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의 이해]1
허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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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의 이해]
‘마하’는 범어로 ‘Maha’라고 하는데,
범어의 발음만 그대로 따온 것일 뿐, 한자(漢字)로는 특별한 뜻이 없다.
‘마하’의 뜻은,
‘무한히(한량없이) 크다, 무한히(한량없이) 많다, 월등히 뛰어나다, 가장 수승하다, 초월하다, 최고다’ 라는
의미로서, 우리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미의 크고 많다는 개념을 초월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하는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한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개념이다. 무한한 우주의 비유이다.
**마하를 이해하면 보잘 것 없는 지구의 삶에 대한 애착심이 사라진다.
{마하의 비유}
지구의 크기 : 빛의 속도로 1초에 7바퀴 반 소요.
*지구의 달리는 속도(公轉) : 시속 106.560km의 속도(총알보다 8배나 빠름)로, 태양을 한바퀴 도는데 365일 6시간 9분 9.54초
소요.
*지구의 자전(自轉)속도 : 위도에 따라 다르나 한국의 경우 북위37도를 기준으로 초속 350m(시속 1260km)로 (KTX고속열차의
4배나 빠름) 돈다.
태양까지의 거리 : 8분 소요(빛의 속도).
북극성 : 1100 광년.
은하계 우주의 크기(태양계가 1천억개 들어있음) : 10만 광년,
대우주 : 안드로메다 성운까지만 해도 3백만 광년.
현대망원경 : 1억 5천만 광년까지 떨어진 별까지 관찰.
[불교의 우주관] : 우리가 사는 태양계의 1천개가 모인 그룹을 소천세계. ㅡ> 소천세계가 1천개 모인 것이 중천세계
ㅡ>중천세계가 1천개 모인 것을 대천세계 ㅡ>대천세계(삼천대천세계) ㅡ>대천세계가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 만큼 많이 있다고 함.
[과학이 보는 우주관] : 태양계가 천억개 모인 그룹을 은하계우주 ㅡ>은하계우주가 천억개 이상으로 구성된 것을
대우주라고 함.
(미진수 세계) : 이 세계를 가루로 만들어 ㅡ>그 가루로 점을 찍고 ㅡ>8만 4천 세계를 건너 뛰어 ㅡ>다시 가루로 점을 찍고
ㅡ>그렇게 반복해서 모든 가루가 없어질 때까지 점을 찍어 놓은 그 모든 세계가 우주임.
※ 과학이 발달함으로 해서 불교의 진리가 이해된다.(과학이 불교에 장애가 없이 오히려 불교의 진리를 증명해 준다)
반야(般若) : 범어로 프라즈냐(Prajna)라고 하며, 팔리어로는 판냐(panna) 라고 함.
반야는 팔리어 ‘판냐’의 음역어로서, 마하와 같이 그 발음만 따서 옮긴 것이다.
반야는 지혜(智慧)의 뜻으로 일반적으로 지혜는 "어떤 사물의 실상을 바르게 인식하는 힘"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한량없는 지혜, 무한한 지혜, 가장 수승한 지혜, 최고의 지혜, 완전한 깨달음의 지혜를 말한다.
반야지혜는 다시 세 가지로 나눈다.
1) 관조반야(觀照般若) : 일체의 현상계를 있는 빛을 비추어 보듯이 환하게 꿰뚫어 보아서(정견) 깨닫는 지혜 - 認識의 主體.
2) 실상반야(實相般若) : 존재하는 사물에 대해 실체의 모습(진리/법신/공/연기)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 - 認識의 對象.
3) 방편반야(方便般若) : 일체중생을 고뇌에서 벗어나게 하는 여러가지 방법과 수단을 이용, 진리를 깨닫게하는 지혜 - 方便.
문자반야(文字般若)도 방편반야의 일부로서 일체의 모든 경전이 포함된다. 경전은 직접적인 반야는
아니지만, 반야지혜를 이끌어 내는데 없서는 안 될 방편이 되는 것이므로 방편반야라고 한다.
경전은 불법을 공부하는 모든 이에게 나침반과 같고, 뗏목과 같은 수단으로 깨달음 즉 반야에 이르는
매우 중요한 방편이다.
(예: 콜럼버스의 계란 세우기 / 알렉산더 대왕의 말뚝에 감은 밥줄 끓기)
방편반야로 공부를 한 뒤에는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그 실천이 바로 관조반야다.
관조반야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편견, 고정관념 없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실천 수행법이다.
젊은 싯다르타가 깨달은 부처님이 되신 것 또한 바로 관조반야에 의해서인 것이다.
이렇게 방편반야로 부처님의 법을 이해하고,그 후 관조반야를 실천했을 때 나타나는 진리의 실상이 바로 실상반야인 것이다.
이 세 가지 반야는
불교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인 신해행증(信解行證)의 길과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신(信)이 추가 되었다는 점이다.
믿는다는 것은 모든 불교 수행의 기본이 되는 밑거름이다.
염불 하고, 기도 하고, 절 하고, 매일 절에 나와 불공 드리고, 일상 생활 속에서 일체의 괴로운 경계를 방하착하며
비우는 실천을 행하는 이들이 열심히 수행 정진함에도 불구하고 쉽게 포기하는 이유가 바로 믿음의 결여 때문이다.
올곧은 믿음이 없기에 의심을 가지고 수행을 하게 되니, 수행에 어떤 힘이 붙을 수 있겠는가.
믿음이 밑바탕이 되어야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르게 와닿는다.
‘해(解)’의 올바른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경전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실천 행이
뒤따라 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실천행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해(解)에 대해서는 소홀히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수행은 열심히 하는 사람도 경전을 읽고, 강의를 듣고, 불법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이런 생각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부처님도, 2,500년 전 당시 제자들을 교화하고 전법 하실 때, 법을 설함으로써 가르침을 전달하고, 깨달음에 이르게 하셨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먼저 확고한 믿음[信]을 가지고 불법을 배워[解] 실천 수행[行]을 하게 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증[證]"인 것이다.
‘증(證)’이란, 작은 의미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수행을 하였을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크고 작은 깨달음을 의미한다.
불법을 생활화하는 가운데 환희심을 느끼고, 나름대로‘증(證)’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스스로의 작은 깨달음은 우리들에게 보다 굳은 신심(信)을 가져다준다. 그렇게 되었을 때 다시금 우리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 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신, 해, 행, 증 이후엔 또다시 신, 해, 행, 증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이다.
그런데,보다 큰 의미에서의 ‘증’은, 당연히 부처님의 크나큰 반야지혜를 증득(證得)하는 것이다.
우리들 생활수행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상 속에서의 작은 깨침, 깨침의 조각들이 모두 ‘증’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증’은 또다시 굳은 믿음(信)을 가져다주고, 다시금 신해행증 할 수 있는 수행력과 불퇴전의 가행정진을 불러온다.
이렇게 신해행증의 수행이 계속 되어질 때 결국 부처님께서 증득하셨던 밝은 깨침의 반야지혜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이 ‘해, 행, 증’의 단계가 바로 방편반야[解], 관조반야[行], 실상반야[證]와 같다.
‘반야’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 힘은 평등, 절대, 무념(無念), 무분별(無分別),비움의 경지일 뿐 아니라, 반드시 상대의 차별 현상을 관조(觀照)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단순히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현명함이나 지식이 높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모습에 대한 ‘눈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반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깨달음의 문제에서부터, 지금, 이곳 우리의 사회에서 생겨나는 모든 문제 해결이 ‘반야’ 속에 담겨 있다
고 할 수 있다.
인생살이의 자질구레한 문제에서부터, 인간 개개인적인 문제, 사회 문제, 환경 문제, 정치 문제, 경제 문제, 노사 문제 그리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문제 등 그 어떤 문제라도 ‘반야’ 의 지혜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반야의 지혜는 사회의 모든 현상을,선입견, 편견, 고정된 관념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안목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야’는 부처님이나 산 속에서 정진하는 스님들만이 얻을 수 있는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지혜가 아니다.
누구나 수행을 통해서 바로 지금 이 곳에서 ‘반야’ 의 지혜를 구체적으로 획득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반야’의 성취는 인생과 우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는 일이며,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행복을 성취하는 길이고,
사회의 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며, 해탈을 성취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반야’ 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을 이루시고, 보살은 열반을 얻으며, 중생은 당면한 문제와,
나아가서는 삶과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반야는 관조나 실상을 불리하지 않은 반야로서 보는 자(認識主體)와 보이는 대상(認識對象)이 함께 사라져버린 상태에서
드러나는 진리를 깨닫는 지혜이다.
[지혜를 닦는 법] : 聞 - 들어서 아는 지혜(성문).
思 - 사유해서 아는 지혜(연각)
修 - 계정혜를 닦아서 아는 지혜(보살)
- 계속 -
The Maha Prajuna Paramita Hridaya Sutra
Avalokitesvara Bodhisattva when
practicing deeply the Prajuna Paramita
perceives that all five skandhas are empty
and is saved from all suffering and distress.
Shariputra,form does not differ from
emptiness,emptiness does not differ from
form,That which is form is emptiness,
that which is emptiness form.The same
is true of feelings,perceptions,impulses,conciousness.
Shariputra,all Dharmas are marked with
emptiness; they do not appear or
disappear,are not tainted or pure,do not
increase or decrease,therefore,in
emptiness no form,no feelings,
perceptions,impulses,conciousness.
Noeyes,no ears,no nose,no tongue,no
body,no mind; no color,no sound,no
smell,no taste,no touch,no object of
mind;no realm of eyes... and so forth
until no realm of mind conciousness.
No ignorance and also no extintion
of it... and so forth until no old age
and death and also no extinction of
them.No suffering,no origination,no
stopping,no path,no cognition,also
no attainment with nothing to attain.
The Bodhisattva depends on Prajuna
Paramita and the mind is no hindrance;
Without any hindrance no fears exist.
Far apart from every perverted view
on dwells in Nirvana. In the three
worlds all Buddhas depend on Prajuna
Paramita and attain Anuttara Samyak Sambodhi.
Therfore know that Prajuna Paramita
is the great transcendent mantra,is
the great bright mantra,is the utmost
mantra,is the supreme mantra which
is able to relieve all suffering and is true,not false.
So proclaim the Prajuna Paramita
mantra,proclaim the mantra which says;
GATE GATE PARA -GATE PARA-SAM -GATE BODHI SVAHA
GATE GATE PARA -GATE PARA-SAM -GATE BODHI SVAHA
GATE GATE PARA -GATE PARA-SAM -GATE BODHI SVAHA 2012-02-03 1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