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防神學을 표방한 漢白敎會
강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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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욱 칼럼] 민중신학으로 얽혀
한명숙-안철수의 묘한 종교 커넥션
한명숙·안철수의 妙(묘)한 종교커넥션
“맑시스트 크리스천” 자처한 한명숙 남편 박성준, 안철수 재단 박영숙 이사장 남편 안병무
金成昱
1.
10일 안철수재단(가칭) 이사장에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고문이 선임됐다. 묘하게도 안철수 서울대 교수는 박영숙 이사장을 고리로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와 연결된다.
박영숙 이사장 남편 안병무 前한신대 교수(1996년 死亡)는 소위 민중신학의 대부로서 1987년 한백교회를 설립했다. 당시 한백교회를 함께 설립한 사람은 한명숙 민통당 대표의 남편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이다.
박성준 교수는 67년 통혁당 간첩사건으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81년 출소했다. 그는 출소 후인 94년 일본 릿쿄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딴 뒤 다시 미국 뉴욕 유니온신학대에서 공부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을 “맑시스트 크리스천”으로 소개해왔다. 몇 개의 기사를 인용하면 이러하다.
“94년 처음으로 여권이 나온 후 3년 간 일본에 가서 공부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에서 ‘크리스천을 찾아서’라는 글을 연재하면서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참다운 크리스천을 만나고 다닌 것이 준비단계였던 것 같습니다. ‘맑시스트 크리스천’으로서 저를 보완할 수 있는 영적 눈이 필요했지요(2001년 季刊 ‘새길이야기(3호)’인터뷰)”
“(···)朴 선생(박성준氏) 순서가 돌아오자 자신은 지나온 모든 과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고 있다며 기독교인, 맑시스트, 퀘이커, 불교에 막 눈을 뜬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이제 그 살아온 내력으로 사람들과 소곤소곤한 만남을 갖고 싶어 마이크를 쓰는 모임, 인터뷰, 텔레비전 출연은 가급적 사양한다.(週刊기독교 2003년 11월 1509호 인터뷰기사 中)”
2.
한명숙 대표의 남편 박성준氏와 안철수재단 박영숙 이사장 남편 안병무氏가 공동으로 발기해 설립한 한백교회는 소위 解放神學(해방신학)을 표방한 교회다.
한백교회는 주기도문이 없다. 주기도문 대신 사용되는 신앙고백문은 “출애굽 사건과 갈릴래아 민중 예수 사건 속에 보이신 解放(해방)과 생명의 기운이 우리 안에 넘치게 하십시오” 등 내용이다. 88년 만들어진 최초의 신앙고백문 역시 “우리는 이 세계를 나날이 새롭게 변혁하기 위해 역사 속에서 解放(해방)의 실천을 행하시는 야훼 하느님을 믿습니다”로 시작된다.
한백교회는 찬송가 뒤에 수록된 교독문도 없다. 교독문 대신 전태일의 일기를 읽거나 김남조 시인의 시를 읽는다. 교회의 상징은 십자가가 아닌 ‘무명의 돌’이다. ‘한백의 상징’이라 부르는 이 돌들은 한라산과 백두산에서 가져온 것이다.
교회 소개 책자를 보면 비전향좌익수(6·25사변 당시 국군과 싸웠던 빨치산·인민군 출신으로 국군과 싸우며 끝까지 대한민국 편으로 전향치 않은 좌익사범) 박종린氏와의 소모임을 갖는 활동이 있고, 선교 사업으로 비전향좌익수를 후원한다고 적혀있다.
성탄절 예배 주보엔 한진중공업 김진숙씨가 勞使(노사) 잠정합의 찬반투표를 기다린다는 내용의 트위터를 싣고 ‘김진숙의 기도’라는 제목을 달아 놓았다. 그 바로 아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날 피땀으로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 누가복음 (22:41~45) 본문이 실어, ‘김진숙의 기도’를 ‘예수님의 기도’에 비유해 놓았다.
3.
한명숙 대표의 남편 박성준氏는 소위 反戰平和(반전평화)운동에 정력을 기울여 왔다. 그는 심지어 이슬람 지하드(소 ‘성전(聖戰)’)는 “미국이 아랍세계에 가해온 폭력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통제된 폭력”이라고 정당화했다. 또 9·11테러에 대해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미국이 당해 싸다, 통쾌하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편이었다(以上 ‘폭력의 골짜기를 넘어 평화의 너른 들녘으로’ 논문 中)”고 말했다. 일부를 인용해보자.
“한반도는 위험을 안고 있는 불안한 지역입니다. 그 중심에 언제나 미국이 있지요. 우리가 이번의 사태(9·11사태)를 보면서 ‘오만한 미국의 콧대를 꺾었다!’ ‘미국도 당해봐야 한다」는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미국이 무슨 짓을 했기에 테러리스트들이 그토록 처참한 보복을 생각해내게 되었는지, 그들의 사무친 한과 절망과 증오의 뿌리가 무엇인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알게 합시다”
박성준氏는 미국의 이라크전은 “군수산업의 이익을 도모하고, 석유이권과 중동패권을 노려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제물로 삼는 전쟁이 아닌 침략(2003년 3월25일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으로, 아프가니스탄전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삶의 터전으로부터 내몰고 그 나라의 자연을 마구 짓밟고 완전초토화하는 것(2002년 3월21일 著 ‘연두빛 평화의 물결로 한반도를 감싸자’ 등)”으로 비난했다.
그는 91년 걸프전에 대해서도 “수십만의 젊은 이라크 병사들이 미국의 융단폭격으로 사막에서 살육되고, 미국이 이라크 사회의 인프라 구조를 파고해버렸고 생필품의 수입마저 막는 경제제재를 지금도 풀지 않아서 백만 이상의 이라크 어린아이들이 영양실조 등 병으로 죽어갔다(‘폭력의 골짜기를 넘어 평화의 너른 들녘으로’ 등)”고 주장해왔다.
박성준氏는 특히 미국의 對北제재가 한반도에 전쟁을 부른다며 북한정권의 不法행위를 제재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펴왔다. 2002년 경 쓴 ‘연두빛 평화의 물결로 한반도를 감싸자’ 는 글을 일부 인용해보자.
“설마 하다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남북한 민중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만에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부시대통령과 미국정부에게 화해와 평화를 향한 우리 겨레의 역사적 행보를 방해하지 말라고 단호히 경고하자.(···)만에 하나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덮쳐온다면 우리는 휴전선 일대에 평화의 천막을 치고 평화를 호소하는 갖가지 이벤트를 벌인다”
그는 같은 글에서 “우리의 평화와 우리의 안전을 남의 손, 外勢(외세)·강대국 미국에 맡겨놓고 안전을 보장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야 한다”며 “미국의 부당한 간섭과 개입에 맞서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며 미국의 한반도 전쟁책동을 막고 평화를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反戰論(반전론) 또는 平和論(평화론)의 외양을 띄고 있는 박성준의 ‘反美’는 정작 평화를 부수는 북한의 테러나 도발에 대한 비판은 없다. 북한의 핵폭탄 비판도 없다. 김일성·김정일의 700만 민족학살이나 정치범수용소·공개처형, 탈북자 강제송환과 영아살해·강제낙태 등 끔찍한 만행에 대해도 침묵한다.
관대한 잣대는 후세인에게도 적용된다. 후세인은 중동의 屠殺者(도살자)였다. ▲1987년 18만의 쿠르드족 독가스학살 등 수십만의 자국민을 처형해왔고 ▲2000년 대통령 및 친인척 비방 시 ‘혀 절단刑’ 등과 전기고문·눈알 뽑기·강간 등을 자행해왔다. ▲후세인의 폭압을 피해 이라크 인구 2300만 명 중 약 400만 명이 해외로 도피했다. ▲1980~1988년 이란과 전쟁, 1990년 쿠웨이트 침공 등 대량살상무기(WMD)를 동원한 전쟁과 失政(실정)으로 전 세계 석유 매장량 2위인 이라크는 1천억 달러 빚더미에 올라섰다.
4.
박성준氏는 기독교 한 지파인 퀘이커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 펜실베니아 퀘이커 공동체 ‘펜들힐’에서 “평화학”을 공부했다. 퀘이커에 대한 정의는 쉽지 않다. 朴씨는 퀘이커에 대해 “각 사람 속에 빛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라며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하나님의 그것을 지니고 있다(There is that of God in everyone). 이것이 퀘이커 신앙의 정수다”고 정의했다( ‘새길이야기’ 인터뷰).
박성준氏는 퀘이커적 ‘깨달음’을 위해 호흡수련을 강조한다. 그는 같은 인터뷰에서 “베트남출신 틱 낫한 스님의 ‘숨쉬기’ 수련”을 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틱 낫한 스님의 숨쉬기를 수련하라고 권합니다. ‘깨어있는 가득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숨 쉬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숨쉬기는 마음이 흩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숨쉬기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그리고 삶과 깨어있는 의식 사이를 다리 놓아 줍니다.(···)처음에는 정상적인 숨을 쉬다가 차츰 숨을 길고 느리게 하여 숨결이 곱고 잔잔해지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숨의 길이는 꽤 길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숨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가 ‘깨어있는 가득한 마음(mindfulness)’의 상태라 하겠습니다.”
보도자료 및 기사제보 press@newdaily.co.kr
데모시 죽창으로 경찰들을 무자비하게 저지한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철저한 반미주의자이다,
당시 한명숙은 국무총리 로서 공권력으로 저지하지않고 양세력에게 한발씩 물러서라고 지시한바있다.
백두산에서 한라산에서 가지고온 돌을놓고 세운 한백교회는 적화통일을위한 해방신학으로
위장한 교회이다,안철수원장도 DJ와 김정일이 쳐놓은 좌파그물에 깊숙히 걸려들고있다.
박영숙은 DJ부인 이희호와함께 여성기독교회관(YWCA)사무총장 출신들로서
DJ대통령시 평민당 비례대표1번순위로 국회의원을 한바있다.
방송인 김제동씨도 성공회대학에서 길러낸 석사로서 대표적 대중선동가이다.
위 일련의 모두는 안철수원장의 멘토인 박원순 시장의 기획연출작으로 보면된다.
박영숙 남편 故안병무는 누구인가?, 안철수씨와는 동씨性인 安씨이다.
한국교회의 대표적 브랜드 중 하나인 민중신학 운동의 창시자로서, 그 학문적 기초를 놓았던 사람 가운데 안병무가 있다. 그의 신학사상 형성에는 여러 요인이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서구신학의 학문 전통, 역사의 예수 탐구를 비롯하여 한국 근현대사에서 역사의 주체로 부상한 민중의 재발견이 그 하나다. 그동안 그리스도교 역사와 신학의 변두리에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던 개념인 민중을 화두로 삼아 신학의 중심 테마로 끌어들인 것은 안병무의 공이 아닐 수 없다.
. 2012-02-12 17:06
북한만을 상대하기도에도 벅찬 마당에 이제는 남한이 완전히 이념으로 양분되어 정치적인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일방적인 북한의 편을 드는 좌익세력이 대한민국의 정권을 장악하려고 하고있다. 이들이 정권을 장악하면 나라의 안보가 어떤 방향으로 변질될 것인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보통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북한체제를 긍정하고 추종하는 인물들이 종교인들이고 학자들이고 연예인이고 정치인들이다. 공산적화가 거의 다되어가는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고는 젊은 나이에 목숨을 나라에 바치고 국립묘지에 누워있는 호국영령들에게 너무나 큰 죄를 짓는 것 같다.
얼굴만 멀쩡하게 잘생기고 말재주만 그럴듯하게 피우면 애국자이고 민주인사인가?
누굴위한 애국이고 무엇을 위한 민주인가? 민주의 가면을 쓴 인민민주주의자들이 판을 치는 요즘의 세태가 참으로 우려스럽다. 우리가 일본처럼 단일국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국의 힘을 빌리지 않고 북괴를 비롯 주변강대국으로부터 독자적으로 나라를 지킬 국방력도 미치지 못하는 판에 이처럼 좌익 빨갱이들이 설쳐대고 국민들은 서서히 데워지는 남비 속에 든 개구리처럼 안보감각이 이렇게 무디어져도 과연 괜찮은 것인지.. 자유민주체제를 원하는 모든 분들에게 진정 물어보고 싶은 말이다.
일부 보수 정치인들의 부정과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 때문에 나라의 운명을 송두리채 친북좌익인사들에게 맡겨야만 할 것인지... 이것 외에 우리가 선택할 길은 진정 없는 것인지? 스스로에게도 묻고 여러분들에게도 묻고 싶은 것이다. 2012-02-12 18:03
분별력이 약한 不良(불량)언론은 불량여론을 만들고 불량여론은 불량정치인들을 양산하고
이들이 집권하면 불량국가가 된다. 조갑제(趙甲濟)
좌경화된 한국 언론은 사실보다는 신념을 중시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정치인의 부정은 덮고, 자신이 싫어하는 정치인을 공격한 기사가 오보로 밝혀져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보수층이나 한나라당에 불리한 기사는 크게 쓰고, 좌파나 야당에 불리한 기사는 은폐,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여야(與野)가 다 걸린 전당(全黨)대회 돈봉투사건 보도도 그렇다.
며칠 전 조갑제닷컴은 고 보도하였다.
이는 돈봉투보다 더 심각한 문제고 기사감이다.
당가(黨歌)는 그 조직의 정신과 이상을 닮는다.
대한민국에 반역한 이들이 당가(黨歌)를 지었다는 건 민주당의 노선이 反대한민국적임을 시사한다.
관례화된 돈봉투 사건에 비할 수 없이 큰 사건이다. 이런 정당이 집권하면 애국가를 폐지하려 할 것이다.
주요 신문과 방송은 이 경천동지할 사건을 다루지 않았다.
한나라당 당가(黨歌)를,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작곡, 작사하였다면 큰 기사로 집중 보도하였을
것이다.
분별력이 약한 불량언론은 불량여론을 만들고 불량여론은 불량정치인들을 양산하고 이들이 집권하면 불량국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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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당(민주통합당) 당가(黨歌)의 작사자와 작곡자가 1992년 발생한 대형 간첩사건인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연루자들인 것으로 확인됐다.
■ 9일 확인결과 민통당 黨歌 작사자는 이철우 전(前)열린당 의원으로 李씨는 학생 1992년 북한 조선로동당을 남한에서 현지입당한 뒤, 당원 부호인 ‘대둔산 820호’를 부여받은 인물이다.
여기서 ‘현지(現地)입당’이란 북한의 조선로동당에 가입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하지 않고, 남한 현지 간첩을 통해 입당한 후, 북한 조선로동당이 추인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李)씨의 경우 북한 조선로동당의 하부조직인 ‘중부지역당’ 총책 황인오 등에게 포섭돼 다른 주사파(主思派) 핵심분자들과 함께 북한 조선로동당에 가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李)씨는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 방지법 위반 혐의(의정부지방법원 제1형사부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 민통당 黨歌의 작곡자 윤민석은 촛불집회 주제가인 ‘헌법 제1조’를 작사·작곡한 인물로 ‘김일성 대원수는 인류의 태양’, ‘한민전 10대 강령’ 등을 만든 운동권 가요 작곡가다.
윤(尹)씨는 1992년 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 산하 단체인 ‘애국동맹’에 가입, 김일성 찬양노래를 작곡했으며,
이 같은 좌익 활동으로 인해 국보법 위반으로 4차례에 걸쳐 구속됐다.
같은 해 10월6일 안기부 수사결과 발표를 통해 밝혀진 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은 북한 노동당 서열 22위인
이선실(2000년 사망)과 함께 현재 ‘통일운동가’로 활동 중인 김낙중 등이 1995년에 공산화 통일을 이룬다는 전략 아래 펼친 건국 이래 최대 간첩사건이었다.
민통당의 당가(黨歌)는 현재 당(黨)홈페이지(www.minjoo.kr/intro/song.jsp)에서 들어볼 수 있다.
(조갑제닷컴)
김필재(金泌材) spooner1@hanmail.net 2012-02-13 21:04
한명숙은 지금도 통혁당 노선인가?
최종편집 2012.02.14 09:58:26 김성욱 객원논설위원의 다른 기사 보기 글자크기
북한노동당의 남한내 지하당(통혁당)
소속이었던 한명숙 부부
과거 행적에 대한 반성과 전향선언이 없으니 지금도 같은 노선인가?
金成昱
민주당 대표인 한명숙 前총리의 사상과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韓 前총리는 1968년 통일혁명당(이하 통혁당) 사건과 관련, 남편 朴聖焌(박성준)씨와 함께 실형을 선고받았었다. 당시 朴聖焌씨는 1심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대법원에서 刑(형)이 확정됐다. 韓 前총리는 징역 1년, 집행유예1년, 자격정지1년 형을 받았다.
통혁당 사건은 68년 8월 24일 中央情報部(중앙정보부)에 의해 검거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었다. 통혁당은 金鍾泰(김종태)를 서울시당 위원장으로 하여 金瓆洛(김질락)·申榮福(신영복) 주도의「민족해방애국전선」과 李文奎(이문규)·李在學(이재학) 주도의「조국해방전선」아래 다양한 서클·조직·학사주점 등을 조직, 공산혁명을 획책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통혁당이 합법·非합법, 폭력·非폭력의 배합투쟁을 통해 1970년까지 소위 「결정적 시기」를 조성, 민중봉기함으로써 共産政權(공산정권) 수립을 획책해왔다고 발표했다.
A4 용지 1000여 쪽에 달하는 통혁당 관련 판결문은 이 사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정의했다.
《통일혁명당이 북괴의 무력남침에 대비한 사전 공작으로 조직된 단체로서 유격전을 기도하여 무력행사를 준비하였으며, 과거의 남로당 조직을 부활시킨 조직체일 뿐만 아니라 지식층의 청년을 포섭하였으며, 잡지 반포, 당소조의 조직, 당원에의 적색사상 교양, 데모 조정, 해안선 답사, 유격전술요원 입북, 간부진의 빈번한 入北(입북)과 국가기밀 누설, 거액의 공작금 지원 등이 있은 사실…》
통혁당의 기본성격은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의 지시를 받는 地下黨(지하당)이었다.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越北(월북)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했고, 黨員(당원) 이진영·오병헌은 68년 4월22일 越北(월북)해 교육을 받던 중 68년 6월 말 통혁당 사건이 발생하자 북한에 머물렀다.
통혁당 서울시당 위원장 金鍾泰(김종태)는 4차례에 걸쳐 북한을 왕래하면서 김일성을 면담하고 美貨(미화) 7만 달러, 韓貨(한화) 3천만 원, 日貨(일화)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간첩지령형식인 A-3지령만 167회를 수신했다. 그는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집단 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揚陸(양륙)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띄고 있었다.
북한은 통혁당에 대한 검거망이 좁혀오자 金鍾泰(김종태) 등을 구출하기 위해 무장공비를 남파하기도 했다. 북한 753부대 소속 武裝工作船(무장공작선)은 68년 8월20일 제주도에 도착했으나, 우리 군경과의 교전 끝에 14명 중 12명이 사살되고 李承卓(이승탁), 金一龍(김일룡) 등 2명은 체포됐다. 이들 무장공비들은 김종태를 구출하여 월북시킨 뒤, 북한정권수립 20주년 기념일인 9·9절에 남한대표로 김일성 앞에서 연설하게 할 예정이었다.
주범 중 한 명인 金瓆洛(김질락)은 옥중유고 「주암산」에서 『통일혁명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비밀 地下黨(지하당) 조직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리 없고 통혁당의 조직상황과 활동상황이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 됐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고 쓴 바 있다.
그는 같은 책에서 월북 당시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에게 『우리 통혁당은 남조선 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地下黨(지하당)임을 자처하고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 인민의 힘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각계각층에 대한 군중공작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고 적고 있다.
康仁德(강인덕) 前 통일부장관은 자신의 저서「공산주의와 통일전선」에서 조선로동당과 통혁당은 지령을 내리고 받는 中央黨(중앙당)과 地下黨(지하당) 관계라며 이렇게 적고 있다.
《통일혁명당은 출발부터 북한 中央黨(중앙당)의 하부조직으로 발생한 것이다. 통일혁명당 창건의 필요성, 그리고 조직적 사상적 준비는 모두 북한 조선로동당이 계획한 것이다...당원은 제각기 독립된 인자로서 핵심을 유지하며 평양에서 발신하는 지령에 따라 단독으로 활동하면서 그 경과를 중앙당 대남사업 담당부서에 보고하는 형태이다. 따라서 남한 내 地下黨(지하당)은 「남조선혁명의 참모부」가 아니며 한낱 「말단초소」에 불과하다》
당시 中央情報部(중앙정보부) 수사발표에 따르면, 韓 前총리의 남편 朴聖焌씨(당시 서울대경제학과 4년. 25세)는 1967년 6월 申榮福(신영복)에게 포섭된「黨(당) 小組責(소조책)」으로서 妻(처) 한명숙 및 朴OO, 金OO 등을 小組(소조)로 포섭했다. 그는 『서울 상대를 위시한 각 대학 출신 및 재학 중인 기독교계 학생을 모체로 결성된 「기독청년 경제복지회」를 주도하여 資本主義(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비판하고 소위 사회주의적 복지경제를 주장하면서 북괴의 경제제도를 찬양, 이를 연구 보급했다』는 것이다.
공안전문가 A씨는 黨小組責(당소조책)과 小組(소조)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의 지하당에서 입당한 당원 중 최소 조직을 細胞(세포)라 칭한다. 일반적으로 3명의 당원이 1개 세포를 이루며, 3개 세포가 1개 小組를 이룬다. 小組와 細胞는 지하당 활동의 최소 조직을 가리킨다. 지하당의 小組와 細胞, 그리고 이들을 관리하는 간부인 黨小組責이었다는 것은 당연히 地下黨(지하당)에 입당한 黨員(당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당시 중앙정보부는 朴聖焌씨와 같은 黨小組責(당소조책)을 「통혁당 幹部(간부)」로 판단했고, 법원 역시 이를 받아들여 1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는 것이다.
당시 검찰은 朴聖焌씨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음모, 반공법 위반죄를 적용했다. 당시 韓 前총리의 통혁당 사건 관련 판결문은 이러했다.
《북괴는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조직된 反국가단체로서, 북괴가 간행하는 표현물이나 기타 사회주의 서적을 반포하는 행위는 북괴가 시도하는 행위에 동조하는 행위로서 북괴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피고인 한명숙 등은 박성준으로부터 북괴 간행 「청춘의 노래」를 빌려 받고, 박성준의 부탁으로 엥겔스가 쓴 「사회사상총설」 1권을 받아 그 책에 있는 「공산당 선언」을 노트에 필기하고, 박성준의 지시로 이○○, 최○○와 같이 읽고 反국가단체의 활동에 동조하는 한편 찬양-고무하는 표현물을 취득 복사, 보관, 반포하여 북괴를 이롭게 했다》
조선로동당과 통혁당은 中央黨(중앙당)과 地下黨(지하당) 관계이며, 통혁당 주범인 김종태 등은 물론 朴聖焌씨 역시 地下黨인 통혁당에 入黨한 것으로 판단됐다. 그렇다면 이 地下黨 入黨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중앙정보부가 1973년 펴 낸「북한대남공작사」에 따르면, 『地下黨(지하당) 입당은 혁명을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을 맹세하는 형식으로 이뤄지며, 비준은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으로부터 당원비준의 권한을 위임받은 공작원만이 할 수 있고, 최종결정은 역시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에 보고했을 때 이뤄진다. 지하당은 보안상 당증을 발급하지 않지만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에 등록돼 있는 일정한 番號(번호)를 수여하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地下黨(지하당)인 통혁당에 입당했던 이들은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 담당부서에 기록이 남겨 있을 것이란 뜻이 된다.
黃長燁(황장엽) 前 조선로동당 비서와 함께 97년 탈북한 金德弘(김덕홍) 前 여광무역 대표는 『한번 입당을 하면 영원한 고리가 된다』며 入黨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입당기록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당원등록과에 등록이 됩니다. 특히 남한 내 地下黨(지하당) 입당은 대남공작활동에 해당하기 때문에 조선로동당 비밀문서과·해당 공안부서 담당과 등에도 기록돼 永久(영구)관리되죠. 아마도 김정일 정권이 무너지면 이 같은 기록들은 모두 공개될 것입니다』
통혁당 사건의 주범인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사형을 당했고,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북한은 통혁당 사건 이후 연루자들에 대한 영웅화에 나섰다. 69년 1월25일 김종태와 이문규에게 사형이 확정되자 평양 모란봉극장에서는 김종태와 이문규를 지지하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다.
김종태는 69년 7월10일 사형집행을 받은 후 김일성으로부터 「영웅칭호」가 내려졌다. 69년 7월12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는 「김종태 추도 결의문」을 채택했고, 같은 해 7월13일부터 19일까지 북한 전역에서 「김종태 추도기간」이 설정됐다. 평양대극장을 비롯해 각 시·도·직할시·구분대·구분대당위원회·공업기업소·협동농장·교육문화·보건기관에 이르기까지 대대적 추도식이 거행됐다.
북한 내각은 김종태에게 영웅 칭호 외 북한 최고훈장인 「금성메달」과 「국기훈장제1급」 을 추서하고 평양 전기기관차 공장을 「김종태 전기기관차 공장」으로, 해주사범대학을 「김종태 사범대학」으로 개명했다. 평양 시내에는 「김종태 거리」가 생겨났다.
69년 11월6일 이문규가 사형을 당하자 역시 영웅 칭호가 수여됐다. 살아남은 최고위급 통혁당 간부인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1988년 특사로 출감했다. 그는 89년 이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했었다.
韓 前총리는 통혁당 사건과 관련, 『남편이 연루돼 있었기 때문에 아내로서 옥바라지 한 것뿐, 알지도 못하고, 평가하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고 밝혀왔다.
朴聖焌씨 역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선노동당이나 통혁당 같은 조직에 가입한 적도 없고 포섭된 적도 없다(2006년 4월3일 동아)』,『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다(2006년 3월27일 오마이뉴스)』,『나는 통혁당과 관련이 없고,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다(2006년 3월27일 조선)』,『신영복 선생으로부터 책을 빌려 받은 것이 전부인데 15년형을 받았다(2006년 3월25일 문화)』고 밝혔었다.
韓 前총리는 1979년 이른바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처벌받았다. 그는 당시 이우재, 장상환, 황한식, 신인령, 김세균과 만나 모스크바방송·북경방송·평양방송·통혁당 목소리 방송 등을 들었던 것으로 판결문은 전한다.
《써클회원 6명이 모인 자리에서 회의를 속개하기에 앞서 그 집에 있던 라디오를 조작하여 「어버이 수령 김일성…」하는 북괴의 어린이가 김일성을 찬양하는 북괴방송을 함께 들은 후 나머지 피고인들에게 「스웨덴의 탁아소 등 어린이 복지시설이 잘 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잘 되어 있는 곳은 以北(이북)이라고 하더라」는 요지의 말을 하여 反국가단체인 북괴 또는 국외 공산계열의 활동에 동조 또는 찬양하여 이를 이롭게 했다》
판결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고인 한명숙은 다른 피고인들에게 「여성문제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 것이니 읽어 보라」면서 「조선여성독본」 복사판을 제공하였다》
韓 前총리는 「크리스챤 아카데미」과 관련해 2001년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이 조치는 통혁당 사건과는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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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혁당 판결문의 총리 부부 행적 추적
『「어버이 수령 김일성…」 하는 북괴의 어린이가 김일성을 찬양하는 북괴방송을 들었다』(한명숙 판결문)
월간조선
『現 사회는 정치경제적으로 외세의 지배下에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악순환을 제거하기 위해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개혁해야 한다』(박성준 판결문)
백승구 월간조선 기자
(이 기사는 월간조선 2006년 5월호에 실려있습니다.)
37년 만에 공개된 통일혁명당의 전모
37년 만에 세상에 공개된 통일혁명당 사건의 법원 판결문은 당시의 사건 규모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A4 용지 1000여 쪽에 달하는 판결문은 통혁당 사건이 한국전쟁 이후 최대 간첩단 사건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사건으로 158명이 검거됐고, 73명이 검찰에 송치됐으며, 30명이 중형을 받았고, 주모자 5명은 사형당했다.
피고인 명단에는 이른바 「진보지식인」이라 불리는 인사들이 적잖게 포함돼 있다. 한명숙(한명숙) 총리지명자의 남편 박성준(박성준) 성공회大 교수도 그중 한 명이다. 판결문은 박성준씨와 한명숙씨의 행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현대史의 한 단면을 머금은 「세월의 먼지」를 조심스레 털며 판결문을 한 장 한 장 넘겨 봤다. 시대상을 반영하기 위해 판결문에 적힌 당시의 용어를 그대로 인용했다. 기록은 통혁당 사건을 이렇게 규정했다.
문건의 첫 머리는 통혁당 사건의 주범 김종태(북괴노동당 대남공작원), 김질락(북괴노동당 대남공작원 가명 백두오), 이문규(북괴노동당 대남공작원 가명 백두육), 이관학(괴뢰 군인), 김승환(괴뢰 군인) 등 5명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금종태-금질락-신영복-박성준」
1968년 검거 당시 박성준은 서울大 경제학과 4학년이었다. 그는 1968년 1심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대법원에서 刑(형)이 확정됐다. 박성준은 대학 선배였던 신영복(신영복ㆍ現 성공회大 교수)으로부터 포섭돼 사상교육과 학습을 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박성준은 신영복으로, 신영복은 금질락으로, 금질락은 핵심 주범인 김종태로 이어지는 인맥 조직도를 그리고 있다.
통혁당 사건 당시 신영복은 서울大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육사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이 사건의 주범들과 직접적으로 연루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간 복역했다. 신영복은 김질락 등 사건의 핵심 인물들과 자주 만나 지시를 받고, 사업 진행상황을 보고했다. 서울大 출신으로 북한과 직접적으로 연결됐던 김질락은 신영복 등 젊은 청년을 포섭하는 일을 했다. 다음은 판결문의 일부이다.
검찰은 박성준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음모, 반공법 위반죄를 적용했다.
「민족적, 사회민주적, 사회대중적 사회」
당시의 검찰 공소장에는 「박성준이 사회주의·공산주의·유물론 등 사회과학 서적은 물론 北이 발행한 불온서적도 열심히 학습했다」고 적시되어 있다. 박성준은 이같은 책을 열심히 읽은 후 주변 인물에게 사상을 전파한 걸로 돼 있다. 그가 공부했던 책은 다음과 같다.
법적 판단을 떠나, 당시의 박성준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판결문에 나타난 박성준의 발언이다.
통혁당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종태는 재판 과정에서 검찰의 공소사실을 대부분 시인했다. 그러나 김종태 등과 직·간접적으로 연루됐던 「청맥」의 주요 인물들은 자신들이 행위가 북한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심 판결에 불복한 박성준은 항소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법원은 『박성준이 「現 사회는 사회주의 제도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反국가 단체의 활동에 동조했다』고 판단, 원심을 확정했다.
박성준이 수형생활을 하는 동안 부인 한명숙도 이 사건에 연루돼 1973년 반공법 위반으로 실형(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형)을 받았다.
북한방송 청취
한명숙은 1979년 이른바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처벌받는다.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1970년대 초반 한국 사회구조의 병폐를 없애기 위해 강원룡 목사가 만든 단체이다. 한명숙은 당시 여성 교육을 담당하는 여성부분 간사로 일했다.
한명숙은 이우재, 장상환, 황한식, 신인령, 김세균과 만나 모스크바방송·북경방송·평양방송·통혁당목소리방송 등을 들었던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판결문은 한명숙의 여성사회에 관한 활동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한명숙 총리지명자는 「크리스챤 아카데미」과 관련해 2001년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이 조치는 1973년 통혁당 사건과는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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