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만원짜리 번뇌
허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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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만원짜리 번뇌
하안거 결제법회의 사회를 보려 길상사로 가기위해 버스를 타고 가다가
성북동 정류장에서 내렸다. 신호등을 기다리다보니 옆에 경찰이 서 있었다.
조금 늦은 시간이어서 마음은 바쁜데 청색등이 켜지지 않는다.
왕래하는 차가 없는 틈을 타서 건널목 길을 이용하여 도로를 건넜다.
이런 행위는 내가 사는 아파트 근처의 도로에서 흔히 하는 행동으로 일종의
습성 즉, 업이 되어 온 것이기도 하다.
바쁜 마음으로 택시를 잡으려고 걸어가는데 호각 부는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정류장에 서 있던 경찰이 따라와서 신분증을 보자고 한다. 짐작은 가면서도
왜그러냐고 물었다. 도로교통법을 위반했다고 한다. 바빠서 그랬으니 봐 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안된다고 한다. 더구나 경찰이 서 있는데 버젓이 신호위반을
했다면서 단단히 벼른 모양 같았다.
범칙금 통지서를 받아보니 벌금이 3만원이었다.
불과 3~4미터를 차가 없는 순간에 건너간 규정위반의 대가였다.
경제활동을 못하여 수입이 없는 나로서는 큰돈이었다. 범칙금이 이렇게 비싼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한번도 이러한 범칙금은 물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돈이 아까웠다. 이 돈이면 서울서 부산까지도 갈 수 있는 돈이다.
아까운 만큼 경찰이 원망스러웠다. 어떻게 보면 재수 없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누굴 탓하랴! 다만 내 잘못인 것을.....
신호규정은 보행자와 운전자의 안전을 위해서 만들어 놓고 설치한 한 것으로
스스로 어겼으니 벌금을 무는 것은 당연하지만 왠지 억울한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왜 억울하게 느껴질까? 우선은 돈 때문이다. 3만원이면 큰돈이다.
이 돈으로 차라리 보시를 했었더라면, 맛있는 음식을 남에게 대접했더라면,
아니면 노숙자에게 쥐어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벌이 없는 금쪽같은 돈을 경찰청
수입에 보태주다니.. 생각할수록 억울한 기분이었다.
내가 이렇게 돈을 아까워하는 것은 아마도 내가 보시에 인색한 탓인지도 모른다.
아까워하는 마음이란 인색한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벌금이든 보시금이든
내 수중의 돈을 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남을 위해 사용된다는 면에서는
같은 것이다. 다만 자의냐 타의냐의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같은 용처라도 타의에
의한다는 것은 그 만큼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빼앗기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이런 마음이 나를 번거롭게 하는 것이다.
내게 유리한 경우나 내 입장에서 일으킨 일들이라면 내가 굳이 번뇌하지 않았을 것
이다. 이처럼 번뇌란 내가 불리한 입장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번뇌에서 벗어
나는 길은 다른 도리가 없다. 내가 억울하다는 생각, 상대가 원망스럽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길 밖에 없다. 그렇게 하려면 나를 죽여야 한다.
나라는 생각, 억울하다는 생각, 원망스러운 대상에 대한 생각을 없애려면 철저히 나
를 죽여야 한다. 나와 상대를 구분하고 분별하는 생각을 지우면 자연히 억울하다거나
원망하는 마음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다. 간단한 원리이지만 우리들은 나와 내 것이
라는 집착의 사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상분(相分) 때문이다.
원래 내 것이란 없는 것임에도 어떤 인연으로 잠시 내게 온 것을 모두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집착한다. 이러한 집착심이 나를 괴롭히는 번뇌가 되는 것이다. 결국 번뇌
란 가진데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得之本有요, 失之本無라' 하였듯이 얻었다 한들
본래 있던 것이요, 잃었다 한들 본래 없었던 것인 도리를 안다면, 인연따라 얻어지고
인연따라 빠져나가는 것에 연연하지는 않을 것이다. 작은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또
다른 작은 집착에 빠지면 벗어날 수 있고, 큰 집착을 벗어나려면 또 다른 큰 집착에
빠지면 앞의 집착에서 벗어 날 수가 있다. 결국 집착이란 순간순간의 생각의 옹이인
셈이다. 생각의 옹이에서 원천적으로 벗어나려면 無常과 無我를 관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준 삶의 지혜인 것이다.
음력 4월 15일 하안거 결제 날을 맞이하여 스스로의 잘못으로 인한 번뇌와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을 다시한번 사유하면서 흔들리는 마음을 한철동안 잘 다잡았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20110517/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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