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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해군기지' 유치한 뒤 탄핵… 윤태정 전(前) 마을이장
최보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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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1.09 03:06
"神父들이 '강정 멸치젓' 팔아 기금 모아… 강정엔 멸치가 안 나는데"
15대째 강정마을에 산 토박이
"내가 海軍서 돈 받았다 퍼뜨려… 승용차에 호신장비 싣고 다녀"
喪服을 입고서 마을 돌아다녀
바다 밑 산호가 많다고 반대… 결국 세금 21억원 들여 조사
"국회의원쯤 되면 국가관이 있어야지. 야당은 그렇다 쳐도, 내가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한나라당이다. 해군기지는 좌파세력이 타깃을 삼아온 상징적 사안이었다. 이런 대결에서 명색이 여당이 엿 바꿔먹는 식으로 해버렸다."
윤태정(57)씨의 말은 순화되지 않았다. 제주 강정포구에서 펜션을 하는 그는 해군기지를 신청했던 마을 이장이었다. 반대 측의 탄핵을 받아 이장 임기를 못 채웠지만 그는 계속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다.
"외부에서 온 시위대가 집으로 찾아와 술병 던지고 확성기로 떠들어댔다. 작년 여름에는 아예 장사를 못 했다. 이놈들은 혼자가 되면 가만히 있다. 하지만 셋만 모이면 내게 시비를 걸고 욕을 해댄다. 혹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승용차에 호신장비를 싣고 다닌다. 그렇게 난리를 쳤으면 끝날 줄 알았는데…."
윤태정 전 이장은 “국회의원쯤 되면 국가관이 있어야지 한나라당에는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해군기지 공사를 위해 쳐놓은 펜스에서./최보식 선임기자
윤태정(57)씨의 말은 순화되지 않았다. 제주 강정포구에서 펜션을 하는 그는 해군기지를 신청했던 마을 이장이었다. 반대 측의 탄핵을 받아 이장 임기를 못 채웠지만 그는 계속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다.
"외부에서 온 시위대가 집으로 찾아와 술병 던지고 확성기로 떠들어댔다. 작년 여름에는 아예 장사를 못 했다. 이놈들은 혼자가 되면 가만히 있다. 하지만 셋만 모이면 내게 시비를 걸고 욕을 해댄다. 혹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승용차에 호신장비를 싣고 다닌다. 그렇게 난리를 쳤으면 끝날 줄 알았는데…."
올해 해군기지 예산은 당초 1327억원이 편성됐다. 하지만 야당의 반대와 여당의 '협조'로 49억3000만원(4%)만 통과됐다. 2014년 완공은 어려워졌다. 이번 총선에서 야당이 다수당이 되면 해군기지의 장래는 더 불투명해질 것이다.
―반대 측은 "해군기지는 끝났다"고 장담하고 있다.
"주민들도 당황해서 내게 전화를 많이 걸어왔다. '이러면 공사 끝 아니냐'고. 반대 측의 공사 방해로 집행하지 못한 작년 예산을 올해 사용하면 된다고 들었다. 지금도 공사는 계속되고 있다. 다만 명분과 상징성에서 타격을 본 것은 사실이다."
마을에는 '해군기지 결사반대' '불순세력 해군은 물러가라' 등의 깃발과 현수막이 빽빽했다. 서울에서 왔다는 한 종교인이 상복(喪服)을 입은 채 삼보일배를 하고 있었다. '농성장 150m' 화살표를 따라가 보니, 가건물을 지어놓고 외지인 네댓 명이 반대서명을 받고 있었다.
그는 농성장 근처로 안 가려고 했다. "무엇이 겁나서 그러느냐?" 물으니, "저놈들을 보기만 해도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말했다.
"남의 마을에서 두 달 가까이 상복 입고 돌아다니는 인간이 없나. 한때는 전문시위꾼들이 다 내려왔다. 밤이면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난장판을 벌였다. 자연생태계를 떠들던 놈들이 담배꽁초나 쓰레기를 제멋대로 버렸다. 신부(神父)들이 돈을 대주니 '니나노판'이 된 것이다. 이런 광경은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른다. 대체 마을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됐다."
―신부들이 돈을 대다니?
"신부들이 '강정 멸치젓'이라고 팔아 투쟁 기금을 모았다. 여기는 멸치도 안 나는데. 10억원 이상 모아 도로변 입구에 집까지 지었다. 매일 해군기지 반대 미사를 한다. 성당마다 여기로 신도들을 보낸다. 내가 천주교를 좋아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겪고는 도대체 성직자들이란 뭔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붉은발말똥게를 살리자'는 현수막 구호처럼, 자연 생태계를 위한다는 것은 늘 호소력이 있다.
"제주도 어느 해변에도 붉은발말똥게가 서식한다. 이걸로 시끄럽게 하자 해군들이 우리 마을의 말똥게들을 잡아 옮겨놓았다. 저네들은 '해군기지가 들어설 바다 밑에 산호(珊瑚)가 많아서 안 된다'며 반대도 했다. 결국 국민세금 21억원을 들여 조사에 응했다. 안 나왔다. 그러고는 그만이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찬성하던 주민들이 어떻게 그렇게 돌아섰는지 믿을 수 없다."
―같은 마을 안에서 반대 측 주민들과의 관계는 어떤가?
"지금은 서로 말도 안 한다. 유치 결정(2007년 8월)이 된 뒤 민노총과 참여연대 사람 서너 명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얼마 안 넘어가더니 나쁜 말을 계속 퍼뜨리니 주민들이 확 넘어가더라. 대체 어떻게 교육시켰는지, 글도 잘 모르는 아줌마들이 무슨 법(法)을 그렇게 잘 아는지 원."
―반대 측에서는 유치신청 과정에서 하자가 있었다고 문제삼았던데.
"그놈들이 무슨 말을 못 만드나. 누차 이야기해왔다. 마을 향약(鄕約)에 주민 51명만 참석하면 총회 성원이 되게 되어 있다."
―주민이 몇 명인가?
"1500명인데, 총회에 참석을 잘 안 한다. 당시 130명이 참석했다. 마을회관에서 1시간 동안 회의해 신청 여부를 결정했다."
―선생은 여기서 얼마나 살았나?
"15대째 살고 있다."
―지금 와서 보니 풍광이 참 좋다. '올레길 7코스'가 여길 지나고 있다.
"제주도에서 아름답지 않은 동네가 어딨나. 해군기지를 하려는 땅은 '유원지 지구'로 20년 동안 묶여 있었던 곳이다. 논들이 띄엄띄엄 이어져 있고, 도로가 없는 맹지였다."
―마을 이장을 맡았을 때 굳이 해군기지 유치신청을 할 이유가 있었나?
"지역개발지원금이 1조5000억원이 된다. 우리 마을은 도로망이 안 좋아 낙후돼 있었다. 과거에 초등학교에는 학생 수가 250명까지 있었다. 지금은 80명도 안 된다. 작년에 입학생이 8명이라고 들었다. 밀감 농사만 지어서는 될 일이 아니다. 처음 유치했을 때는 동네 유지들이 술 사주며 '마을 발전을 100년 앞당기게 됐다. 정말 고생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돌아서서 나를 매도하더라. "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발전은 되겠지만 강정마을의 본래 모습이 사라지지 않겠나?
"나도 고민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주고받는 게 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난개발이 될 리 있겠나. 1조5000억원의 지원금이면 우리 마을을 더 매력적으로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 개발하지 말라면 서울에서도 아파트나 문화시설을 짓지 말아야 한다. 자기 가족은 제주시로 나가 살면서 여기에 집과 땅이 있다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반대 측은 "해군기지는 끝났다"고 장담하고 있다.
"주민들도 당황해서 내게 전화를 많이 걸어왔다. '이러면 공사 끝 아니냐'고. 반대 측의 공사 방해로 집행하지 못한 작년 예산을 올해 사용하면 된다고 들었다. 지금도 공사는 계속되고 있다. 다만 명분과 상징성에서 타격을 본 것은 사실이다."
마을에는 '해군기지 결사반대' '불순세력 해군은 물러가라' 등의 깃발과 현수막이 빽빽했다. 서울에서 왔다는 한 종교인이 상복(喪服)을 입은 채 삼보일배를 하고 있었다. '농성장 150m' 화살표를 따라가 보니, 가건물을 지어놓고 외지인 네댓 명이 반대서명을 받고 있었다.
그는 농성장 근처로 안 가려고 했다. "무엇이 겁나서 그러느냐?" 물으니, "저놈들을 보기만 해도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말했다.
"남의 마을에서 두 달 가까이 상복 입고 돌아다니는 인간이 없나. 한때는 전문시위꾼들이 다 내려왔다. 밤이면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난장판을 벌였다. 자연생태계를 떠들던 놈들이 담배꽁초나 쓰레기를 제멋대로 버렸다. 신부(神父)들이 돈을 대주니 '니나노판'이 된 것이다. 이런 광경은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른다. 대체 마을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됐다."
―신부들이 돈을 대다니?
"신부들이 '강정 멸치젓'이라고 팔아 투쟁 기금을 모았다. 여기는 멸치도 안 나는데. 10억원 이상 모아 도로변 입구에 집까지 지었다. 매일 해군기지 반대 미사를 한다. 성당마다 여기로 신도들을 보낸다. 내가 천주교를 좋아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겪고는 도대체 성직자들이란 뭔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붉은발말똥게를 살리자'는 현수막 구호처럼, 자연 생태계를 위한다는 것은 늘 호소력이 있다.
"제주도 어느 해변에도 붉은발말똥게가 서식한다. 이걸로 시끄럽게 하자 해군들이 우리 마을의 말똥게들을 잡아 옮겨놓았다. 저네들은 '해군기지가 들어설 바다 밑에 산호(珊瑚)가 많아서 안 된다'며 반대도 했다. 결국 국민세금 21억원을 들여 조사에 응했다. 안 나왔다. 그러고는 그만이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찬성하던 주민들이 어떻게 그렇게 돌아섰는지 믿을 수 없다."
―같은 마을 안에서 반대 측 주민들과의 관계는 어떤가?
"지금은 서로 말도 안 한다. 유치 결정(2007년 8월)이 된 뒤 민노총과 참여연대 사람 서너 명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얼마 안 넘어가더니 나쁜 말을 계속 퍼뜨리니 주민들이 확 넘어가더라. 대체 어떻게 교육시켰는지, 글도 잘 모르는 아줌마들이 무슨 법(法)을 그렇게 잘 아는지 원."
―반대 측에서는 유치신청 과정에서 하자가 있었다고 문제삼았던데.
"그놈들이 무슨 말을 못 만드나. 누차 이야기해왔다. 마을 향약(鄕約)에 주민 51명만 참석하면 총회 성원이 되게 되어 있다."
―주민이 몇 명인가?
"1500명인데, 총회에 참석을 잘 안 한다. 당시 130명이 참석했다. 마을회관에서 1시간 동안 회의해 신청 여부를 결정했다."
―선생은 여기서 얼마나 살았나?
"15대째 살고 있다."
―지금 와서 보니 풍광이 참 좋다. '올레길 7코스'가 여길 지나고 있다.
"제주도에서 아름답지 않은 동네가 어딨나. 해군기지를 하려는 땅은 '유원지 지구'로 20년 동안 묶여 있었던 곳이다. 논들이 띄엄띄엄 이어져 있고, 도로가 없는 맹지였다."
―마을 이장을 맡았을 때 굳이 해군기지 유치신청을 할 이유가 있었나?
"지역개발지원금이 1조5000억원이 된다. 우리 마을은 도로망이 안 좋아 낙후돼 있었다. 과거에 초등학교에는 학생 수가 250명까지 있었다. 지금은 80명도 안 된다. 작년에 입학생이 8명이라고 들었다. 밀감 농사만 지어서는 될 일이 아니다. 처음 유치했을 때는 동네 유지들이 술 사주며 '마을 발전을 100년 앞당기게 됐다. 정말 고생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돌아서서 나를 매도하더라. "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발전은 되겠지만 강정마을의 본래 모습이 사라지지 않겠나?
"나도 고민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주고받는 게 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난개발이 될 리 있겠나. 1조5000억원의 지원금이면 우리 마을을 더 매력적으로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 개발하지 말라면 서울에서도 아파트나 문화시설을 짓지 말아야 한다. 자기 가족은 제주시로 나가 살면서 여기에 집과 땅이 있다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유치 결정 직후 외부세력이 들어와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해군기지를 짓고나면 공군 전투비행장도 들어와 마을이 없어진다' '군부대 근처에 술집이 생겨서 애비 없는 자식이 생긴다'고 했다. 찬성 주민들을 향해서는 '매향노(賣鄕奴)'라고 했다. 이렇게 계속 교육시키니까 결국 무너지더라. 어어어 하다가 넘어간 꼴이다."
―찬성하는 주민들을 규합해 대응해본 적은 없었나?
"찬성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막 나서질 않는다. 저들처럼 얼굴에 철면(鐵面)을 깔면서 할 줄 모른다. 자기 호주머니에서 돈을 내놓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저쪽에서는 시위 모금도 잘 걷히지만, 우리 추진위원회는 운영 경비가 없다. 해군기지 들어오면 좋고 안 하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저네들처럼 집요하게 조직적으로 할 줄을 모른다."
―반대세력과 직접 부딪힌 적은 없었나?
"2007년 설명회장에 들어가다가 집단 폭행을 당한 적이 있었다. 병원에서 일주일 살았다. 7명을 고발했는데, 다들 안 했다고 발뺌했다. 저네들은 돌아서면 거짓말했다."
―마을 이장을 언제 그만뒀나?
"이장 임기는 2년이다. 2007년 12월까지가 임기였다. 하지만 해군기지 유치 신청을 하고 난 뒤로 반대 측에서 탄핵을 했다. 그해 8월말로 그만뒀다."
―지금 선생이 맡고 있는 '해군기지추진위'는 언제 만들었나?
"내가 마을 이장을 할 때다. 당초 시의원을 지냈던 분께 맡아달라고 하니 안 하겠다고 했다. 마을 총회에서 내게 맡으라고 해서 받아들였다. 반대 측에서 거짓말로 기자회견을 열면, 내가 '그렇지 않다'고 반박회견을 하는 입장이 됐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나.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지 않나."
―이장을 그만뒀으면 손을 떼버리면 되지, 왜 여전히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나?
"이걸 하면서 인간적으로 얼마나 배신감이 들었는지 모를 것이다. 우리 가족까지 욕을 먹고 있다. 정말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만두면 찬성해온 주민들이 나를 배신자라고 욕할 게 아닌가. 내가 유치 신청을 꺼냈으니 물러설 수가 없게 된 거다. 10년만 지나면 우리 마을이 달라질 것이다. 그때는 평가해주지 않겠나."
―혹시 추진위원장을 맡아 개인적으로 다른 이득을 보는 게 있나?
"젠장할, 바로 반대 측에서 '해군에서 돈 받고서 저런다'고 퍼뜨렸다. 내가 돈 받고 마을을 팔아먹었다고 욕해대니, 주민들이 그렇게 믿을 것 아닌가. 이장 시절 자문위원을 맡았던 이들조차 나를 매도했다. 이 공사를 현대나 재벌그룹이 하면 몰라도, 어떻게 군이 돈을 주고 할 수 있겠나. 내가 겪어보니 군은 쓸 수 있는 예산도 별로 없더라. 해군기지 문제로 서울에 올라갈 일이 있어도 다 내 돈을 썼다."
―어쨌든 주민들에게 보상은 다 이뤄진 상태인가?
"2010년에 다 끝났다. 그게 충분했으니까 보상 말은 나오지도 않는다. 충분하지 않았으면 '빼앗았다'고 떠들었겠지."
―선생은 얼마나 보상을 받았나?
"나는 받은 게 없다. 수용 토지가 있는 주민이나 해녀들이 보상을 받았다(모두 626억원)."
―지금 주민들 사이에서 찬반 비율은?
"반반쯤 될까. 주민들이 전부 거짓말만 들었으니까. 넘어갈 사람은 다 넘어갔다. 유치 직후에는 몇 명만 들어와 세뇌시키다가, 작년 3월부터 '평화버스'니 '평화비행기'니 하며 단체로 내려왔다. 집회 전날이면 우리 펜션에서는 아예 외부 손님을 안 받는다."
―정치인도 많이 내려왔다. 선생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보기 싫었나?
"정동영 의원이다. 여러 번 내려왔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대통령 후보까지 했는지, TV에 그 인간 낯짝만 나와도 채널을 돌려버린다."
―본인은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할 텐데.
"착각 속에서 사니까. 그런 인간들이 마을 주민들을 교육시키고 있다. 북한에서 내려보낸 놈들이 아닌가 의심들 때도 있다."
―순수한 뜻도 있지 않겠나?
"나라 전체를 생각해봐도 국가 안보사업이 아닌가.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안보 없이 평화를 지킬 수 없다'며 추진했다. 그때는 내게 '선생님 같은 분이 있어야 한다. 용기를 내라'고 말했다. 이제 유치한 사람은 역적이 되고, 반대한 사람은 영웅이 됐다."
―선생은 "진해·부산에 해군기지가 들어서 마을이 망한 적이 있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주민들에게 그렇게 못 믿겠다면 한번 가보자고 했다. 해군의 협조를 받아 주민 30명씩 7차례나 해군기지를 시찰갔다. 샌디에이고와 하와이까지도 가봤다. 반대 측 주민도 네댓명 데리고 갔는데, 이들은 철조망 등을 찍어와 반대 선전을 하더라. 반대세력은 북한 편인지, 중국을 두둔하는 것인지."
―혹시 군(軍) 출신인가?
"육군을 사병으로 제대했다. 마을 이장을 맡고서 주민들의 삶을 개선해야겠다고 시작한 것이 이렇게 된 것이다."
―반대 측에서는 선생을 '보수꼴통'이라고 하지 않겠나?
"과거에는 이렇게 확고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이들의 본색을 알면서 내가 그런 소릴 들어도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숫자만 많았지, 줏대가 없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최종편집 2012.01.09 17:41:35 김동길 연세대명예교수의 다른 기사 보기 글자크기
미군 다 철수해도
미국이 국방예산을 대폭 삭감하기 때문에 일단 유사시에는 한반도에 미국이 대규모 파병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멍하고 앉아있었습니다. 6.25 때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북의 독재자들이 대한민국을 향해, ‘미제의 앞잡이들’이라고 맹렬하게 비난하는 까닭을 이제 알 듯합니다.
1976년 미국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이던 카터는, 자기가 당선되면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공언하여 이 땅의 관‧민은 다 함께 걱정이 태산 같았고 한국은, 제발 민주당이 집권하지 못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 판국에 가 나에게 ‘시론’을 한 편 부탁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지금 자세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미국이 자기 나라 군대를 우리 땅에서 철수하겠다는데 ‘안 된다’고 말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오히려 ‘좋다. 마음대로 철수하여라’해야지. 미군이 철수하자 즉시 인민군이 또 다시 남침을 감행하면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워 조국을 지켜야한다”하는 것이 나의 확실한 주장이었습니다.
그 때 내 나이 49세였지만, “나도 녹슨 총을 닦아 들고 휴전선으로 달려가, 쓰러질 때까지 싸우겠노라”고 덧붙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오늘 내 나이는 85세가 되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미군이 철수하면 나는 변함없이 ‘노인군단’에 끼어 일선으로 달려가 전사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김동길
www.kimdonggill.com 2012-01-09 22:59
평양고,평양여고 재학중 6.25변란을 맛아 남한으로 내려온 두 남매분은 어려운 역경을딛고
한분은 역사학자(김동길교수)로 또한분도 교육자(김옥길:이대총장,교육부장관)의 삶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지만 국가가 위태로울때는 목숨을 바치겠다는 정신본받아야 되지않을까!, 2012-01-10 08:53
[중앙일보] 입력 2012.01.10 00:00 / 수정 2012.01.10 00:00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1903년 초겨울, 한반도를 여행했던 러시아 지리학자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는 조선을 ‘울부짖는 바람의 나라’로 묘사했다. 해안 절벽을 때리는 모진 바람, 산등성이에 휘몰아치는 삭풍이 러시아인에게도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 바람을 맞으면서 위태로운 절벽과 깊은 계곡 사이로 점점이 펼쳐진 민가, 그것이 조선의 풍경이었다. 몇 달 후 조선은 러일전쟁의 폭풍에 내몰렸고, 일본의 진군 앞에 정치권은 찢어졌다.
이 외풍(外風)과 내풍(內風)의 대가를 지난 세기 우리는 혹독하게 치렀다. 대부분 이념분쟁의 바람이었는데, 오늘날의 보수와 진보도 그 와중에 태어나 ‘극단의 시대’로 불리는 20세기를 할딱거리며 넘었다. 유럽이라고 해서 보혁 진통을 비켜갈 수는 없었지만, 정치 선진국답게 대화와 타협의 채널을 열어 의견 일치의 영역을 넓히는 지혜를 발휘했다. 그런데 몸살을 앓는 우리의 정당들을 보면 ‘종의 기원’이 다른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화의 생태계는 같았는데 왜 저리도 다른 논리와 표정을 갖게 되었는가.
순회공연 중인 민주통합당의 지정곡은 재벌경제 해체, 한·미FTA 폐지, 무상복지다. 이 지정곡이 시대에 맞는가는 버려둔 채 더 격앙된 목소리로, 더 과격하게 질러대는 급진파 경연장이 이른바 진보의 풍경이다. 저 울부짖는 ‘분노의 바람’은 분명 어두웠던 80년대 혁명전사들과 닮았는데, 옛 처방전의 유효기간 연장을 외치는 진보를 ‘복고적 진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척결, 처단, 탄핵 같은 으스스한 용어로 2012년의 문을 연 그들을.
보수의 지정곡은 부정부패와 반칙에 대한 반성문 쓰기다. 남성들이 반칙하고 여성이 사죄하는 모양새는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있는데, 젊은 세대와 저소득층이 품은 울화병을 해독하지 못하고, 가계가 곤두박질치는 것을 방치한 무력한 정부에 대안도 못 내는 보수를 ‘무지한 보수’라고 해도 좋겠다. 그래도 잘나가는 대기업과 수출 1조 달러를 재기의 발판 삼아 토끼 꼬리만큼 양보할 아량을 내비치는 보수는 산업화시대의 낡은 유전자를 대물림했다. 반성문 쓰고 당명을 바꿔도 유전자가 바뀌지 않으면 ‘철 지난 보수’로 다시 전락하는 건 시간문제다. 단속, 훈계, 독단 말고 보여준 게 없는 그들은.
격돌로 치닫는 요즘 정치판에서 ‘복고적 진보’와 ‘무지한 보수’ 간 접점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종자가 다른 두 정치세력이 전열정비를 마치면 더 치열하게 맞붙을 것이다. 두 정치세력 간 이념적 차이가 좁아질 때 경제가 발전하고 복지도 나아진다. 국민소득이 2만 달러 선에서 수년간 답보상태에 있는 것, 저소득층이 여전히 절망 속에 처박혀 있는 것은 보수와 진보가 서로 멀리 울부짖은 탓이다. 정권이 바뀌면 기존 정책을 몽땅 뒤집고, 다시 뒤집힐 것을 새로 쌓는 탓이다. 쌓다 허무는 짓을 5년마다 반복했다.
시장을 닫고 우리끼리 잘해 보자는 진보, 그러면 비정규직이 정규직 되고 청년들이 직장을 골라잡을 수 있을까? 재벌을 전진배치하고 시장을 열면 자영업자, 중소기업에 돈이 넘쳐흐른다는 보수의 약속은 지켜졌는가? 두 개 다 ‘아니오’다. 답은 두 개를 합한 것, 시장개방과 약자보호가 결합해야 한다. 타협의 지혜다. 무상복지는 부자증세만으로 가능하다? 천만의 말씀, 온 국민이 월평균 10만원쯤을 더 내야 한다. 연평도 포격에 침묵하는 진보, 무조건 대화를 단절하는 보수에 너무 질렸다. 미래 대안 없는 선동가들의 논리는 위험하다. 시민들의 이념성향은 쟁점별로 다르다. ‘너는 누구 편인가?’ 하는 질문, 온당한 현실인식을 호도하고, 소통(疏通)을 불통(不通)으로 만들고, 진취적 제안에 이념적 낙인을 찍는 이분법을 추방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나라당이 ‘보수’를 삭제하자는 불발된 제안에 찬성한다. 민주당도 진보 특허를 취소하라는 이 불발될 운명의 제안을 심사숙고해 줬으면 한다. 보수·진보의 정체성까지 버릴 수는 없겠으나, 마치 경제중심이 IT로 넘어갔듯이 보혁 구도로 정치할 시대는 지났다. 정당구조도 바뀌었다. 세대·계층·지역이 중층적으로 작용하는 한국의 정당은 계급정당이 아니라 범국민정당이다. 현안 쟁점과 시의적 정서가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강원도는 오랜 소외의식, 충청도는 세종시 문제 때문에 집권보수당에서 이탈했으며, 서울과 경기지역은 보수와 진보 경계를 상황적으로 넘나든다. 오늘의 보수는 내일의 진보이고, 심사가 복잡해지면 중도에 한참을 머물기도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민주화 단계를 지나 사회·경제 민주화로 진입한 한국이 이념논리만으로 미래 과제를 제대로 짚거나 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사회민주화의 핵심 키워드인 ‘공정(公正)’을 이 정부가 풀지 못한 까닭도 그것인데, 하물며 복고적 진보로 경제민주화의 핵심인 ‘공생(共生)’을 풀어내겠는가? 러시아 학자가 묘사한 ‘울부짖는 바람’이 정치판의 격돌로 읽히는 올해는 분명 험난한 시간들을 예고한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2012-01-10 1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