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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의 이해]8

허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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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설(五蘊說)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연기법(緣起法),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등의 교설과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연기법의 세계이기에, 삼법인이라는 현실의 속성을 알 수 있는 것이며,
그러기에 일체가 공하고, 무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공(空), 무아(無我)라는 것은 '없다'라는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일체제법이 연기한다’는 사실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연기이므로 공이고, 무아이며, 중도이고, 무자성인 것이다.

 

오온이라고 하면 일체 현실의 세계를 다섯 가지로 나눈 것이다.
또한, 인간을 다섯 가지 요소로 나눈 것이기도 하다.
이 오온을 특별히 인간에 적용시켜 말할 경우 오취온(五趣蘊)`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온의‘蘊(Skandha)은 ‘모임’이라는 뜻으로 때로는

음(陰)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오온(五蘊)이란 일체의 현상세계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다섯 가지 모임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오온은 좁은 의미로 볼 때,

인간 존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넓은 의미로 쓰일 때는 일체의 존재를 가리킨다.
일체의 구조를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말인데,
색(色)은 현상계의 물질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며,
수(受),상(想),행(行,식(識)은 정신세계의 총체를
네 가지로 나눈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분류법은 물질보다는 정신에 중점을 두고 있다.
오온설은, 물질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으로서 무상한 것으로 이해하지만,
정신은 실체적이며, 영원하다고 믿고

그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법한 교설이다.
그러므로 오온은 물질보다 정신을 더 자세하게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일체만유는 물질적인 요소인 색(色)과,

정신적인 요소인 수상행식(受想行識) 등 다섯 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특별히 인간의 분류법으로 볼 때는 오취온(五趣蘊)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에 대하여 고정적인 자아[나]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취]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오온을 하나 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1) 색온(色蘊)
색이 빛과 모양을 가진 물질을 의미하며, 인간에게 있어서는 육체를 가리킨다.
이러한 색은 지, 수, 화, 풍의 네 가지의 요소로 이루어져있으며 이를 사대(四大)라고 한다.
지(地)라는 것은 우리 몸의 뼈, 손톱, 머리카락, 살 등 딱딱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것은 우리가 죽을 때 모두 땅[地]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수억 겁을 윤회한 이 땅의 이 모든 자연, 흙, 나무, 등이 모두

과거, 또 그전 과거에는 나의 몸이었을 수 있는 것이며,
지금 나의 몸 또한 백 년 내지 이백 년 후면 다시 처음 나왔던 그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육신,지(地)는 일체세간의 지(地)가 인연을 만나

우리의 몸을 잠시 이루고 있을 뿐인 것이다.
내 앞에 떨어진 흙 한 줌, 나무 한 토막이 과거나 미래의 어느 순간
나의 몸을 이루는 내가 되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을 올바로 보지 못하기에 우리는 이 육신에 집착한다.
그런 까닭에, 자신의 몸은 그렇게 아끼며 집착하지만,
자연에 대해서는 내 몸처럼 아끼고 잘 가꾸지 않는 것이 우리의 마음인 것이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색(色)이 항상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면
이 몸뚱이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몸 뿐 아니라 대지 위에 있는 나무, 돌, 광석들은 모두 항상하지 않다.

현대과학은, 모든 물질은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 하나가 모두 플러스, 마이너스의 스핀 운동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의 몸 세포 하나 하나가 죽고 새로 생기기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우리의 몸이 전혀 새로운 세포로 변화되는데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처럼 색온은 무상하고, 항상하지 않는 것이다.

2)수온(受蘊)
수(受)란 감수작용(感受作用)을 말한다.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고수(苦受)와 낙수(樂受),그리고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이다.
즐거운[좋다] 감정과 괴로운[싫다] 감정, 그리고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정을 말한다.
우리의 주관적, 내적인 감각기관인 육근(六根)과
그것에 상응하는 외적인 대상인 육경(六境)이 서로 만날 때,
이러한 세 가지의 감정이 생기는 것이다.

안근(眼根)[눈-모양]으로 색(色)을 바라볼 때,
예컨대, 우리가 아름다운 경치를 볼 때,
남자들이 몸매 잘 빠진 여자들을 볼 때,
좋다는 감정이 생기며,
공포영화나, 징그러운 해골을 보던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볼 때, 싫다는 감정이 생긴다.
그러나, 무심코 지나다니는 사람을 멍하니 지켜볼 때처럼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을 때도 있는 것이다.

이근(耳根)[귀-소리]으로 무언가[聲]를 들을 때,
즉, 욕을 듣던가 꾸지람을 들으면 싫은 감정이 생길 것이며,
칭찬을 들으면 좋다는 감정이 생기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비근(鼻根)[코-냄새香], 설근(舌根)[혀-맛味],
신근(身根)[몸-접촉觸], 의근(意根)[뜻-생각法]들도
이러한 세 가지의 감정을 나타내기 마련인 것이다.

이러한 수온(受蘊)의 감정은,
그때그때 인연이 생함에 의해 잠시 나타났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비근[코]으로 나쁜 냄새를 맡고 나서도 잠시 후, 혹은 다른 장소로
이동함으로써 다시 좋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의근에서도 마찬가지다.
좋은 생각이 들다가도 과거의 좋지 않았던 일을 회상하면
순간 기분이 나빠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수온의 세 가지 감정도, 색온(色蘊)의 그것과 같이,
영원한 것이 아니고 순간순간 변해 가는 것들이다.

이와 같이, 수온의 감정이 무상한 것임을,
그리고, 그 감정에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아 거짓임을 안다면,
좋고 나쁜 감정에 얽매여 괴로워하는 우(愚)를 범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들은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그 일에 마음을 꽁꽁 묶어 두고
괴로워하며,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한없이

들뜬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게 마련이다.

이 두 가지 감정 모두가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알아
거기에 얽매이거나 회피하는 두 가지 모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수행자의 바른 행이라 하겠다.
기분 나쁜 마음과 좋은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려면,
그 경계에 처했을 때, ‘이 감정은 실체가 아니다'라고 관(觀)함으로써

어느 정도 자유로와 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수온 또한 항상하지 않는 무상한 것이다.

3)상온(想蘊)
상(想)은 개념, 또는 표상(表象) 작용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대상에 대하여 식별하고,
그 대상들에 이름을 부여하는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법당의 부처님을 뵙고,
‘아! 저 분은 부처님이시구나!’하고 개념을 만드는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일체의 모든 것에 대하여 상(相)을 짓는 것을 말한다.

 

무언가를 보면, 우리는 이전에 우리가 이름지어 놓은 것을 되살리어
기억 속에 개념지어 놓은 것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예컨대, 머리를 깎고, 회색 먹물 옷을 입은 분은
스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스님’이라고 이름짓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은 고정 불변한 것일까?
우리들은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에 빠져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없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 일체 대상에 대한 표상, 이름들은
우리가 그렇게 정해놓은 것이지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어떤 대상을 부를 때,

우리의 언어로 하늘, 땅, 나무, 꽃, 집, 부모, 자식, 등의 개념을

대상에 접목시켜 관념상의 이름을 붙인 것뿐이다.

흔히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온 환경,

사회가 제공하는 고정관념에 빠져 그것이 절대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상을 짓는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크게 작용하는가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사람들이 절에 나와서 염불하고, 절하며, 주력하고,
열심히 수행정진을 하는 것을 보면
참 좋다는 생각을 하고, 신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저렇게 열심히 정진을 했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를 입으로 열심히 외우며, 팔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그들 모두가 열심히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볼 때,
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올바르지 못한 종교에 빠진 그들이 불쌍하고 측은하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절에서 정진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불교는 공인된 정식종교이며 오직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로

그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것도 고정관념에 불과하다.
불교도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는 사이비 종교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스님들이 몰래 숨어서 불법을 펴기도 했던 것이다.


이처럼 종교에 대해 하나의 상을 지어 놓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잣대로 남의 신앙생활에 대해 평가를 한다.
우리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다른 종교에 대해
극단적으로 좋고 나쁜 평가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의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서로 다른 평가를 한다는 것은,
사람에 따라 각기 그 행위에 대해 엄청나게 서로 다른 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그 상에 대해 ‘내가 옳다’는 집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입장이 틀릴 수 있음을 전제하지 않고 오직 자기마음에 이미지화되어  
새겨진 지독한 고정관념이며, 편견인 것이다.

이런 것 때문에 타종교에 대해서 인정하지 못하고 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듯 상을 짓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의 환경과 조건에 따라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이며, 실제로 항상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지못하고 자신의 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면 언제까지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4)행온(行蘊)
행(行)이란 ‘형성하는 힘’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히 인간의 의지작용을 가리킨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작용, 행위로 인해 업(業)을 짓게 되는 것이다.
넓은 의미로,
행은 수, 상, 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작용을 총괄한다고 한다.
예컨대, 기억, 상상, 추리 등의 정신작용을 말한다.
우리들은 몸으로, 입으로 행동하기에 앞서
정신적인 의지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행온으로 인하여 우리들은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
(선하다, 악하다는 판단은 상온이 함)를 하는 것이며,
지금까지 관념화되고 관행화된 기준과 판단에 의거 공익적인

윤리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업(業;행위의 반복으로인한 습성화)이 되는 것인데
이러한 업을 짓게 하는 것이 바로 행온에 해당한다.
인간의 의지작용은 우리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상에 기초한

선악이라는 개념작용 등에 의지하여 생기게 마련이다.
십이연기에서는 무명(無明)에 의해 행(行)이 생긴다고 했는데,
상온에 대한 무명, 다시 말해 ‘항상한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행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행온(行蘊) 또한 무상한 것은

그 기반인 상온(想蘊)이 무상하기 때문이다.

5)식온(識蘊)
식(識)은 일반적으로 분별, 인식 또는 그러한 작용을 말한다.
그러나 직접 대상을 판단하고 인식하는 작용을 하는 것은 상온의 작용이고,
식온은 다만 대상을 상이 생겨나기 전(前)단계까지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주의(注意) 작용정도라 하면 될 것이다.
쉽게 말해, 가까이 있는 꽃 한송이를 보았을 때

눈앞에 무언가가 나타난 것을 인식하는 작용을 말한다고 보면 된다.


지금까지 언급한 각각의 다섯가지 온에 대하여
전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정리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예컨대, 입안에 사탕이 하나 들어왔다고 할 때
입안에 무언가가 들어왔음을 아는 것이 바로 ‘식온(識蘊)’이며,

맛을 보니 달고 맛있다는 느낌이 바로 '수온(受蘊)’의 작용이고,
이렇게 단맛이 나는 것은 전의 기억, 사탕이라는 것에 대한 이전의 표상작용에 의해,
‘아하! 사탕이구나!’하고 느끼는 것이‘상온(想蘊)’이고,
단맛이 나는 것을 빨아먹는 행위나, 더 먹고싶어서 다시 사탕을 찾는 행위,
그리고 다른 사탕을 찾아 먹는 행위 등이 바로 ‘행온(行蘊)’의 작용인 것이다.



  • 김영만 오온(五蘊)-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_()_ 2012-02-24 11:12 댓글삭제
  • 최순심 그러므로 무아의 견지에서 보면 물질(실체)없고 느낌 생각 행위 의식 (정신) 도 실체가 없으면 안 이 비 설 신 의 (6근)
    도 실체가 없으면 물질 소리 냄새 맛 닿음 법 (6경)도 실체가 없으면 눈의 인식 세계에서 부터 의식의 인식세계(6식)
    18계 까지도 실체가 없으면 무명에서 부터 노사까지 (순환연기) 무명이 없어지므로 부터 노사가 없어지는것(환멸연기)
    도 실체가 없으면 고집멸도(사성제)도 실체가 없으면 지식을 얻는다는 것도 실체가 없느니라~마하반야바라밀~
    2012-02-24 23:07 댓글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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