기


    한편으로는 해운업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민당(후에 남로당에 합병)과 민주애국청년동맹, 전국노동평의회 등 "극렬 좌익정당과 단체"에서 활동했고 "남로당" 목포시 당청년부장으로 파출소를 공격하는 등 공산계 파괴활동에 참가했다.

    27세 때, 6·25가 발발하여 목포가 공산군 수중에 들어가자 목포시 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부역 행위를 관리했다. 인민군이 퇴각한 후, 남로당 섭외부장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했다는 죄목으로 전남도경에 검거됐었다. 한편 50-56년 사이의 목포해운회사를 경영하던 중 선원봉급과 배를 판돈 1억 5천만원을 횡령하여 도주했다.

    1956년, 33세가 된 김대중은 이 일로 해운회사 부사장인 나상수로부터 고발당해 강원도로 피신한 후 민주당에 입당했다. 1959년 6월, 36세가 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 지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자 빚을 지고 생활고에 허덕였다. 이때의 김대중의 처는 차용수, 현재 생존해 있는 차 모 목사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빚에 시달리고 계까지 깨지는 바람에 세상을 비관하고 음독자살을 했다.


    정치꾼-사기꾼 시절


    1959년 6월, 36세가 된 김대중은 인제 지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바로 이 때 또 다른 횡령사건이 발각된다. 선거기간 중 투개표 입회원이었던 문수룡(文壽龍)이라는 사람이 돌연 급사하자, 민주당에서는 문수룡을 순직으로서 처우하고, 당중앙간부가 조의금 30만원을 모아 김대중씨를 통해 유족에게 건네주도록 했다. 그런데 김대중씨가 이중 12만원만을 유족에게 건넸을 뿐 나머지 18만원을 착복했다. 이 사실을 안 당시 민주당원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이 김대중씨의 파렴치한 횡령행위를 비난하고 민주당에서 탈당해 버렸다.

    김대중씨의 조의금 착복사실이 널리 당내에 전해지자, 당내는 물론 선거구 전체의 비난이 집중됐다. 그래서 궁지에 몰린 김대중씨는 반대로 탈당한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고발당한 네 명은 김대중씨를 횡령과 무고(허위신고)로 대항, 고소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지만 그 후 사건은 유야무야로 끝났다 한다.

    1960년, 37가 된 김대중은 서자로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이 불리함을 알고 4남매를 거느리고 있는 의부 김운식과 그의 본처 김순례에게 호적상 이혼을 강요한 다음 그의 생모 장여인을 본처로 입적시켜 자신을 김운식의 차남으로 조작해 강원도 인제군 북면 원통리로 분가, 전적했다.

    1960년 7월29일, 4․19혁명으로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7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4․19혁명으로 쓰러진 자유당의 이름을 내걸고 선전한 전형산씨가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됐다. 이 때 김대중은 상대방 후보를 모략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지를 발휘했다.

    자신의 선거참모를 자파 당원으로 하여금 구타하게 한 후, 상대당원이 테러를 했다고 역선전을 하기도 했고, 자신의 선거운동원에게 상대방의 완장을 두르게 하고 고무신을 배급, 유권자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상대당원을 가장하여 유권자들에게 회식이 있다고 초청하는 허위선전을 해 상대방후보에 대한 반감과 불신감을 갖게 했으며, 김대중의 사인을 받아오는 자에게는 돈을 주게 하여 자신의 인기를 조작하기도 했다.

    이렇게 했는데도 낙선 당하자 김대중은 4백 명의 데모대를 조직, 군청개표소에 난입, 투표한 22개중 15개를 강탈한 후 전씨의 사퇴를 강요하는 연좌데모를 벌였다. 그후 민주당 정권이 전씨를 공민권제한 대상자로 만들어 의원자격을 박탈하자 김대중은 1961년 5월의 보궐선거에서 일방적으로 당선됐다.

    민주당 국회의원이 된 김대중은 1961년 7월부터 민주당 선전부장이 됐다. 이 때에도 김대중은 또 다른 횡령사건을 저질렀다. 선전부장으로서 학원공작을 구실로 조달한 선거 자금 3천7백만 원 중 7백 7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어 검찰에 송치됐다.

    1962년 10월, 39세가 된 김대중은 이희호씨와 중매로 결혼했다. 김대중은 국회의원시절에 처 이씨를 자신의 비서관으로 등록, 해외여행에 동반하기도 했다.


    반정부 활동


    1971년 49세가 된 김대중은 대통령후보 유세도중 자기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당했던 교통사고를 박대통령 측이 저지른 암살음모라고 뒤집어 씌웠다. 김대중의 집안에 폭발물을 설치해 폭발시켜놓고 공화당에서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7대의원 당시에는 8대 국회의원 당 공천을 해준다고 속여 박종태로부터 5백만원, 김세종으로부터 3천8백50만원, 이원형으로부터 1백만원 등 4천4백50만원을 사취했던 기록도 있다. 그 후에도 국회의원이란 직위를 악용, 호남제분, 동아건설, 대한농산, 삼양수산 대표들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아낸 사실도 밝혀졌다.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 패하자 그는 신병 치료차 일본으로 건너갔다. 1971년, 도쿄 플라자 호텔에서 김병식 부주석으로부터 20만달러를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1972년10월 유신 계엄령이 선포됐고, 선포됐고 국회가 해산됐다. 이에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왕래하며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군사원조의 중단, 망명정부수립, 김일성 정권과의 접촉시도 등 반국가적 행위를 감행했다.

    1973년 4월에는 미국 하버드대 코헨 교수에게 한국의 박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 미국이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도록 미의회 지도자에게 압력을 넣어달라고 호소했다. 또한 미국에서 북한을 방문한 친북괴 분자들을 만나 반국가 단체인 한민통을 조직했다. 이 시기에 그는 자민당 출신이면서도 좌파의원인 우스노미야 의원 등 일본 국회의원들의 지원을 받는 한편 반국가 단체로 규정된 "한민통"을 조직하여 의장으로 앉는 등 일본을 무대로 반정부 운동을 벌였다.

    1973년 8월 8일, 그는 도쿄 팔레스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됐다. 이에 대해 박정권은 국내 야당 지지자들의 강한 반발과 주권 침해라는 일본의 비난에 직면했지만 미국의 주선으로 일본 정부와 막후접촉을 벌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을 해임하고,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언행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하고, 김종필 총리의 방일 사과 등으로 마무리됐다. 이로써 이 사건은 86일 만에 정치적으로 매듭 됐다. (지만원의 시스템공학에서)
    2011-11-12 23:56 댓글삭제
  • 허태기 “솔로몬 앞에 선 5.18”(저자 지만원)

    5.18에 대해 수많은 자료들이 생산됐다. MBC의 ‘제5공화국’, 영화 ‘화려한 휴가’를 위시하여 수많은 책자들과 인터넷 자료들이 홍수를 이룬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5.18에 대한 진실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의 기록에 담겨있고, 이 기록은 2005년부터 비로소 공개됐다. 그 이전에 나온 5.18자료들을 수사기록과 대조해 보면 중요한 대목들이 모두 허위다. 국민 대부분이 인식하고 있는 5.18역사가 모두 허위사실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1980년에 발생한 ‘5.18역사’를 가장 먼저 쓴 존재는 북한 당국이다. 1982년 조국통일사가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이라는 역사책을 썼고, 이어서 1985년 조선노동당출판사가 “광주의 분노”를 출판했다. 그 다음의 역사책은 1985년 황석영이 쓴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일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다. 3권의 책을 조사한 결과 황석영은 북한으로부터 자료를 받아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을 쓴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모든 자료들은 바로 북한노동당에서 발원하여 황석영을 통해 파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황석영의 책이 나온 지 무려 24년이 지난 2008년 말에야 사상 처음으로 사실자료와 과학적 논리를 내용으로 하는 5.18역사책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이 나왔고, 그 후 다시 2년 후인 2010년에 본 책 “솔로몬 앞에 선 5.18”이 나왔다. 이 책은 5.18의 본질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책이다. 5.18에 나타난 현상들을 기획하고 연출한 리더가 남한사람들인가 북한사람들인가, 5.18의 역사를 남한에서 주도한 사람들은 남한을 사랑하는 사람들인가 북한을 사랑하는 사람들인가, 5.18의 소유권은 남한에 있는가 북한에 있는가, 이런 것들을 추구한 것이다.


    이 책에는 황석영과 윤이상이 북한에 가서 만든 ‘북한의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가 소개돼 있고, 북한의 5.18역사책 내용들이 소개돼 있을 뿐만 아니라 검찰의 수사기록 및 통일부 분석자료들과 대조되어 분석돼 있다. 수많은 증거들을 통해 북한은 5.18이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상 최 걸작이라 주장하고, 남한은 5.18이 민주화역사라 주장한다. 세상에 이런 비극적임과 동시에 희극적인 현상이 여기에 말고 어디 또 있겠는가? 이에 대해 저자는 명확한 해답을 냈다. 5.18은 북한이 만든 북한의 역사이며, 5.18은 북한이 기획-연출했고, 광주에는 수많은 북한 요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2011-11-12 23:26 댓글삭제
  • 허태기 1. 국민이 알고 있는 12.12와 5.18에 대한 역사는 완전 가짜입니다! 역사의 진실은 수사기록에 담겨있지만, 기록은 2004년 11월 11일까지 검찰창고에 숨어있었습니다. 공개된 18만쪽의 기록을 보니 그 이전에 나온 역사물들은 모두 가짜였습니다. 가짜 역사물들은 누가 만들어 확산시켰을까요? 놀라지 마십시오. 김일성이었습니다. 국가와 국민이 김일성에 놀아난 것입니다.

    2. 5.18역사책을 가장 먼저 쓴 존재는 북한노동당! 1982년 및 1985년에 두 개의 책을 발간했습니다. 이에 더해 김일성은 1989년 황석영과 윤이상을 불러 북한의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제작했습니다. 김일성은 그 대가로 황석영에는 25만 달러를, 윤이상에게는 15층짜리 ‘윤이상 음악당’을 하사함과 동시에 두 사람에게 ‘재간둥이’라는 별호를 내렸습니다. 남한에 확산된 5.18에 대한 출판물, 드라마, 영화 ‘화려한 휴가’는 북한자료들을 그대로 옮긴 것들입니다. 이 땅에 유행하는 ‘민주화’, ‘진보’ ‘신군부’라는 용어도 김일성이 개발했습니다. 국민이 김일성의 앵무새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야 합니다.

    3. 5.18은 북한이 만든 북한의 역사입니다. 5.18은 북한이 개발한 이론, 전략, 전술에 의해 기획-연출되었고, 북한의 5.18역사책들은 북한 사람들이 광주에 직접 와서 수많은 현장의 숨결까지 담아내 엮은 역동적인 작품들입니다. 광주 희생자의 대부분은 공수부대가 아니라 북한 특수군에 의해 발생했습니다. 북한은 해마다 당정 주최로 전 지역에서 며칠씩 5.18을 기념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며 언론이 총동원되어 적화통일 분위기를 띄웁니다, 김일성은 최고의 기계, 최고의 공장, 최고의 천리마 운동에 ‘5.18’ 호칭을 최고의 명예훈장처럼 하사했습니다. 북한은 5.18이 대남공작 역사 중 최고의 걸작이라 하고, 남한은 그것을 민주화역사라 하니 이런 비극이자 희극적인 현상이 여기 말고 어디 또 있겠습니까?

    4. 남과 북을 대표하는 두 개의 역사책 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 TV화면 등에서 대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황석영은 1985년에 북한을 대변하는 5.18역사책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을 썼고, 북한에 가서 북한의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저자는 그보다 25년 후에 검찰기록, 북한기록, 5.18측 기록을 종합하여 ‘솔로몬 앞에 선 5.18’을 썼습니다. 어느 역사가 진실인지 솔로몬 재판을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해마다 5.18기념행사를 주관하는 보훈처는 이 책을 가지고 5.18이 누구의 역사인지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북한이 해마다 전 지역에 걸쳐 추모하는 ‘민주열사’들을 남한까지 따라서 추모하는 것은 부끄러운 코미디가 아니겠습니까가? (지만원의 역사바로세우기에서)
    2011-11-12 23:30 댓글삭제
  • 조혜진 허태기님...
    시중에서 회자되고 있는 '유체이탈 화법' 이라고...
    들어보셨나요?
    ㅎㅎ

    mb가카만... 유체이탈화법을 쓰는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허태기님도 그러하시군요.
    ^^
    2011-11-12 23:37 댓글삭제
  • 이화인 적어도 5.18 소용돌이에서 숨을 쉬지 않은 사람들은 5.18을 논하지 마세요. 아픔은 실재 아파본 사람만이 그 상처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요즈음 포교사단 홈페이지에 들어오기 겁이 납니다. 몇몇 분에 의해 대다수의 포교사 님들이 저와 같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시는 행위가 진정 포교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을 하시나요. 여기는 부처님 법을 공부하고 전하는 곳이지 이념논쟁 장소가 아닙니다. 이념을 논하려 한다면 다른 곳으로 가시길 완곡히 빕니다. 2011-11-13 07:24 댓글삭제
  • 허태기 전쟁이나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사변이 일어날 경우 적과 아군도 희생되지만 죄없는 국민도 휩쓸려 희생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비극을 보는 시각이 이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종북주의자들은 그들의 숭배하는 괴수가 동족상잔을 일으켜 수많은 생명과 재산을 파괴시켰으나 전쟁와중에 일어난 희생자들 중에서 유독 국군에 의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 확대생산하는 것이다. 북괴군에 희생된 억울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렇게 남한의 국군이 잔인하고 북한의 괴뢰군이 정의롭다면 왜 6.25당시 무려 5백만이나 되는 북한 주민이 공산주의를 피해 사선을 넘어 남한으로 피난한 것일까? 역사를 보는 관점이 적어도 종북좌익들처럼 균형을 잃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5.18사태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견해차이가 있는 것이다. 역사는 마지막으로 살아남는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이 또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냉정하게 되짚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런 사태를 발생케하였으며 누가 그 배후에 있었는가하는 문제도 당시의 진실을 이해하는데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있는 것이다. ... 저 또한 이런 문제는 더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2011-11-13 08:51 댓글삭제
  • 정재호 빙고!!! 님의 글에 공감..한표... 2011-11-13 08:59 댓글삭제
  • 조혜진 우리나라에서 동시대인으로...
    특히나 8~90년대를....
    시대의 아픔으로 끌어안고 살아온 사람인데... 광주에 살지 않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논하지 말라하십니까.
    하지만 일면 맞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
    우리가 어떤 희생을 치러봤다고...
    이 자리에서 이렇게 쉽게...
    아픈 이야길 꺼내겠습니까.

    선생님의 말씀이 또한... 옳습니다.
    2011-11-14 13:59 댓글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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