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언제 시작되었나? 1948년 8월15일. 작년에 ‘정부수립 60년’이었지 않았나? 그럼 대한민국이 1948년 8월15일에 처음으로 생겼나? 그 전에 있던 나라인데 이름이 바뀐것이다. 이 때 나라가, 다시 말하면 아무도 안 사는데 또는 사람은 살지만 나라가 없었던 데에서 갑자기 나라가 생긴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작년에 ‘건국 60년’과 ‘정부수립 60년’을 가지고 논쟁이 있었다. ‘건국 60년’이라고 하니까 ‘그럼 나라가 처음생겼다는 얘기냐. 우리가 아프리카의 신생국이냐’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래서 ‘정부수립 60년’이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우리가 建國(건국)이라고 쳐야 하는가? 대한민국은 어디의 法統(법통)을 계승하는가? 대한민국은 상해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 상해 임시정부부터 친다면, 1919년이 되니까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90년이 되지 않나? 그러니까 ‘건국 90년’이라고 말하지만, 상해 임시정부라는 것은 어떤 민족이 있었고, 정부가 있었고, 그것에 대한 어떤 이유로 임시로 세웠다는 뜻 아닌가. 그런데 현재 우리 國名(국명)을 보면 대한민국이다. 그럼 대한민국이란 國號(국호)가 어디서 왔겠는가? ‘大韓帝國(대한제국)’에서 왔다.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왜 생겼냐’하는 것을 물어보면 모르는 사람이 많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에서 왔다. 대한제국의 ‘제국’이란 건 무엇인가? 王(왕)이 주인인 국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제국이 망하고, 대한제국을 다시 복원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옹립해야 하나? 왕을 옹립해야 한다. 그래서 상해 임시정부를 세울 때에도 ‘왕을 옹립해서 대한제국을 다시 일으킬 거냐, 아니면 왕이 주인인 국가가 아니라 民(민)이 주인인 국가를 세울 것이냐’는 많은 토론 속에서 ‘民이 주인인 국가를 세우자’ 다시 말하면 ‘王政(왕정)이 아니라 공화정을 세우자’고 해서 대한제국을 대한민국으로 고쳤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어디서 출발했느냐면,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이 나왔다. 그럼 대한제국은 누가 이름을 붙였나? 고종황제 때 붙였다. 왜 대한제국이라고 붙였나? 그 전에는 무엇인가? 조선왕조였다. 조선왕조였는데 왜 갑자기 대한제국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는가? 이는 이름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 이름을 바꾼 이유는 이렇다. 서대문에 가면 독립문이 있다. 그리고 독립협회라는 말도 들어봤을 것이다. 독립신문 얘기도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면 독립문, 독립신문, 독립협회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자고 세운 문이고 신문이고, 단체인가?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아니다. 어디로부터 독립하자고?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자는 것이다. 청나라로부터. 그럼 우리가 언제 청나라에 예속 됐었는가? 일제 식민지 지배는 일본이 우리를 직할로 직접 지배했다. 근데 우리가 청나라와 싸우다 졌다. 그걸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한다. 청나라가 침입해 들어와서 전쟁에서 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임금이 삼전도에 가서 무릎을 꿇고 항복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청나라의 屬國(속국)이 됐다. 보호국이 됐다. 그러니까 內治(내치)는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외교권은 뺏겼다는 것이다. 속국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완전한 독립국가는 아니다. 일부 自治(자치)국가라고 할 수 있지만 완전한 독립국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청나라로부터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해서 소위 개화파들이 독립협회를 만들고 독립신문을 만들고 독립문을 만든 것이다.
이 대한제국은 그러한 연관 위에서 우리가 청나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나라라고 해 연호를 쓴 것이다. 중국은 황제국가로써 연호를 쓰고 있는데, 중국에 朝貢(조공)을 바치면 독립된 속국은 독립된 연호를 안 쓴다. 그것에 아래에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근데 우리가 대한제국이라고 붙이고 독립된 연호를 썼다. 그래서 대한제국이 됐다. 그래서 대한제국의 母體(모체)는 조선왕조이다.
그러면 조선왕국은 어디가 모체인가? 고려 왕국이 모체다. 조선왕국이란 것은 빈 땅에 세운 것이 아니고, 원시적인 사회에 세운 것도 아니다. 나라가 원래 있었는데 고려왕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주인만 바뀌었다. 왕만 바뀐 것이다. 그래서 왕의 성이 바뀌었다고 해서 ‘易姓革命(역성혁명)’이라고 한다. 성만 바뀐 같은 나라다. 그러니까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꾼 것은 이름만 바뀐 것이고,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바뀐 것은 왕의 성만 바뀐 것이다. 같은 나라이다.
그러면 고려왕국은 무엇을 계승한 국가인가? 고려를 세운 사람들이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선언하고 나라를 세웠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고려라고 한다. 그러니까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 그런데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비석’에서도 쓰여져 있지만,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은 자긴 누구의 아들이라고 했나? 자긴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했다. 해모수란게 누구인가? 부여를 세운 사람이 해모수다. ‘내가 해모수의 아들이다, 천제의 아들이다’라는 말은 ‘나는 부여를 계승하는 사람이다. 나는 부여를 계승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해모수의 바로 아들이다’라고 하기에는 연대가 너무 멀다. 한 200년 차이, 백 몇 십년 차이가 난다. 그런 뜻이 아니라 ‘내가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것은 ‘내가 부여왕족이다’ 부여족을 계승했다는 얘기다.
법륜式 북한 국호 해석: “專制(전제)정치가 아니고, 民主(민주)정치다. 王이 주인이 아니고 民이 주인”
그런데 이 부여를 세운 해모수는 ‘나는 단군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다. 남이 그렇게 말한게 아니라 본인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내 아버지가 저 분’이라고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 분이 어떻게 네 아버지이냐.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얘기해야 소용이 없다. ‘그 분은 내 아버지다’ 이렇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여에서 단군조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단군조선을 무슨 조선이라고 하나? 古朝鮮(고조선)이라고 하지 않나? 나라 이름이 고조선이다. 원래 나라 이름이 고조선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나라 이름이 뭐였는가? 조선인데 조선이란 이름이 두 개가 있으니까 ‘옛날조선(古朝鮮)’이다. 이건 ‘근세의 조선(朝鮮王朝)’이라고 해서 ‘近世朝鮮(근세조선)’ 또는 ‘李氏朝鮮(이씨조선)’이라고 부르고, 저건 ‘옛날조선’이라고 해서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그 나라 임금은 전부 다 단군이기 때문에 ‘檀君朝鮮(단군조선)’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단군 자신은 누구의 아들이라고 했는가? 환웅의 아들이라고 그랬다. 그러니까 환웅의 후예들이다. 단군 조선의 나라는 환웅의 후예들인데 환웅이 세운 나라가 무슨 나라인가? ‘倍達(배달)나라’다. 그래서 우리를 ‘倍達겨레’라고 한다. 우리나라 이름 중 가장 먼저 시작한게 배달이다. 배달에서 무엇으로 바뀌었나? 조선으로 바뀌었다가, 부여로 바뀌었다가, 고구려로 바뀌었다가, 고려로 바뀌었다가 조선으로 다시 바뀌었다가 대한제국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환웅의 배달나라를 계승한 것이다. 그럼 환웅은 누구의 아들이라고 했나? 환인의 아들이라고 했다. ‘나는 환인의 아들이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환인이 더 근원적이다. 그럼 환인이 세운 나라, 환인이 다스리는 나라를 ‘韓(한)나라’라고 한다. 오늘 날 우리가 쓰는 ‘大韓民國(대한민국)’이라고 할 때, 혹은 ‘三韓(삼한)’이라고 할 때의 ‘韓’도 이 ‘韓나라’에서 연유한다. 어떻게 보면 ‘倍達나라’보다 더 근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환인의 韓나라는, 환인은 누굴 계승했다고 했나? 없다. 민족사가 이보다 더 길수도 있지만, 여기서 끝이다. 이것은 口傳(구전)이 돼 내려오거나 문서로 돼 내려오는거나 어떤 쪽에도 더 이상 얘기가 없다. 그래서 우리 민족사는 여기가 시작이라고 말 할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한 번 민족사를 되풀이해 본다면,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나라, 단군의 조선나라, 해모수의 부여, 고주몽의 고구려, 이렇게 해서 왕건의 고려, 이성계의 조선 뒤에 내려오면 창건주가 중요한 건 아니다. 그렇게 해서 대한제국, 대한민국에 이르렀다.
북쪽에 있는 저 북한은 현재 우리하고 먼 것 같지만 북한 국호가 무엇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그럼 이 조선은 어디서 왔는가? 조선왕국에서 왔다. 왕국이, 왕이 주인인 국가에서 저 사람들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기 때문에 첫째는 專制(전제)정치가 아니고, 民主(민주)정치다. 그 다음에 왕이 주인이 아니고 民이 주인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붙였다. 이것은 국가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을 얘기하거나 국가의 성격을 말하지, 국호는 역시 조선이다. 대한민국, 대한제국 결국 조선왕국으로 가고, 여기(注: 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그 다음에 조선왕국으로 가니까 결국 얼마 안 올라가면 같은 나라에서 갈라졌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근데 중국 청나라든지 몽고의 원나라든지 하는 것은 우리와 한참 올라가도 만나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다른 민족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다. 같은 민족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북한은 우리 민족이다. 그러고 갈라진 지 얼마 안 되었다. 다시 말하면 64~65년 밖에 안 된다.
그럼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긴다. 이렇게 주욱 내려오는 속에 나라 이름 중 빠진게 많다. 신라도 빠졌다. 백제도 빠졌다. 가야도 빠지고 옥저도, 맥도 빠졌고, 빠진게 많다. 그럼 도대체 이건 어떻게 된 것인가? 이건 민족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을 해야 되느냐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까 환인의 韓나라, 환웅의 倍達나라, 단군의 朝鮮나라, 이 단군의 조선나라 말기에 가면 이제는 여러 제후국들이 그 아래에 있는 부족들이 다 독립을 해 왕의 칭호를 쓰기 시작한다. 중국에서는 이런 시대를 ‘春秋戰國時代(춘추전국시대)’라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는 이 시대를 ‘列國時代(열국시대)’라고 한다. 열국시대의 盟主(맹주), 다시 말하면 중심은 무엇인가? 부여다. 중심은 부여고, 부여시대는 딱 하나로 전체가 묶여져 있는게 아니고, 부여가 단군을 계승한 중심이지만 그러나 주위의 작은 나라들이 거의 독립하다시피 했다. 거기에서 나온 이름이 뭔가? 우선 옥저, 예, 동예, 옥저도 南옥저, 北옥저, 東옥저 옥저도 이렇게 여러 개가 있다. 또 정확하진 않지만, 맥이란 나라도 있었다고 한다. 南으로 내려오면 韓이란 나라가 있었다. 고조선이 망하자 그 사람들이 이동해와서 반도 남쪽, 즉 한강 유역에 이남으로 나라를 세웠다. 그게 韓이다. 한도 세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게 三韓이다. 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누어진다.
新羅, 독립된 年號(연호) 쓰다가 중국에 朝貢하고 연호를 폐지?
열국시대의 중심은 부여다. 그런데 부여 말기에 가면 부여를 누가 계승하느냐에 대한 경쟁이 치열해진다. 부여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인 原(원)부여족이 있고 그 다음에 거기서 갈려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니다. 우리가 더 정통이다’라고 하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는데 이게 고구려다. 거기서 또 ‘아니다. 우리가 더 정통이다’라고 하는게 백제다. 그러니까 원래 갈리기 전까지의 부여를 그냥 부여라고 하거나 北부여라고 부르고, 이제 갈라지기 시작한 시대의 부여의 한 부분을 東부여라고 한다. 우리가 부르기를 그렇게 부르는것이다. 東부여 사람들이 ‘우리는 나라 이름을 東부여라고 한다’고 했을까? 아니다. 우리가 그때부터 이 부여를 東부여라고 부르는 것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劉邦(유방)이 漢(한)나라를 세웠다. 한 200년 지속돼다가 王莽(왕망)이 新나라를 세웠다. 그러다 다시 그것이 망하고, 劉씨인 光武帝 劉秀(광무제 유수)가 다시 漢나라로 복귀하게 된다. 다시 나라를 되찾았다. 그랬을 때 우리가 王莽의 新나라를 중심에 두고 前後(전후)로 나눠서 前을 前漢(전한), 後를 後漢(후한)이라고 부르는데 나라 이름이 前漢, 後漢이 있는게 아니다. 부르기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안 그러면 전에 것을 西漢(서한), 뒤에 것을 東漢(동한)이라고 부른다. 나라 이름에 東漢, 西漢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처럼 東부여가 있고, 고구려가 있고, 백제가 있었다.
그 다음에는 이제 남쪽에는 마한은 백제로 정리가 됐고, 그 다음에 이 진한과 변한에서 신라가 일어나고 가야가 일어났다. 이 시대, 열국시대에 많은 나라가 있다가 결국 몇 개로 정리가 됐는가? 다섯 개로 정리가 됐다. 다시 말하면 ‘五國時代(오국시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五國時代에는 역사의 主流(주류), 단군의 그 정신을, 주체를 부여가 계승했고, 부여의 주체를 누가 계승했다고 볼 수 있나? 고구려가 계승했다. 그래서 이 시대 민족사의 정통은 고구려고, 고구려 시대에 東부여도 있었고, 백제도 있었고, 신라도 있었고, 가야도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정통성을 東부여가 인정을 안했고, 고구려의 정통성을 백제가 인정을 안했기 때문에 정통성을 둘러싸고 서로 싸웠다. 이 정통성 경쟁에 아예 끼지도 못했던 가야나 신라는 고구려와 마찰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가 위기에 처하니까 고구려가 신라를 도와주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이웃 나라고 자기들의 정통성하고 직접적인 경쟁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가 말하는 고구려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 시대에 五國時代가 있고, 후기에 가면 東부여는 고구려에 합병되고, 가야는 신라에 합병되니까 결국 ‘三國時代(삼국시대)’가 된다.
三國時代가 흘러가다가 결국 신라가 강성해지고, 중국은 천하가 통일되고 수나라ㆍ당나라에 오면서 결국은 羅唐(나당)연합군에 의해서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게 된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신라는 백제의 옛 땅과, 고구려 영토인 대동강 以南(이남) 일부만 차지하게 됐다. 이걸 가지고 우리는 ‘삼국을 통일했다’ 또는 ‘統一新羅(통일신라)’라고 부르지만, 만약 이 시대의 신라를 ‘통일신라’라고 이렇게 부르는 즉시 우리는 발해를 우리 역사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발해가 없다고 생각해야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지, 발해를 우리 민족사 일부로 넣는다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말을 해선 안 된다. 그러니까 고구려 시대의 역사의 정통성은 발해로 갔다고 본다. 왜냐하면 신라는 처음에는 독립적인 年號(연호)를 썼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에 朝貢을 하고 독립적인 연호를 폐지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사의 정통의 자격이 없다.
그런 것에 비해 발해는 끝까지 年號를 쓰고, 독립적인 위치를 가졌다. 그래서 고구려를 발해가 계승했다. 그러니까 발해 사람들은 ‘우리는 고구려의 후예’라고 얘기했나, ‘말갈의 후예’라고 했나? 고구려의 후예라고 했다. 그런데 인구 구성면으로 보면 고구려인이 많나, 말갈족이 많나? 말갈족이 많다. 인구 구성이 말갈족이 많다고 발해가 말갈국가라고 하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하면, 로마가 로마인들의 국가인가, 노예국가인가? 로마인들의 국가다. 그런데 인구 구성으로 보면 로마인들은 전체 인구의 1/10도 안 된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러니까 그것은 옛날에는 왕 하나가 고구려 사람이라도 그 나라는 전부다 무엇이다? 고구려가 되는 이런 나라에, 그걸 인구구성을 가지고 말할 수 없다. 명백하게 발해는 고구려들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다. 고구려를 부흥한 나라다.
“新羅는 민족사의 정통의 자격이 없다”
그러나 고구려를 부흥한 발해의 영토가 옛날 고구려의 영토보다 두 배나 더 커졌다. 그러니까 북쪽으로, 말갈족이 사는 북쪽으로 영토를 두 배로 넓혀 버리니까 고구려 사람 수는 똑같은데 영토는 두 배로 넓어지고, 인구는 두 배로 늘면, 결국 말갈족 비중에 어떻게 되나?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서 말갈족의 비중이 인구 구성면에서 다수라고 해도 그것은 명백하게 고구려의 후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하고 고구려가 멸망을 하고, 대동강 以南에는 신라가 대동강 以北으로 해서 옛날 고구려 땅과 그 이상은 발해가 들어섰기 때문에 우리 민족사로 볼 때 이것을 ‘南北國 (남북국)시대’, ‘二國(이국)시대’, ‘兩國(양국)시대’라고 말해야 한다. ‘삼국시대’에서 ‘二國시대’로 갔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신라와 발해가 멸망하고 우리 민족사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는데 그게 고려다. 그럼 고려가 영토나 인구 면에서 대부분 신라를 계승했다. 그래서 고려가 ‘우리는 신라를 계승한 국가다’라고 말해버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라. 만약 역사관이 없는 사람들이 나라를 만들었을 때에는 틀림없이 ‘우리는 신라를 계승했다’고 말할 것 아닌가? 그러면 신라는 누구를 계승했나? 口傳되어 오거나 기록이나 유물ㆍ유적적으로 신라가 무얼 계승했다고 하는 건 전혀 없다. 그럼 우리 민족사는 어디서 끝이나는가? 신라에서 끝이 난다. 그러면 우리 민족사는 내가 아까 얘기했듯이 최씨 씨족사 하고 어떤가? 역사가 같다. 그런데 최씨 씨족사가 신라사보다 조금 더 빠르다. 왜? 이 6부 촌장들이 모여서 박혁거세를 옹립하지 않았나? 그러면 蘇伐都利[소벌도리, 혹은 蘇伐都利. 注: 신라의 개국공신이자 사로국 사로 6촌의 촌장이었다. 신라 초기의 씨족장으로, 서라벌 6촌 중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의 촌장이었다고 전해진다]가 나이가 많겠나? 박혁거세가 나이가 많겠나? 그러니까 이것은 민족사가 씨족사보다 연대가 더 짧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니 고려를 세운 사람들의 역사관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근데 만약에 고려가 ‘우리는 발해를 계승했다’고 이렇게 얘기해버리면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으니까 그대로 역사가 연결이 될 것이다. 만약 ‘고려가 발해를 계승했다’고 해버렸으면 어떤 문제가 생겼겠는가? 실제로 여기 사는 사람은 다 신라 사람인데 이게 맞나, 안 맞나? 안맞는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가 얼마나 현명했느냐면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한 것이다.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이 말은 고구려와 고려 사이에 있는 나라가 신라와 발해 아닌가. 그 말은 발해와 신라를 둘 다 계승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라만 계승했다고 해도 우리 민족사에 큰 흠이 되고, 발해만 계승했다고 해도 민족사에 절음발이가 된다. 그러니까 신라와 발해를 둘 다 말하든지 아니면,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말함으로써 이것을 다 포함해 버렸다. 그러니까 고려를 일으킨 사람들이 역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역사가 중요하다. 여러분들이 역사관을 바르게 정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근데 여러분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하면서 ‘고구려의 옛 땅을 다 회복하겠다’는 큰 願(원)을 세웠다. 마치 고구려가 건국을 할 때, 고구려는 아까 얘기했지만, 부여를 계승했고, 부여는 단군조선을 계승했다고 했다. 고조선 말기에 누가 침입해 왔는가? 중국의 漢武帝(한무제)가 침입해 우리의 영토 일부를 뺏겨 漢四郡(한사군)이 설치되지 않았나? 그러니까 古來로 살아왔던 우리 영토를 이민족에게 뺏겼다. 그런데 그 당시 우리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 古土 회복을 잘 못했다. 그 당시 맹주가 어느 나라라고 했나? 부여라고 했었다. 부여임에도 불구하고 그 古土 회복을 못하니까 역사의 정통성에서 밀려난 것이다. 그러니까 고려는 나라를 건설하자마자 古土 회복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그게 무슨 사상인가? 그게 ‘多勿(다물)사상’이다. 多勿사상이란 말 들어보았나? 그것이 우리 할아버지들이 살았던, 선조들이 살았던 조선의 옛 땅을 되찾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니까 고구려가 조그마한 나라에서 시작을 했다가 大제국을 건설했는데 그러면 남의 나라를 침공해서 大제국을 건설했는가, 빼앗긴 옛 우리 땅을 되찾은 것인가? 잃어버린 우리 땅을 되찾은 것이기 때문에 침공이 아니라는 얘기다. 싸우긴 싸워가지고 했지만, 그것은 남의 나라를 침공해서 땅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우리 땅을 되찾은 것에 속한다.
“新羅는 광활한 대륙이 우리 땅이라는 인식이 없었다”
그처럼 고려도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겠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발해가 거란족, 요나라에 망하자 바로 고려는 北進(북진)정책을 써 대동강 유역에서 압록강 유역으로 바로 진출했다. 그런데 발해를 멸망시킨 사람들이 누구인가? 거란족 아닌가. 거란족 입장에서는 자기가 거란족을 멸망시켰으니까 발해의 옛 땅은 다 누구 땅인가? 거란 땅이다. 그런데 그것의 일부를 고려가 점령해 버렸다. 그러니까 거란족 입장에서는 ‘고려가 침공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蕭遜寧(소손녕)이 30만 대군을 갖고 처들어 왔다. 그래서 徐熙(서희)가 세치 혀를 갖고 담판을 지어 강동 6州(주)를 인정받았다는 얘기 들어보았을 것이다. 뭐라고 얘기 했겠는가? 蕭遜寧이 와서 하는 말이 ‘그 강동 6州는 발해의 땅이다’, 즉 ‘우리가 발해를 계승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건 우리 땅이다. 그걸 왜 너네가 점령하냐’고 하니까 徐熙가 뭐라고 했는가?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했다. 너희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이 다 누구 땅이냐? 우리 땅이니까 그럼 滿洲(만주)에 있는 너희 땅을 다 내놔라’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됐다. 그래서 영토분쟁은 현상 유지, 현재 점령한 것으로 인정을 하고, 遼(요)와 고려가 國交(국교)를 맺기로 하고 영토분쟁을 해결했다.
그렇다면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다’고 하면 어떻게 됐겠는가? 遼나라 땅을 침공한 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내놔라’ 할 때 할 말이 없게 된다. 그러면 싸워서 이기든지 지든지 길은 그거 밖에 없었다. 우리가 싸우지 않고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걸 보면 고려가 건국할 때나 고려 초기까지도 우리 민족의 정통적인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는 것인가, 안 갖고 있었다는 것인가? 투철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
만약에 신라 사람들이라면 그런 말이 나오겠는가, 안 나오겠는가? 안 나올 것이다. 왜? 광활한 대륙이 우리 땅이라는 인식이 있었나, 없었나? 없었다. 그러니까 고구려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 땅이라고 말할 수 있지 신라 사람은 ‘그거 우리 땅 아니다’… 그러니까 고구려가 멸망하고 난 뒤에도 ‘고구려가 다 우리 땅’이라고 당나라한테 얘기 안하고 대동강 유역 밑에까지만 줘도 너무너무 감격해 했다. 땅이 몇 배로 넓어졌다? 두 배로 넓어졌다고 감격을 해 황제한테 고맙다고 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관의 不在(부재)다. 신라라는 나라는 문화적으로 아주 뛰어나고 아주 부유한 나라였지만, 역사관의 부족이 이런 문제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는 옛 땅을 회복하려고 했지만, 워낙 당시의 국제정세 상 거란족이 강세라 옛 땅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란족이 멸망하고 다시 北進정책을 취하려고 보니까 이번엔 거란족을 멸망시킨게 누구인가? 여진족이다. 여진족의 金(금)나라는 거란족보다 더 강성했다. 그러니까 또 北進정책을 실현하지 못했다. 근데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한테 항복을 했다. 원나라는 또 금나라보다 더 센 나라였다.
그 전에 遼나라나 금나라만 하더라도 고려와 형제의 의를 맺고 화친을 했는데 몽고는 워낙 강성한 국가라서 고려하고 형제의 義를 맺고 和親(화친)하는 수준이 아니라 君臣(군신)의 예를 맺자고 하니까 고려 사람들이 인정을 하겠나, 안 하겠나? 안했다. 고구려가 있을 때 다 아래에 복속돼 있었던 소위 종속민족인데 그게 커졌다고 형제하자고 해도 기분 나쁜데 君臣관계를 맺자니까 절대로 용납이 안 되었다. 그러니까 이런 정도로 고려가 강성한 원나라하고도 대결하는 것은 민족의식 덕분이다. 다시 말하면 민족의식을 넘어서서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98년이나 싸운 것 아닌가. 세계 최강국이자 최대의 제국인 원나라하고 그렇게 오래 싸운 것이다. 강화도가서 피난살이 하면서 싸우고 나중에 도저히 안돼 왕이 그냥 항복을 하고 건너가니까 삼별초軍들이 끝까지 싸우다 밀려가서 진도에서 싸우다가 안되니까 제주도까지 가서 싸웠다. 고려가 제주도까지 가서 끝까지 싸우니까 원나라가 제주도로 가서 마지막 섬멸을 하고 직할지로 통치한 것이다. 그만큼 민족의식이 강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관, 민족의식이 강한 것이 언제부터 이렇게 弱小(약소)국가 비슷하게 전환됐는가? 고려시대에는 세력은 약하지만 의식은 강력했다. 근데 조선시대 오면서 세력도 마음도 弱小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즉, 자발적 事大(사대)를 취했다 즉, 고려는 힘에 못 이겨 어쩔수 없이 事大의 예를 취했다면 조선은 자발적 事大의 예를 취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역사의 왜곡현상이 빚어졌다.
신라통일 부정은 대한민국 부정
한국에서 살면서 북한式 역사관으로 무장하여 신라의 三國통일과 대한민국 建國을 매도하는 이들이 많다. 북한정권이 신라의 三國통일을 부정하고, 민족사의 正統을 고구려-발해-북한 중심으로 놓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함이다. 민족사적 정통성의 흐름은 신라의 삼국통일과 대한민국 建國을 두 기준점으로 삼는다.
신라통일 부정론자들은, 고구려와 발해를 美化하고 백제를 동정하고 신라를 비방한다. 고구려가 내분으로 망하였고 백제는 부패로 무너졌으며 신라는 내부 단결과 탁월한 국제감각으로 삼국통일을 해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애써 무시한다.
발해는 민족사의 지류이고 북한은 민족사의 이단이란 사실도 덮는다. 신라가 唐과 동맹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친 사실만 강조하고 그 唐을 한반도에서 추방, 민족통일국가를 수립한 偉業은 과소평가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의하여 비로소 같은 말, 같은 체제, 같은 풍속, 같은 역사관을 가진 韓民族이 만들어졌다. 신라 통일을 부정하는 것은 민족의 탄생을 저주하는 짓이고, 대한민국의 建國을 부정하는 건 국민국가의 탄생을 부정하는 만행이다. 이는 오늘을 사는 한민족의 뿌리를 부정하는 일종의 민족반역 행위이자 國紀문란 행위이다.
自主통일 정신의 化身 김유신
金富軾은 '三國史記'에서 金庾信을 ‘자주정신의 化身’으로 그렸다. 당시 신라 지도부가, 세계최대강국이던 唐의 힘을 빌어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唐마저 한반도에서 축출하여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김유신은 엄청난 말들을 내뱉는다.
“대장군이 황산벌의 싸움을 보지 못하고 늦게 왔다고 죄를 주려 하는데 나는 결코 죄 없이 욕을 당할 순 없다. 먼저 唐軍(당군)과 싸워 결판을 낸 다음 백제를 부수겠다.”
(唐將 蘇定方이 김유신의 副將을 벌 주려 하자 김유신이 반발하면서 한 말)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였는데 어찌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겠습니까?”(백제 멸망 후 唐將 蘇定方이 신라를 공격하려 하자 태종무열왕에게 對唐결전을 건의하면서 한 말)
신라공격을 포기한 소정방은 귀국, 唐 고종에게 보고를 하니 고종은 “왜 내친 김에 신라마저 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金富軾은, 이 질문에 소정방이 이렇게 답하였다고 三國史記에 기록하였다.
“신라는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은 윗사람 섬기기를 父兄과 같이 하니 비록 나라는 작지만 함부로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말은 唐의 최고 장수가 신라에게 바친 찬사인 셈이다. 정신력은 물질적 발전과 비례하지 않는다. 임금, 신하, 백성들이 自主의식으로 일치단결한 나라가 신라였고 대통령, 공무원, 국민들이 서로 불신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나는 三國史記를 읽으면서 태종무열왕, 김유신, 문무왕 같은 사람들의 무서운 自主정신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기 668~670년 사이 문무왕과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지도부가 對唐결전을 선택하지 않고 唐 지배체제 아래서 순응하는 자세를 취하였더라면 韓民族은 존재할 수 없었다. 이 점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삼국사기가 전하는 가장 큰 교훈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국인들이, 對中결전을 각오하지 않고는 남북통일을 이룰 수 없고, 평화공존이란 명분하의 分斷고착을 선택하면 자주와 독립을 다 잃을지도 모른다는 경고이다.
新羅와 대한민국의 공통점
1. 통일신라는 세계의 一流국가였다. 대한민국은 非서구문명국가로서는 일본에 이어 두번째로 일류국가 클럽으로 진입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2. 신라와 대한민국은 文武를 겸한 尙武국가였다.
3. 신라와 대한민국은 개방적 해양국가였다.
4. 통일신라와 대한민국 시대에 한민족의 활동반경이 가장 넓었고 세계사의 主流에 참여했다.
5. 신라와 대한민국은 동맹국 외교에 성공했다. 신라는 당시의 세계 최강국 唐과 동맹하여 통일에 성공했고 대한민국은 세계 최강선진국 미국과 친구가 되었기 때문에 통일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6. 신라와 대한민국은 애국적 종교와 정치를 결합시켰다. 護國불교와 화랑도의 결합, 反共기독교와 국군 장교단의 협력이 그것이다.
7. 신라와 대한민국은 강대국과 동맹하면서도 자주정신을 유지했다.
8. 신라와 대한민국은 유능한 지도자를 만났다. 통일신라는 외교의 金春秋, 군사의 金庾信, 내치의 文武王을 가졌고 대한민국은 외교의 李承晩, 군사의 朴正熙, 경제의 李秉喆을 가졌다.
9. 신라와 대한민국에선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한국역사상 여왕들이 나온 나라는 신라뿐이고 여성 대통령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나라는 東아시아에선 한국뿐이다.
10. 대한민국이 신라보다 못한 점은 두 개이다. 첫째는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제(고귀한 자의 의무)이고 또 하나는 국내통합 부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아직도 자유통일과 일류국가 건설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11. 신라통일은 민족을 만들었고 대한민국 건국은 국민국가의 출발이었으며 남북자유통일은 선진 강대국으로 가는 길을 열 것이다.
新羅정신이란 무엇인가?
未堂 徐廷柱 시인은 6.25 사변 때 하도 참혹한 것을 많이 보고 당한 뒤 자살까지 생각하는 지경에 몰렸다가 신라정신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고 그 뒤 신라정신을 詩作의 한 주제로 삼았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신라정신은 중세 유럽 사람들이 로마정신을 재발견하여 中世의 장벽을 뚫고나가려고 했던 것처럼 한국인들이 큰 난관에 봉착할 때 길어 쓸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감흥과 상상력의 깊은 샘물인 것이다. 未堂은 이렇게 말했다(1995년1월호 月刊朝鮮).
"1951년부터 53년까지가 내게 있어 신라정신의 잉태기였지. 6.25 전쟁중 극심한 절망감 속에서 나는 '國難이 닥쳤을 때 우리 옛 어른들 가운데 그래도 제 정신 차려 살던 이들은 난국을 무슨 슬기와 용기와 실천력으로 헤쳐왔던가?'하는 것을 절실히 알아보고싶은 생각이 들어 마음속으로 더듬거려 보던 끝에 신라정신과 구체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야."
未堂이 말하는 신라정신의 요체는 멀리 보고 한정 없이 언제까지나 끝없이 가려는 영원성이다.
"인생 행로를 제한받고 또 스스로도 제한하며 얼마만큼만 가고말려는 한정된 단거리주의가 아니라 한정없이 언제까지나 끝없이 가고 또 가려는 저 無遠不至주의. 신라인들에게서 우린 그걸 배워야 해. 그러면 불안과 불신과 반감과 충돌 따위를 훨씬 줄일 수 있겠지."
"신라 鄕歌에는 삶에 대한, 사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자각이 들어 있어 음미할수록 깊은 맛이 나지. 자연과 인생에 대한 소박한 감정부터 깊은 체념과 달관, 그리고 安民理世의 높은 이념까지를 노래한 향가도 그 바탕은 國仙정신이야."
이 天地에 대한 주인의식
國仙 정신은 무엇인가?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 天地에 대한 주인의식이 신라인들에게 작용해 통일로 이끌어간 거지. 하늘과 땅을 맡아 생활하는 주인으로서의 강한 책임 의식. 이 점이 조선시대 유교가 우리 민족에게 弱者의 팔자와 분수에 다소곳할 걸 가르쳐서 亡國의 길로 유도한 것과 전혀 다른 점이지. 각 개인의 값이나 민족의 가치는 에누리당하자면 한정이 없고, 에누리만 해나가다가는 민족의 장래가 정말 암담할 수밖에 없는 거야. 나와 내 민족의 존엄성은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지. 하늘과 땅과 역사의 주인된 자로서 말이네. 민중을 억압하고 무시해서도 안되지만 민중에게 아첨하고 추파를 던진대도 곤란해. 진심으로 민중과 일치하고 화합하려는 정신, 그게 중요하지. 신라에는 여러 훌륭한 어른들이 많지만 본받을 만한 인물을 하나만 꼽으라면 나로선 金庾信 장군을 들겠어. 金庾信 장군을 배워라! 고난을 앞장서서 짊어진 모습을..."
그의 '金庾信 將軍 1'이란 詩는 이렇다.
徐廷柱 선생은 신라의 화랑들이 가졌던 未來佛 미륵신앙을 자신의 詩 '신라 사람들의 未來通'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신라정신을 이렇게 定義했다.
"그건 다름 아닌 國仙道 정신이지. 이는 風流道, 風月道, 神仙道라고도 하는데 신라의 문장가이며 큰 학자이신 孤雲 崔致遠 선생이 쓴 글에 보면 풍류도 즉 국선도는 불교와 도교와 유교, 이 세 가지 정신을 모두 포함한다고 나와 있어."
하늘의 뜻에 맞추어 땅을 맡아 책임지고 이익을 얻는 주인의식이 國仙, 풍류 정신이란 것이다. 신라정신을 설명하면 하늘과 밝음이란 단어가 많이 나온다. 그 정신을 담은 것이 靑磁의 깊고 밝은 푸르름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언제나 한정 없이 끝없이 가고 싶은 영원성의 푸른빛! 2012-08-12 11:56
북한이 이나라 이민족의 올바른 역사적 정통성을 이어왔다는 괴변을 늘어놓고자 잔뜩 배경지식을 늘어놓은 것인지.. 도대체 무얼 말하고 싶어서 뜬금없은 법륜식의 역사관을 피력하는지 모를 일이다. 2012-08-13 2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