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공산주의자
허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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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일생 요점정리
- 출처 : 시스템 공학
김대중의 출생
김대중은 1926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1924년생이라는 주장들이 많다. 소위 “김대중의 출생비밀”에는 생년월일과 아버지의 성씨에 대해서도 불분명하다는 의혹들이 들어 있다.
1980.5.18일자 경향신문에 나타난 출생비밀은 아래와 같다.
김대중의 생모는 장오도 여인(71년5월9일 사망), 1911년 제갈성조와 결혼했다가 사별했고, 1920년에 윤창언의 셋째 첩으로 입적했으나 역시 사별했다. 그 후 본 남편 제갈성조의 친형인 시숙 제갈성복의 도움으로 주점을 경영하다가 김대중을 임신한 상태에서,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 사는 김운식의 첩으로 들어가 1924년 11월 16일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김대중을 낳았다.
김대중은 김운식의 서자로 자라면서 국민학교와 목포상업을 졸업한 후 일본인이 운영하는 해운회사에 취직하여 일하다가 해방을 맞자 그 해운회사를 일본인으로부터 인수했다. 이때 그는 22세였다.
청년기
한편으로는 해운업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민당(후에 남로당에 합병)과 민주애국청년동맹, 전국노동평의회 등 "극렬 좌익정당과 단체"에서 활동했고 "남로당" 목포시 당청년부장으로 파출소를 공격하는 등 공산계 파괴활동에 참가했다.
27세 때, 6·25가 발발하여 목포가 공산군 수중에 들어가자 목포시 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부역 행위를 관리했다. 인민군이 퇴각한 후, 남로당 섭외부장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했다는 죄목으로 전남도경에 검거됐었다. 한편 50-56년 사이의 목포해운회사를 경영하던 중 선원봉급과 배를 판돈 1억 5천만원을 횡령하여 도주했다.
1956년, 33세가 된 김대중은 이 일로 해운회사 부사장인 나상수로부터 고발당해 강원도로 피신한 후 민주당에 입당했다. 1959년 6월, 36세가 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 지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자 빚을 지고 생활고에 허덕였다. 이때의 김대중의 처는 차용수, 현재 생존해 있는 차 모 목사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빚에 시달리고 계까지 깨지는 바람에 세상을 비관하고 음독자살을 했다.
정치꾼-사기꾼 시절
1959년 6월, 36세가 된 김대중은 인제 지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바로 이 때 또 다른 횡령사건이 발각된다. 선거기간 중 투개표 입회원이었던 문수룡(文壽龍)이라는 사람이 돌연 급사하자, 민주당에서는 문수룡을 순직으로서 처우하고, 당중앙간부가 조의금 30만원을 모아 김대중씨를 통해 유족에게 건네주도록 했다. 그런데 김대중씨가 이중 12만원만을 유족에게 건넸을 뿐 나머지 18만원을 착복했다. 이 사실을 안 당시 민주당원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이 김대중씨의 파렴치한 횡령행위를 비난하고 민주당에서 탈당해 버렸다.
김대중씨의 조의금 착복사실이 널리 당내에 전해지자, 당내는 물론 선거구 전체의 비난이 집중됐다. 그래서 궁지에 몰린 김대중씨는 반대로 탈당한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고발당한 네 명은 김대중씨를 횡령과 무고(허위신고)로 대항, 고소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지만 그 후 사건은 유야무야로 끝났다 한다.
1960년, 37가 된 김대중은 서자로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이 불리함을 알고 4남매를 거느리고 있는 의부 김운식과 그의 본처 김순례에게 호적상 이혼을 강요한 다음 그의 생모 장여인을 본처로 입적시켜 자신을 김운식의 차남으로 조작해 강원도 인제군 북면 원통리로 분가, 전적했다.
1960년 7월29일, 4․19혁명으로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7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4․19혁명으로 쓰러진 자유당의 이름을 내걸고 선전한 전형산씨가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됐다. 이 때 김대중은 상대방 후보를 모략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지를 발휘했다.
자신의 선거참모를 자파 당원으로 하여금 구타하게 한 후, 상대당원이 테러를 했다고 역선전을 하기도 했고, 자신의 선거운동원에게 상대방의 완장을 두르게 하고 고무신을 배급, 유권자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상대당원을 가장하여 유권자들에게 회식이 있다고 초청하는 허위선전을 해 상대방후보에 대한 반감과 불신감을 갖게 했으며, 김대중의 사인을 받아오는 자에게는 돈을 주게 하여 자신의 인기를 조작하기도 했다.
이렇게 했는데도 낙선 당하자 김대중은 4백 명의 데모대를 조직, 군청개표소에 난입, 투표한 22개중 15개를 강탈한 후 전씨의 사퇴를 강요하는 연좌데모를 벌였다. 그후 민주당 정권이 전씨를 공민권제한 대상자로 만들어 의원자격을 박탈하자 김대중은 1961년 5월의 보궐선거에서 일방적으로 당선됐다.
민주당 국회의원이 된 김대중은 1961년 7월부터 민주당 선전부장이 됐다. 이 때에도 김대중은 또 다른 횡령사건을 저질렀다. 선전부장으로서 학원공작을 구실로 조달한 선거 자금 3천7백만 원 중 7백 7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어 검찰에 송치됐다.
1962년 10월, 39세가 된 김대중은 이희호씨와 중매로 결혼했다. 김대중은 국회의원시절에 처 이씨를 자신의 비서관으로 등록, 해외여행에 동반하기도 했다.
반정부 활동
1971년 49세가 된 김대중은 대통령후보 유세도중 자기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당했던 교통사고를 박대통령 측이 저지른 암살음모라고 뒤집어 씌웠다. 김대중의 집안에 폭발물을 설치해 폭발시켜놓고 공화당에서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7대의원 당시에는 8대 국회의원 당 공천을 해준다고 속여 박종태로부터 5백만원, 김세종으로부터 3천8백50만원, 이원형으로부터 1백만원 등 4천4백50만원을 사취했던 기록도 있다. 그 후에도 국회의원이란 직위를 악용, 호남제분, 동아건설, 대한농산, 삼양수산 대표들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아낸 사실도 밝혀졌다.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 패하자 그는 신병 치료차 일본으로 건너갔다. 1971년, 도쿄 플라자 호텔에서 김병식 부주석으로부터 20만달러를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1972년10월 유신 계엄령이 선포됐고, 선포됐고 국회가 해산됐다. 이에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왕래하며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군사원조의 중단, 망명정부수립, 김일성 정권과의 접촉시도 등 반국가적 행위를 감행했다.
1973년 4월에는 미국 하버드대 코헨 교수에게 한국의 박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 미국이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도록 미의회 지도자에게 압력을 넣어달라고 호소했다. 또한 미국에서 북한을 방문한 친북괴 분자들을 만나 반국가 단체인 한민통을 조직했다. 이 시기에 그는 자민당 출신이면서도 좌파의원인 우스노미야 의원 등 일본 국회의원들의 지원을 받는 한편 반국가 단체로 규정된 "한민통"을 조직하여 의장으로 앉는 등 일본을 무대로 반정부 운동을 벌였다.
1973년 8월 8일, 그는 도쿄 팔레스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됐다. 이에 대해 박정권은 국내 야당 지지자들의 강한 반발과 주권 침해라는 일본의 비난에 직면했지만 미국의 주선으로 일본 정부와 막후접촉을 벌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을 해임하고,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언행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하고, 김종필 총리의 방일 사과 등으로 마무리됐다. 이로써 이 사건은 86일 만에 정치적으로 매듭 됐다.
선동과 내란 음모의 시절
1974년 12월, 가택연금 중에 있던 김대중은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해 재야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1976년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함석헌·문익환·김승훈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주의, 경제입국 구상 재검토, 민족통일 등을 주장하는 '3·1민주구국선언'(일명 명동사건)을 발표해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어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확정 받아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투옥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이 고조되자 박대통령은 1978년 12월 그를 형집행정지로 석방한 후 가택연금으로 전환시켰다.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그는 1979년 3월1일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약칭 ‘국민연합’)을 결성해 윤보선·함석헌 등과 함께 공동의장을 맡으며 재야활동을 계속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되면서 유신체제가 붕괴되자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동년 12월에 그를 가택연금에서 해제했다.
이어서 최규하 권한대행은 1980년 2월, 그를 사면복권시켜 주었다.
1980년 초 '서울의 봄' 시기에 그는 김영삼·김종필 등과 함께 가벼운 몸으로 정치활동의 전면에 나섰고, 학원소요사태를 배후 주동하고, 학원소요의 위력을 과시하면서 최규하 정권의 즉각퇴진을 압박하다가 5월 17일 자정의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불러왔다.
이로 인해 그는 26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체포, 수감되어 광주소요 기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9월에 그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그를 즉각 사형시키자는 여론과 재야파들의 끈질긴 구명운동이 한동안 팽팽히 맞섰다. 그러나 전두환은 1980년 레이건 대통령을 만난다는 조건으로 1982년 12월, 그를 석방했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간 김대중은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열어 해외에서 활동하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했다.
글쓴이 : 비바람 조회 : 2,514 추천 : 292
김정일이 사망한 사실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던 국정원이 동네북 신세로 전락했다, 정보수집이라는 업무를 위하여 막대한 예산과 권한을 주무르고 있는 국정원으로서는 맞아도 싸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무능한 국정원을 질타하는 데에는 여야가 따로 없이 나서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무능한 국정원'의 원인에 대해서 민주당 측에서는 상기해야 할 사건이 있다,
대공정보업무는 한마디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무능한 국정원은 바로 이런 기술의 단절에 있었다, 임진왜란 때 수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감으로서 백자제작 기술이 단절되었 듯이, 공산당과 싸우며 연마했던 대공정보업무의 '기술'이 면면히 대를 이어 내려오다가 그 명맥이 끊어졌던 것은 김대중 정권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1998년 2월, 김대중은 당선 제일성으로 이런 발언을 했다, "나는 정치보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정치보복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김대중은 1998년 4월 속칭 '국정원 대량학살사건'을 일으켰다, 엄연한 정치보복이었다, 김대중의 어록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후 한 번도 거짓말을 해본 적은 없다, 다만 약속은 안 지킨 일은 있다"
김대중이 정권을 잡았을 때 가장 먼저 손을 본 것은 국정원이었다, 대한민국 종북좌익의 원조이자 거두였던 김대중으로서는 국정원과 악연이 깊었다, 김대중은 일본에서 반국가 활동을 하다가 국정원에 의해 국내로 납치된 적이 있었고, 김대중은 국정원으로부터 암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공갈을 전가의 보도처럼 선거에 이용하곤 했었다,
1998년 4월 1일, 국정원 직원들은 만우절 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재택근무를 하라는 명령이었다, 구조조정 명분으로 한 순간에 책상이 없어진 직원은 무려 581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대공활동의 전문정보 수사요원들이었고, 이들의 70%가 영남 출신들이었다, 앞에서는 정치보복은 없다는 미소를 흘리고 뒤에서는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국정원의 '피의 숙청'이었다,
‘국가정보원을 사랑하는 모임’의 대표이자 ‘국가안보기능회복추진위원회’ 상임대표인 송영인은 숙청된 직원들의 기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김대중을 싫어하는 사람, 둘째, 이회창을 지지한 사람, 세째, 한나라당의 고위당직자와 친분이 있는 사람, 순이었다, '국정원 대량학살사건'에서의 도살자는 김대중의 심복이었던 이종찬 국정원장과 이강래 기조실장이었다,
김대중이가 보수우파로 부터 빨갱이라는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김대중은 국정원만을 학살한 것이 아니라 아예 대한민국의 대공 활동을 무력화 시켰다, 공안기관 대공경찰 2500명의 자리가 없어졌고, 기무사 요원 600여명, 공안검사 40%가 자리를 잃었다, 반국가 활동의 전력이 있던 김대중으로서는 이들을 그냥 두는 것은 뒤통수가 근질거릴 일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쫓겨난 자리에는 민변출신의 변호사와 호남출신의 좌경화 인사들이 무시험 특채로 국정원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대공 업무에 대한 자질이나 간첩 잡는 교육은 무시되었다, 노무현 정권 당시 '김대중의 숨겨진 딸'에 대한 시사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는데, 당시 김대중의 숨겨놓은 딸을 유치원으로 데려가는 임무를 맡았던 사람들이 국정원 직원이었다,
대통령의 숨겨진 딸을 유치원으로 데려가는 일이나 하던 정보원들이 무슨 수로 간첩을 잡을 것인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당시에는 간첩 수준의 인간들이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던 탓도 있지만 간첩을 잡았다는 뉴스가 거의 없었다, 간첩이 잡히기보다는 비밀 정보업무를 하던 정보원이 민간인에게 들켰다는 뉴스가 더 많았다, 좌익정권의 국정원은 미션임파셔블의 탐 크루즈와는 거리가 멀고 일반 절도범 수준이었다,
김정일이가 황천길에 올라도 국정원이 모를 수밖에 없던 이유는 순전히 국정원의 손발이 묶여있기 때문이었다, 기술자들이 대거 잘리면서 대공정보 수집능력은 탐문 수사나 하는 파출소 순경 수준이 되어버린 것은, 이런 대공기관 무력화의 원인은 순전히 김대중 때문이다, 민주당에서는 국정원만을 탓할 일은 아니다, 정권 교체 후에 대공수사 라인을 복원 시키지 않은 이명박에게도 원인은 있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에서도 그리 화 낼 일은 아니다, 외양간을 고치는 것은 소 잃기 전에 하는 법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국정원의 대공업무 라인을 복원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2011-12-24 08:22
서울고법 형사12부(부장판사 최재형)는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사건으로 기소된 박모씨의 재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다고 23일 밝혔다. 박씨는 북한 지령을 받고 재일조선인총연합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한국 유학생을 유치하려 한 혐의로 1983년 기소돼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이 확정됐다.
재판부는 77년 지인의 친척에게 불온서신을 전달한 혐의로 기소된 재일동포 유모씨에 대해서도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적표현물을 제작한 혐의만 유죄로 인정했다.
최 부장판사는 선고를 한 뒤 “당시 남북이 첨예한 긴장관계를 유지했던 점을 고려하더라도 피고인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법원이 당연히 해야 할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 재판부가 법원과 국가를 대표하지는 않지만 당시 진실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 점에 대해 사법부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고 사과했다. 재판을 지켜보던 피고인 가족과 지인들은 기쁨과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박씨는 “28년 만에 올바른 판결을 내린 대한민국 법원에 감사한다”고 했다. 국민일보 2011-12-23 2011-12-24 12:01
오늘날 자칭 진보주의자라는 자들의 하는 꼬락서니를 보라.
세계에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삼대까지 국가권력을 독재세습하는 김일성일족에게
아부하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꼬라지를 보라. 이 것이 그들이 말하는 진보주의자의 실체인 것인가?
대한민국이 북한괴뢰당국의 위성국인가? 종속국인가? 어떻게 한반도의 정통성을 가진 국가의 정당들이나 일부단체가 말도 되지 않는 북한의 세습정권 통치자의 죽음을 두고 '서거'란 극존칭을 쓰고 그 시신앞에 머리를 조아리지 못해 안달하는 무리들이 진보주의자라니.. 참으로 한심한 작태들이다. 진보주의자란 그런 것인가?
그들은 진보주의라는 가면을 쓴 종북좌빨에 지나지 않는 김일성일족의 숭배자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더이상 국민을 기만하지 않았으면 한다. 2011-12-25 17: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