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의 이해]2
허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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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밀다는 범어로 파라미타(Paramita) 라고 한다.
그 뜻은 완성, 성취, 도피안(到彼岸), 도무극(到無極), 사구경(事究竟)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바라’는 ‘저 언덕[피안], ‘밀다,는 ‘건넌다’는 의미다. 度彼岸의 뜻이다.
풀이하면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 '완성하다' '성취하다' '이루다'는 의미이다.
이를 앞의‘마하반야’와 함께 번역하면, ‘크나큰 지혜로 피안의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 또는 '위없는 지혜로 깨달음을
성취한다'는 뜻이다. ‘저 언덕’이란, 피안(彼岸)으로 밝은 세계, 깨달음의 세계, 해탈의 세계, 열반의 세계, 정토(淨土),
불국토(佛國土),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한다.
‘이 언덕’이라 함은 차안(此岸)으로 우리가 사는 이곳 사바세계를 말하며 무명의 세계, 미혹의 세계, 고통의 세계,
괴로움의 세계, 번뇌의 세계, 또는 예토[穢土-더러운 땅]라고도 부른다.
‘예토’라고 하면, 흔히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말하는데
모든 것이 혼탁하고 오염되어 있는 탁한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보자.
우리는 육신[身]으로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청정하지 못한 음행을 하는 등의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입[口]으로는 온갖 거짓말과 이간질을 일삼고, 삿된 분별심에 빠져 진실치 못하여 꾸미는 말을 하며, 거친 욕설 등을 일삼고
살아 간다. 또한 생각[意]으로는 탐욕에 빠져 오욕락을 즐기기 위하여 과다한 욕심을 부리고, 조그만 일에도 불끈 화를 내며,
어리석은 삿된 사량심으로 온갖 악한 행위를 하게 된다.
이처럼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짓고, 탐진치(貪瞋痴) 삼독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오염된 이 땅을
‘사바세계’ 즉 예토라 하여 『반야심경』에서는 이 언덕[차안(此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언덕[피안(彼岸)], 즉, 정토(淨土)란 어떤 세계를 말하는 것일까?
정토란, 우리의 신구의(身口意) 삼업이 청정하여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이상(理想) 세계를 의미한다.
한마디로, 부처님의 세계, 열반 해탈의 경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언덕과 저 언덕이 모두 내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곳, 저 곳 으로 나누어 진 것 같지만 실은 이 언덕은 어리석어 무명에 휩싸인 ‘거짓 나’이고, 저 언덕은 깨달아 밝아진 ‘참 나’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라밀다의 뜻은 ‘이 사바세계에서 저 부처님의 세계로 가는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거짓나의 삶에서 참나를 깨쳐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말해 ‘나’의 삶에서 ‘나 없음’의 삶을 깨쳐가는 것이다.
(서방정토의 개념)
부처님 당시의 인도 사람들은 옛날에는 지금처럼 심한 차별이 없이 살았으나 강을 건너 동쪽으로 이주하고부터는 신분의 차별이
심해지고 살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그래서 이전의 서쪽 땅에서의 차별없는 세상에 대한 향수가 서방정토로 개념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들이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이유는,
바라밀다! 즉, 이 사바 예토에서 저 세상 즉, 부처님의 세상으로 가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저 언덕으로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 것일까?
마하반야 다시 말해, 큰 지혜의 배를 타야만 건너갈 수 있는 것이다.
그 배를 불가에서는 ‘반야용선(般若龍船)’으로 상징화하고 있다.
반야용선,즉, 큰 지혜로 부처님의 세계로 영가를 데려다 줄 수 있는 배인 것이다.
이 반야용선의 뱃머리에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타고 계시는데 우리가 가야할 부처님의 세계까지 길을 인도해 주시므로,
‘길을 인도하는 왕’이라는 의미의 ‘인로왕’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이처럼 반야용선은 수많은 무명중생을 모두 태워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래서, 대승(大乘), 즉,‘큰 탈 것’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소승[작은 탈 것]의 배에는 많은 사람이 함께 탈 수 없고,
오직 나 홀로 타고 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대소승의 개념은 대승불교권에서 일방적으로 하는 말이다.
소승은 '나만 가면 된다는 개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안가더라고 나만은 꼭 가겠다'는 강한 구도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고,
대승은 내가 못가는 한이 있더라도 다함께 데리고 가겠다는 강한 원력을 나타낸 것이다.
소승은 우선 나부터라도 먼저 깨달아야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이고, 대승은 중생을 구제하면서 깨달음을 추구하겠다는
것으로 방법의 차이일 뿐이니 중생구제의 원력은 다 같은 것이다.
세계에는 열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이를 십법계(十法界)라 한다.
십법계는, 우리들이 사는 인간계를 포함해 윤회하는 세계인 차안예토[차안-생사윤회의 경지]인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여섯 세계[6]와, 피안정토[피안-해탈열반의 경지]의 세계인 부처님의 세계[1]가 있으며,
차안인 이 언덕에서 피안인 저 언덕에 이르기 위하여 수행하고, 반야용선을 타고 가는 수행 과정에 있는 세계, 즉,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세계[3]가 있다.
여기에서 성문, 연각, 보살에 승(乘)을 붙인 이유는, 반야용선을 타고[乘] 간다는 의미다.
성문이나 연각승은 소승의 수행방법이며, 보살승은 일체 중생을 함께 배에 태워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해 주는 대승의 수행상인
것이다.
이처럼 육도 윤회의 중생세간에서 부처님의 세계로 이르는 방법에는,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볼 때,
크게 ‘성문,연각,보살,의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서 저 언덕에 도달하는 방법도 또한 각각 다르게 마련
이다.
그렇듯,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저 언덕으로 도달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방법상에도 갖가지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대승 소승 막론하고 바라밀다 하기 위한 구체적인 수행방법은 참으로 많다.
예컨대,
참선(參禪) [간화선, 묵조선 등],
염불(念佛)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
간경(看經) [금강경, 반야심경, 법화경, 화엄경, 아함경 등],
주력(呪力) [관세음보살본심미묘진언, 수능엄신주, 신묘장구대다라니 등],
불사(佛事) [敬田불사, 恩田불사, 悲田불사 등],
절 [108배, 삼천 배 등],
기도 [관음기도, 지장기도, 미타기도, 산신기도, 용왕기도 등],
지관(止觀)법 [사마타, 위빠사나 등],
방하착(放下着) 등 숫자로 헤아리기도 힘들만큼의 많은 수행법이 있다.
그러므로, 본인의 근기에 맞는 수행을 선택하여 꾸준히 정진하면 되는 것이다.
주위에서 염불이 좋다고 하면 염불하다가, 참선이 좋다고 하면 참선하다가, 이런 식으로 갈팡질팡 하면 이것도 저것도 모두 제대
로 되지 않는다.
산을 오르는데 이 길로 가다가 중간쯤 가서 힘들다고 다시 내려와 다른 길을 택한다면 너무도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은 당연하다.
한가지 길을 택했으면 힘들어도 쉼 없이 꾸준히 정진해야 한다. 그 중 어느 것도 능히 우리를 저 언덕,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해 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 김영만 근기적 수행법을 통한 열반의 언덕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_()_ 2012-02-05 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