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비구승들만의 것이 아니라 사부대중의 것이다.
김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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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비구승 들만의 것인가? / 현행 삼귀의는 개정되야..
불자들의 공통된 이야기는 도박과 성매수 의혹에 관련된 스님들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불교를 사랑하고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발원한 불자들에게 있어서 스님들의 이번 추문은 실망을 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스님들끼리 진흙탕 싸움에 불교가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매우 염려 하는 것이다.
특히 종단 최고위층이 성매수 의혹에 휩싸여 신문과 방송, 인터넷 포털 메인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불자들의 ‘자존심’에 타격을 주고 있는데, 이런 소식을 접한 불자들의 한결 같은 이야기는 성매수의혹에 휩싸인 당사자는 즉각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각종 추문이 보도 되면 될수록 불교의 이미지는 점점 나빠져 결국 피해보는 것은 불자들이다. 자신이 불자임을 밝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매스컴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몇 개월만 다루다 보면 불교신도가 ‘백만명’ 정도가 이탈 할 것이라는 어느 스님의 예측은 결코 허황된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매수 등 온갖 추문에 휩싸여 있는 스님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자리에 있다면 ‘불격’ 또한 낮아진다. 타종교인이 본다면 ‘그 밥에 그 나물’로 보는 것이다. 불자들이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하여도 추문에 휩싸인 종단 최고위층과 불자들은 동격이 되어 버린다.
한사람의 성매수 의혹에 휩싸인 종단지도자는 불자들이 뽑지 않았다. 불자들은 참정권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조계종 총무원장 자리는 종회의원 전원과 각교구본사별로 10인의 선거인단이 구성되어 불과 200에서 300명 가량되는 선거인단에서 선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총무원장 자리는 반드시 스님들만이 뽑을 수 있는 것일까. 재가불자들은 참여 할 수 없는 것일까. 잘못 선출된 종단 지도자로 인하여 참정권이 없는 불자들이 정신적으로 상처 받고 사회생활하면서 불이익을 받는다면 매우 억울한 일이다. 그래서 총무원장 직선을 하게 된다면 재가불자들도 당연히 참여 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불교는 비구승들만의 것이 아니라 사부대중의 것이기 때문이다.
조계종 종헌을 보면 “제 8 조 본종은 승려(비구·비구니)와 신도(우바새·우바이)로써 구성한다.”로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불교 종단이 비구승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구 뿐만 아니라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로 이루어진 불교공동체를 말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재가불자들에게도 참정권을 주어야 한다. 총무원장 직선을 한다면 모든 스님들 뿐만 아니라 모든 불자들에게도 투표권을 부여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재가불자들에게 투표권을 부여 하여 투표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총무원장을 직선으로 뽑는다면 모바일로 하면 된다. 별도로 투표소에 갈 필요가 없다. 이는 지난해 민주당 대표 경선에서 검증된 것이다. 그때 당시 약 6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스마트폰이나 핸드폰으로 투표 하였다. 이미 검증된 시스템이다. 마찬가지로 총무원장 선거를 모바일로 선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재가불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참여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조계종 ‘신도등록’한 불자들로 한정하면 된다. 신도회비를 납부하는 불자들을 말한다. 그런 불자들에게 총무원장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참정권을 부여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선거에 참여 하기 위해서라도 신도 등록을 많이 하게 될지 모른다.
이와 같이 불자들에게 참정권을 주어 총무원장선거 뿐만 아니라 중앙종회, 교구본사 주지 등 모든 선거에 확대 적용한다면 금권선거 등을 봉쇄할 수 있고 고질적인 문중이나 파벌 문제로 자유로울 수 있어서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석삼조, 일석사조 아니 그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불교는 스님들만의 것일까. 조계종 종헌에 따르면 엄연히 사부대중으로 구성한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한국불교는 스님들의 것이다. 특히 비구승들의 불교이다.
불교공동체가 사부대중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가 스님들만의 것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하나 있다. 그것은 모든 불교의식에서 합송되고 있는 삼귀의이다.
삼귀의 중 승가에 대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불교가 스님들만의 것이라는 명백한 증거이다. 하지만 삼귀의에 표현되어 있는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문구는 잘못 된 것이라 한다. 왜 잘못된 표현일까.
최근 마성스님의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글 ‘교단과 승단의 차이점’을 보면 삼귀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불교도들이 행하는 삼귀의례에서 승(僧)은 아리야 상가, 즉 성승가(聖僧伽)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불교도들이 신앙적으로 귀의하는 대상은 삭발염의한 비구-비구니가 아니라 불교도들의 이상인 사쌍팔배의 성자인 것이다.”
마성스님은 삼귀의에서 승은 ‘성스런 승가’를 말한다고 한다. 성스런 승가란 빠알리어 ‘아리야 상가(ariya-sangha)’라 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도(magga)와 과(phala)를 이루신 성자를 말한다. 따라서 불자들의 귀의의 대상은 성스런 상가일 뿐이지 모든 스님을 다 귀의의 대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승납이 오래 되고 도를 많이 닦고 학식이 높다고 하여도 결코 귀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성스런 상가가 귀의의 대상일까. 그것은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 하셨고 초기경전에 그렇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자들의 귀의의 대상인 승보는 초기경에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구사론이나 대지도론에 그 범위가 규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사쌍팔배의 성자를 말한다. 성자만이 귀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승보를 규정하지 않는다면 모든 비구나 비구니가 귀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구족계를 받았건 받지 않았건, 사미나 사미니건 간에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었으면 모두 승보로서 귀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모순이다. 머리를 깍고 승복을 걸쳤더라도 점이나 보고 사주관상이나 보는 자들도 승보로 보아 귀의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쌍팔배의 성자를 승보라 하여 귀의의 대상으로 한정 하였는데, 이는 초기경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승보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였다. 머리를 깍고 승복만 걸쳤다고 승보로서 귀의의 대상이 아니라 사쌍팔배의 성자들이 승보라는 것이다.
사쌍팔배의 성자들이 승보로서 귀의와 공양의 대상이라는 말은 초기경전 도처에 등장한다.
성자가 되지 못한 스님들은 범부나 다름없는 또 같은 중생일 뿐이다. 많은 공덕을 쌓아 천상에 태어나서 최고 팔만사천 대겁까지 한량없는 세월을 수명대로 사는 존재 역시 중생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에 실체가 있다는 생각(有身見)을 부수고, 연기법으로 대표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회의적 의심)을 버리고, 잘못된 수행(戒禁取)을 하지 않아, 정견을 가진 수행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지 않는 한 스님이나 천상의 존재나 모두 범부와 같은 중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들이 중생들에게’ 귀의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렇게 성자가 되지 못한 스님들은 귀의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하는데, 어떤 이는 귀의의 대상에 대하여 삼귀의가 아닌 이귀의로 하자고 말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문제의 소지가 있다. 성자가 되지 못한 스님이 성자가 된 스님에게 귀의 하는 문제를 말한다. 스님이 스님에게 귀의하는 문제가 발생된다. 마치 넌센스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떤 이는 부처님(불)과 가르침(법)에만 귀의하고 스님(승)에게는 귀의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이귀의’만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무식을 스스로 폭로하는 말과 같다고 한다. 스님도 스님에게 귀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자가 되지 못한 스님이 성자가 된 스님에게 귀의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고 법랍이 높아도 나이가 어리고 법랍이 낮아도 성자가 된 자가 있다면 귀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 논리로 따진다면 성자가 된 재가불자도 귀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수다원이 된 재가 불자가 있다면 성자가 되지 못한 스님이 의지처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삭발하였다고 하여, 승복을 걸쳤다고 하여 모두 귀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자가 되지 못하였다면 범부중생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중생이 중생에게 피난처로 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이다. 따라서 중생들의 귀의의 대상은 스님이 아니라 상가인 것이다. 성스런 상가를 말한다.
그래서 마성스님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현행 삼귀의문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歸依佛兩足尊)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歸依法離欲尊)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歸依僧衆中尊)
수정한 삼귀의문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승가에게 귀의합니다.
-진흙속의 연꽃님에서 발췌 -
출처: http://cafe.daum.net/amtb/6JLp/2475
스님들이 신도들을 가볍게 대하고 차별심을 드러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법정스님께서 신자들에게 내린 계첩의 삼귀의 내용을 올려드립니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위합니다.
위없는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청정한 승가에 귀의합니다.
나이도 수행력도 탐진치도 신자보다 못한 출가자를 무조건 스님이라고 삼배를 올리고 귀의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존경심은 강요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울어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존경심이 없는 삼귀의는 앵무새의 흉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를 듣고 흐뭇해하는 스님이 있다면 그 또한 문제의 스님인 것입니다. 2012-05-26 1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