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선사鏡虛禪師
김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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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성우(鏡虛 惺牛) 선사 [禪師] (1849∼1912) 실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는 특히 경허 스님에 관한 한 별로 없다. 위에 선사의 영정을 모시고 이를 바라 보고 있지만 이 영정은 실제로 만공 스님의 입으로 그린 초상회이다. 화백에게 이르기를 내가 말하는 대로 그려보라 하여 얻어낸 유일한 자산이 되고 말았다. 본시 수덕사 정혜사 바로 아래 金仙臺에 모시었으니 우측에 慧月 慧明 대사를 모시고 좌편에 만공 스님은 자신의 영정을 잊지 않고 모시었다. 만공 스님은 悳山에 의하면 用心第一이라 칭할 수 있다. 전라도 도인의 특징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임기응변에 능하시고 쾌활한 道風을 따를 자가 없었다 한다. 걸림 없는 행리를 보고 많은 제자들이 쑥떡 거리고 있었을 때, 덕산은 내가 가서 사실을 확인하리라 하며 노장님의 방을 예고도 없이 들이 닥치었다. 만공 스님은 그 때 비구니의 시봉을 받으시며 누워 있든 때 였다. 비록 제자이기는 하더라도 보통 같으면 일어나 옷이라도 주섬주섬 걸칠 법하지만 만공 스님에겐 그런 허드레 꾸밈이 없다. 한 식경이 지나도록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니면 평상시처럼 계시다가 제자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도 아는 체를 아니하시었다. 밖으로 나온 덕산은 대중들에게 한마디 일렀다. "앞으로는 누구든 노장님의 행리가 어떠니 저떠니 말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직접 손보아 줄 것이며 다시는 말 못하도록 입을 꼬매 놓을 것이다." 덕산의 이 말은 다못 혜월 스님과 대비되는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惠菴에 의하면 혜월 스님은 無心第一이라 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처승 주지가 수덕사를 관장하든 때인데 벌건 대낮에 이 주지가 제 방에서 아내와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조실이신 혜월 선사께서 물어 볼 말이 있어 무심코 주지실 방문을 열어제쳤는데 정작 남녀가 이꼴을 하고 있으면 사람은 누구나 생각 없이 문을 닫고 돌아서서 욕이라도 퍼 붇는 것이 상정이련만 노장님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이 더운 날 어째서 포개고 있는가?"고 거의 다연한 일 보듯 담담히 물으시니 주지도 말을 못하였다. 즉 경허 스님은 用心제일의 도인과 無心제일의 도인 사이에서 태어나신 부처님 같은 분이라는 말이다. 스스로 活眼酒與色[술과 계집과 더불어 살아 있는 눈]이라 하시니 미천하고 멍청한 위인들이 함부로 제 마음도 가누지 못하면서 도인 흉내나 내는 물건들하고 어찌 비교를 꿈꿀 수 있으랴! 흔히 "일본의 新-불교 운동으로 인하여 同化되고 死藏될 뻔한 한국선종(禪宗)을 중흥시키시었다" 고 평하여 이르는 사람들이 많으나 뒤에 가서 그렇게 한 말이 우리 선사에게 도움될 것도 없고 바른 안목을 구현하는 데에 일획이나마 긋는 일도 아니다. 이 모두 정치하는 중들의 소견이요 눈일 뿐이니, 나라가 망하는 꼴을 부처님도 당하시고 겪어온 일이지만 어디 하찮은 중생의 일거리가 이뿐이든가? 중에게 무슨 마음이 있어 속으로 앓는 아픔을 반드시 밖으로 표정지어 속내 들어내야한다는 법이 있었든가? 아서라! 패거리 중들이여! 속뵈는 한마디 헛소리에 佛祖가 운다. 대사(大師)의 姓은 宋씨다. 初名은 동욱(東旭)이었다. 법호는 경허(鏡虛)이시며 전주 우동리에서 나시었다. 부친의 이름은 두옥(斗玉)이니 선사께서 태어나시든 해에 돌아가시었으며, 9세 때 숙세의 인연이 있어 과천의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하였다. 계허(桂虛)화상의 밑에서 물긷고 나무하는 일로 5년을 보내었는데 연령이 차매 그뒤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강백(萬化講伯) 밑에서 불교경론을 배웠으며, 9년 동안 그는 불교의 일대시교(一代時敎)뿐 아니라 <논어>·<맹자>·<시경>·<서경> 등의 유서(儒書)와 노장(老莊) 등의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다. 1879년에 俗退한 옛 스승 桂虛화상을 찾아 뵈려 한양 길을 나서던 중, 수원지방 쯤 내려온 때에 갑짜기 퍼붓는 비바람을 만나 가까운 인가로 피해 들어가려고 하였지만, 마을에서는 돌림병[코레라]이 유행하여 집집마다 문을 굳게 닫고 열어주지 아니하였다. 비를 피하지 못하고 큰 대문 집 처마 밑에 남아 밤새도록 죽음과 삶의 문턱에 앉아 있는 시련의 고통에 시달리다가 이제까지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문자 속에서만 터득하였음을 깨닫고는 스스로 망연자실하였다. 삶과 죽음을 이리저리 둘러보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두려움이려니와 아직도 한 생각 떨치지 못하는 자신에 더욱 화도 나고 부끄러움을 크게 느끼니 말로만 듣고 아는 一切唯心造가 아닌가? "모두 마음이 만든 조작이라면 지금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가?" "마음뿐이라면" 왜 마음도 모르는 일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화엄경의 10억 글자가 다 휴지조각이라는 말인가? 어찌해야하나? 어느 경에 대답이 있는 것일까? 經 밖에 달리 대답이 있다면 부처님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說하시었다는 말인가? 그래서 敎外別傳 卽心是佛이라하였는가? 참으로 무엇이 교외별전이라는 것인가? 무엇이 즉심시불인가? 경에 설하시지 않은 법문이 무엇이며 무엇을 마음이요 부처라 말하는 것이며 마음이 곧 부처라니 무엇을 지시하시는 말씀인가? 惺牛[경허스님의 법명]는 새로이 발심(發心)하기 시작하였다. 코레라 돌림병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그 날로 동학사로 되돌아 섰다. 다른 법문들은 그런대로 마음과 지혜로 헤아려 대충 감을 잡을 것 같았지만 驢事未去에 馬事到來 話에는 그만 막히고 말았다. 부처가 무엇이냐고 묻는 말씀에 어찌하여 祖師는 엉뚱하게도 "나귀의 일도 가기 前에 말의 일이 당도하였다"고 대답하신 것일까? 안달하는 학인들을 모두 불러 이르되 "내가 가르칠 것이 하나도 없으니 그만 모두 제 본분으로 되돌아 가거라. 지금까지 내가 말하고 강한 것은 하나도 진실한 것이 없노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요 은혜를 입은 이가 예의 갖추어 이른 소리이니 그 참 뜻을 모를진대 아무 도움도 아니 되느니라. 내 또한 많은 말을 꾸며 일렀다만 이제 돌이켜보니 하나도 쓸모 없이 되었도다.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가 인연에 맞추어 깨달음을 얻느니만 못하니라." 대중들을 흩어 돌려보낸 뒤 문을 걸어잠그고 출입을 삼가며 일체 어느 사람도 만나는 일이 없었다. 房에 들어 앉아 저 不世出의 조사와 씨름을 시작한 것이다. 용맹 정진이라 흔히 말하지만 창문 밑으로 주먹밥이 들어올 만큼의 구멍을 뚫어놓고,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대마무 깎아 송곳을 꽂은 널판자를 놓아 졸음이 오면 송곳에 다치게 장치하곤 잠조차 잊은채 려사미거에 마사도래라 이르신 화두 하나만 궁구[窮究]하였다. 석달째 되던 날, 제자 원규(元奎)가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이처사(李處士)가 마침 중이된 자식을 보러 찾아왔는데 아비가 먼저 묻기를, "요즘은 어찌 지내시는가?" 하거늘 어린 사미 아들이 이르되, "별 탈은 없으나 하는 일이 없읍니다." 어찌하여 하는 일이 없다 하는가?" 강사스님은 강을 파하시었고 대중은 각자 흩어졌으며 마음이 술렁대니 도무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사미스님! 중이 되어가지고 하는 일도 없이 세월만 보내면 죽어서 소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하거늘 사미가 이에 아무 대답도 못하자 아비인 처사가 이르되, "스님! 비록 아무 일도 않기로서니 어찌 이 아비가 묻는 말에 이다지도 체면 없이 대하신단 말이요? "하다 못해 비록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겠지요 라는 말이나마 일러야하지 않겠소?."하지 않는가? 방에서 무심 중에 이 말을 듣고는 저 려사미거에 마사도래하는 화두와 더불어 모든 의심들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오도(悟道)하였다. 그뒤 천장암(天藏庵)으로 옮겨 깨달은 뒤에 수행인 보임(保任)을 하였다. 그때에도 얼굴에 탈을 만들어 쓰고, 송곳을 턱 밑에 받쳐놓고 오후수행(悟後修行)의 좌선을 계속하였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공부(保任工夫)를 끝내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그 당시 일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파계승이요 괴이하게 여겨질 정도의 일화를 많이 남겼다.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몇 달을 동침하였고, 여인을 희롱한 뒤 몰매를 맞기도 하였으며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는 등 낡은 윤리의 틀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행적들을 남겼다. 그는 생애를 통하여 선(禪)의 생활화·일상화를 모색하였다. 산중에서 은거하는 독각선(獨覺禪)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선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선의 혁명가로 평가받고 있다. 법상(法床)에서 행한 설법뿐만 아니라 대화나 문답을 통해서도 언제나 선을 선양하였고, 문자의 표현이나 특이한 행동까지도 선으로 겨냥된 방편이요, 작용이었다. 그의 이와같은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선풍은 새로이 일어났고, 문하에도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어 새로운 선원들이 많이 생겨났다. 오늘날 불교계의 선승(禪僧)들 중 대부분은 그의 문풍(門風)을 계승하는 문손(門孫)이거나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는 근대불교사에서 큰 공헌을 남긴 중흥조이다. 승려들이 선을 사기(私記)의 형식으로 기술하거나 구두로만 일러오던 시대에 선을 생활화하고 실천화한 선의 혁명가였으며, 불조(佛祖)의 경지를 현실에서 보여준 선의 대성자이기도 하였다. 근대 선의 물결이 그를 통하여 다시 일어나고 진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의 마조(馬祖)로 평가된다. 만년에 천장암에서 최후의 법문을 한 뒤 사찰을 떠나 갑산(甲山)·강계(江界) 등지에서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쓴 모습으로 살았으며, 박난주(朴蘭州) 라고 개명하였다. 그곳에서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이다. 저서에는 <경허집>이 있다. ----------------- 시기별 요약 ------------------------ 출가 경허스님은 1849년 8월 24일 전라북도 전주 우동리(于洞里)에서 송 두옥(宋斗玉)씨와 밀양 박씨 부인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처음 이름은 동욱(東旭)이요,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며, 먼저 출가하여 공주 마곡사에서 득도한 백씨(伯氏)는 태허성원(泰虛性圓)스님이시다. 태어난 뒤 사흘 동안 울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여기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9세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올라와서 경기도 청계산 청계사에 가서 계허(桂虛)대사에 의하여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다. 14세 때 마침 한 선비가 절에 와서 여름을 지낼 적에 여가로 글을 배우는데, 눈에 거치면 외우고, 듣는대로 뜻을 해석할 만큼 문리(文理)에 크기 진취가 있었다. 그해 가을에 계허스님의 천거로 계룡산 동학사 만화화상(萬化和尙)을 찾아가 일대시교(一大時敎)를 수료하고, 23세 적에 대중의 물망으로 동학사에서 개강(開講)함에 사방에서 학인들이 물처럼 몰려왔다. 수행 대중들의 요청으로 동학사 강원의 강단에서 강의를 하다가 여름 어느 날, 은사(恩師)스님을 뵈러 가시던 길에 폭우를 만나 비를 피하시던 중 호열자로 인하여 사람들이 다 죽어가고 있는 현장을 만나게 되셨다. 여기에서 무상(無常)이 빠르고 생사(生死)가 신속함을 느꼈는데, 밤이 되어 하루 묵을 곳을 찾다가 어느 처사집에 찾아가게 되었다. 그 집에서 하루 머무는데 집주인 처사가 경허스님에게 묻기를, "스님네들은 일생동안 시주만 받아먹고 살다가 죽게되면 소가 된다는데..."하는 말에 대꾸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이에 경허스님은 강원의 강백으로서 모든 학인을 지도하고 부처님의 교리를 원만히 다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사의 언덕에 큰 힘이 되지 못하고 실로 불교의 깨달음이란 실참실오(實參實悟)해야만 비로소 부처님 지혜에 이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느끼고 그 길로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흩어보내고 폐문(閉門)한 뒤 좌선(坐禪)을 시작하셨다. 영운(靈雲)선사의 '나귀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도래한다[驢事未去馬事到來].'는 법문을 화두로 삼고 두문불출하시면서 졸음이 오면 날카로운 송곳으로 살가죽을 찌르고 칼을 갈아 턱 밑에 대놓고서 수마(睡魔)를 물리치며 용맹정진하셨다. 그렇게 정진하시기를 석달 째, 화두 한 생각이 순일하여 은산철벽(銀山鐵壁)과 같았다 깨달음 육근육식(六根六識)의 경계가 다 물러가고 화두 한 생각만 또렷해져 있던 어느 날, 우연히 바깥에서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이 들려오는 순간, 여지없이 화두가 타파되었다. 이 때가 31세셨다. 오도(悟道)를 한 후, 송(頌)하시기를, 忽 聞 人 語 無 鼻 孔 頓 覺 三 千 是 我 家 六 月 燕 岩 山 下 路 野 人 無 事 太 平 歌. 홀연히 사람에게서 코 구멍 없다는 말을 들으니 삼천대천세계가 다 나의 집인 줄 문득 알겠노라. 음력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야인[野人]이 일 없이 태평가를 노래하네. 그리고 선사께서는 이으신 법(法)의 전등연원(傳燈淵源)을 청허휴정(淸虛休靜)선사의 12세 손(孫)이며, 환성지안(喚惺志安)선사의 8세손이라고 밝히셨다. 이때부터 제방(諸方)에 선풍을 진작시키니 각처에 선원(禪院)이 개설되고 걸출한 선객(禪客)과 수행납자(修行衲子)들이 처처에서 많이 모여들어 적막하기만 하던 조선의 선불교는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다 전법 법자에 혜월혜명[慧月慧明]과 만공월면[滿空月面] 두 큰 어른이 계시고 그 밖에 당대에 이름을 떨친 강백 寒岩[한암]을 위시하여 참회 상좌가 되시었고 이름 없이 世緣을 自適하다가 이름처럼 흘러 寂滅을 개시하신 水月 도인등이 계신다. 만공스님 편은 별도 처리하여 적으려니와 여기 혜월스님의 법연을 듣는다. 어느날 경허선사가 방에서 정진을 하고 계시는데 혜월스님이 문을 열고 당당하게들어왔다.선사께서 이미 간파하시고 물음을 던지셨다. "목전(目前)에 고명(孤明)한 한 물건이 무엇인고?" 이에 혜월스님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 섰다가, 다시 서쪽에서 걸어와 동쪽으로 가서 섰다. "어떠한 것이 혜명(慧明)인가?" "저만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천성인(一天聖人)도 알지 못합니다." 경허선사께서는 여기에서, "옳고 옳다."하시며 혜월스님을 인가(認可)하셨다. 그 후 1902년경허선사께서는 혜월스님에게 전법게(傳法偈)를 내리셨다. 付 慧 月 慧 明 了 知 一 切 法 自 性 無 所 有 如 是 解 法 性 卽 見 盧 舍 那 依 世 諦 倒 提 唱 無 文 印 靑 山 脚 一 關 以 相 塗 糊 水 虎 中 春 下 澣 日 萬化門人 鏡虛 說 해월혜명에게 부치노라 일체법 깨달아 알면 자성에는 있는 바가 없는 것 이같이 법성을 깨쳐 알면 곧 노사나 부처님을 보리라 세상법에 의지해서 그릇 제창하여 문자없는 도리에 청산을 새기니 고정된 진리의 상에 풀을 발라 버림이로다 임인년 늦봄에 만화 문인 경허 설하다 열반 스님께서는 말년(1905년 57세)에 세상을 피하고 이름을 숨기고자 갑산(甲山)ㆍ강계(江界) 등지에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호를 난주(蘭州)라 하고,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쓰고, 바라문의 몸을 나타내어 만행(萬行)의 길을 닦아 진흙에 뛰어들고 물에 뛰어들면서 인연따라 교화하였다. 1912년 4월 25일, 갑산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입적하시니, 세수(世壽)는 64세, 법랍(法臘)은 56세였다. 시적(示寂) 그 직전에 마지막으로 일원상(一圓相)을 그리며 ○바로 위에 써놓은 열반게송(涅槃偈頌)이 있다. 心月孤圓 光呑萬像 光境俱忘 復是何物 마음-달이 홀로 원만하니 빛이 만가지 상을 삼키었도다. 빛과 경계 다 공하니 다시 이 무슨 물건이더냐? 여름에 천화(遷化) 소식을 듣고 제자 만공(滿空)스님과 혜월(慧月)스님이 열반지 갑산에 가서 법구(法軀)를 모셔다 난덕산(難德山)에서 다비(茶毘)하여 모시니라. |
<출처;empas.com/peaceof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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