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빨들의 실체 2
허태기
view : 1976
노무현 장인 권오석의 정체
[변재환]박사 (58세)가
[권오석]에 의해 학살된 양민 유족 중에
그는 “권오석에 의해 살해된 유족회”의 대표.이다.
그는 권오석에 대해 이렇게 털어놨다.
"[權오석]씨는 태생부터 "장님"이 아니었다.
막걸리를 공업용 알콜에 섞어 마시다가 실명된 것이다.
실명한 [權오석]은 6.25가 일어나기 전인
1948년에남로당에 가입했다.
당시 우리 숙부님인 [변백섭]은 면장이었고
[권오석]은 면서기였다.
권오석은 다른면에서 있다가 사상관계로 쫓겨 와,
변백섭 면장 밑에서 일을 하게 됐다.
이후 6.25 사변이 나자,
[권오석]은 창원군 진전면의 치안대장이 되었다.
눈이 먼 권오석은 동네 사람들의 손바닥을 만져보고
사람을
죽일지 살릴지를 등급별로 판정했다."
2002년 5월 3일,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노무현]은 장인의
참배를 하면서 “장님(장인 권씨)이 부역을 하면 얼마나 했겠느냐”,
“조금 가담하고 더 가담한것이
무슨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국민을 속인 것이다.
같은 시기에 권양숙은 아버지 권씨에 대해 묻는 기자들의
“그때 나는 어려서 부모님 일은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태생이 장님인 사람은 혼자서도 잘 다니지만, 후천적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권씨의 경우 장님이 된지 얼마 안 되었고 남편이 양민을 등급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부축했던 사람이 바로 노무현의 장모였다.
노무현 부부의 거짓말에 대해 변씨는 이렇게 반박한다.
“장모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말이 되나.
나는 [권양숙]씨와
동갑이다.나도 아버지를 통해
숙부님의 학살사건을 낱낱이 듣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어렸다는 이유로 모른다는 것인가?
더욱 아버지가 감옥에 있을 당시
권양숙은 15살이었는데
아버지가 왜감옥에 갔는지 들었을 것 아니냐?
우리가 알고 있는 3.1운동이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아서 안 것은 아니지 않나 !
“학살당한 11명의 유족들은 궁핍하게 살았다.
6.25 이후 양 부모
두 사람이 있어도 어려운 살림인데아버지 없이 산 유족들은 그야말로 피눈물 흘리는 세월이었다.
미안하다는 한 마디만 했더라면
유족들이 부모형제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살았을지 모른다.
노무현 부부와 장모는
죄 없이 죽은 11명의 양민들을 위해서라도
진실을 제대로 알리고 사과해야 한다.
권오석의 좌익 부역활동기록은
대검찰청이 발간한 ‘좌익사건실록’에 있다.
피해자측 증언들에 따르면
[권오석]은 일제시대 공무원시험에
합격해면서기로 일했을 정도였고
양민 학살장인 인민재판장의 검사, 판사 변호사 역할 등
1인 3역을 한 유일한 재판관이었고,
그의 말 한 마디로 양민의 생사를 가름한자.였다고 한다.
'실록' 책자에는
[권오석]이 죽인 피해자가 9명으로 돼 있다.
그러나 피해자 측 주장은 11명이다.
卞百燮(43, 농업) 창원군 진전면 양촌리
卞先燮(34, 농업)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卞曾燮(33, 농업) 창원군 진전면 양촌리
金玉甲(53, 농업)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金万祚(32, 농업) 창원군 진전면 시락리
金聖甲(46, 농업) 창원군 진전면 창포리
朱正浩(28, 군인) 창원군 진전면 봉암리
朴宗洙(51, 區長)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朴周漢(47, 농업)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鄭奉柱(32, 농업) 창원군 진전면 광촌리
權五乾(28, 군인) 창원군 진전면
피해자 유족의 주장 중에는
[권오석]이 얼마나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고,얼마나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였기에
시각장애인 임에도불구하고
노동당 선전부장,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치안대장이 되었겠는가?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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