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이종걸 의원은 매우 훌륭한 조상을 지녔다. 경력과 헌신 그리고 개혁정신에서 그의 선조는 가장 뛰어난 가문 중 하나일 것이다. 역사의 풍파(風波)에 많은 가문이 갈대가 될 때 그의 조상들은 애국의 대나무로 서 있었다.
이 의원의 10대조 이항복은 조선 중기의 명신이었다. 이후 증조부 이유승(구한말 이조판서)까지 9대조를 제외하곤 모두 정승·판서·참판을 지냈다. 명문(名門)도 이런 명문이 없다. 하지만 이들 가문이 감동적인 것은 출세보다 더 큰 헌신 때문이다.
이 의원의 할아버지 우당(友堂) 이회영은 6형제였다. 우당이 넷째였고, 초대 부통령 이시영이 다섯째였다. 1910년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자 6형제 50여 가족이 만주로 망명했다. 형제들은 거액의 재산을 인재양성과 독립운동에 투자했다. 이회영은 다른 독립운동가와 함께 만주에 신흥군관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를 나온 독립군이 나중에 청산리대첩을 거둔다. 재산 헌납뿐 아니라 형제들은 직접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우당을 비롯해 3형제가 일제의 고문을 받아가며 순국했다. 1945년 해방된 후 50여 가족 중 20여 명만이 살아남았다. 한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도덕적 의무)였다.
6형제의 대표자 우당은 애국자이면서 시대를 선도하는 선각자였다. 그는 국가의 독립만큼 인간의 독립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분과 성(性)의 봉건적인 차별을 경계했다. 우당은 노비에게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그는 여성의 인권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누이동생이 과부가 됐는데 당시에 양반 집안의 개가(改嫁)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당은 죽었다는 거짓 부고(訃告)를 낸 후 누이를 몰래 재혼시켰다.
조상의 은덕(恩德)이 있다면 이종걸 의원에게는 애국심과 개혁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1990년대 변호사 이종걸은 여성인권 운동에 열심이었다. 성폭력 상담소 이사를 지낼 정도였다. 사실 2000년 그가 국회의원이 된 것도 이런 경력 탓이 크다. 김대중 대통령은 여성운동가 이희호 여사의 ‘압력’을 받아 여성문제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런 DJ정권에서 이종걸의 여성인권 활동은 공천에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한다.
이종걸은 지금 4선 중진이다. 그는 ‘독립운동 할아버지들’과 자신의 여성인권 운동을 크게 내세운다. 홈페이지 인생 스토리는 증조부 이유승과 할아버지 이회영으로 시작한다. 99년 ‘여성인권에 가장 기여한 남성 10인’(여성신문사)에 뽑혔다는 것도 대표적인 자랑거리로 올라 있다.
그런 이종걸 의원이 한국 정치 사상 가장 공개적이고 노골적으로 여성을 비하한 의원이 되고 있다. 박근혜 의원을 ‘그년’이라고 한 것이다. 이런 심리에는 박정희와 새누리당에 대한 적대감만 있는 게 아니다. 여성에 대한 강렬한 비하(卑下) 의식도 숨어 있다. YS(김영삼)는 박근혜에 대해 “여성이 무슨 대통령을…”이라고 한 적이 있다. 이종걸에 비하면 이는 애교 수준이다.
이 의원은 두 가지 점에서 자신의 과거와 충돌하고 있다. 그는 조상을 정치에 활용하면서 정작 ‘여성 존중’이라는 조상의 가르침은 외면한다. 여성인권 활동으로 국회의원이 되고서도 충격적인 형태로 여성을 비하한다. 사건이 터진 후 그는 해괴한 논리와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러니 사과를 해도 진정성이 보이질 않는 것이다. 그는 과거뿐 아니라 자신의 미래와도 충돌하고 있다.
일찍이 조국의 독립만큼 여성의 독립도 중요하게 여겼던 할아버지 이회영. 이승만의 독선에 항의하며 부통령직을 버렸던 작은할아버지 이시영. 두 분 할아버지는 어떤 심정으로 손자를 바라보고 있을까. 이 의원은 경기고 시절에 할아버지 산소에 가서 독립투쟁을 기렸다고 한다. 이제야말로 산소를 다시 찾을 때다. 제1 야당 최고위원으로, 4선 의원으로, 경기고·서울대를 나온 엘리트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위대한 독립운동 가문의 후손으로서 ‘그년’이란 언행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이 의원의 10대조 이항복은 조선 중기의 명신이었다. 이후 증조부 이유승(구한말 이조판서)까지 9대조를 제외하곤 모두 정승·판서·참판을 지냈다. 명문(名門)도 이런 명문이 없다. 하지만 이들 가문이 감동적인 것은 출세보다 더 큰 헌신 때문이다.
이 의원의 할아버지 우당(友堂) 이회영은 6형제였다. 우당이 넷째였고, 초대 부통령 이시영이 다섯째였다. 1910년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자 6형제 50여 가족이 만주로 망명했다. 형제들은 거액의 재산을 인재양성과 독립운동에 투자했다. 이회영은 다른 독립운동가와 함께 만주에 신흥군관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를 나온 독립군이 나중에 청산리대첩을 거둔다. 재산 헌납뿐 아니라 형제들은 직접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우당을 비롯해 3형제가 일제의 고문을 받아가며 순국했다. 1945년 해방된 후 50여 가족 중 20여 명만이 살아남았다. 한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도덕적 의무)였다.
6형제의 대표자 우당은 애국자이면서 시대를 선도하는 선각자였다. 그는 국가의 독립만큼 인간의 독립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분과 성(性)의 봉건적인 차별을 경계했다. 우당은 노비에게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그는 여성의 인권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누이동생이 과부가 됐는데 당시에 양반 집안의 개가(改嫁)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당은 죽었다는 거짓 부고(訃告)를 낸 후 누이를 몰래 재혼시켰다.
이종걸은 지금 4선 중진이다. 그는 ‘독립운동 할아버지들’과 자신의 여성인권 운동을 크게 내세운다. 홈페이지 인생 스토리는 증조부 이유승과 할아버지 이회영으로 시작한다. 99년 ‘여성인권에 가장 기여한 남성 10인’(여성신문사)에 뽑혔다는 것도 대표적인 자랑거리로 올라 있다.
그런 이종걸 의원이 한국 정치 사상 가장 공개적이고 노골적으로 여성을 비하한 의원이 되고 있다. 박근혜 의원을 ‘그년’이라고 한 것이다. 이런 심리에는 박정희와 새누리당에 대한 적대감만 있는 게 아니다. 여성에 대한 강렬한 비하(卑下) 의식도 숨어 있다. YS(김영삼)는 박근혜에 대해 “여성이 무슨 대통령을…”이라고 한 적이 있다. 이종걸에 비하면 이는 애교 수준이다.
이 의원은 두 가지 점에서 자신의 과거와 충돌하고 있다. 그는 조상을 정치에 활용하면서 정작 ‘여성 존중’이라는 조상의 가르침은 외면한다. 여성인권 활동으로 국회의원이 되고서도 충격적인 형태로 여성을 비하한다. 사건이 터진 후 그는 해괴한 논리와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러니 사과를 해도 진정성이 보이질 않는 것이다. 그는 과거뿐 아니라 자신의 미래와도 충돌하고 있다.
일찍이 조국의 독립만큼 여성의 독립도 중요하게 여겼던 할아버지 이회영. 이승만의 독선에 항의하며 부통령직을 버렸던 작은할아버지 이시영. 두 분 할아버지는 어떤 심정으로 손자를 바라보고 있을까. 이 의원은 경기고 시절에 할아버지 산소에 가서 독립투쟁을 기렸다고 한다. 이제야말로 산소를 다시 찾을 때다. 제1 야당 최고위원으로, 4선 의원으로, 경기고·서울대를 나온 엘리트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위대한 독립운동 가문의 후손으로서 ‘그년’이란 언행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중앙일보] 입력 2012.08.13 00:08 / 수정 2012.08.13 00:08/
이영아/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1920년 8월 3일 밤 11시쯤, 평양 성내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평남도청 신축 건물에서 들려오는 폭발음이었다. 마침 야시장이 열려 시내에 수많은 인파가 나와 있던 중이라 그 소리에 의한 군중들의 충격과 혼란은 더 컸다. 이때 평양경찰서 앞에서도 한 여성이 치마 속에 숨겨 온 폭탄에 불을 붙였다. 그녀의 이름은 안경신(安敬信), 평남 대동군 출신으로 당시 서른셋이었다. 폭탄은 불발되었으나 경관대가 출동하고 시내가 소요에 휩싸이자 그녀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대동강을 건너 어느 참외 오두막으로 숨어들었다가 함남 지방의 모처로 피신했다.
사건 당시 그녀는 임신한 상태였다. 7개월 뒤 그녀는 아이를 갓 출산한 몸으로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녀는 미국 국회의원단 일행이 조선을 방문하게 된 때에 맞춰 조선의 독립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상해임시정부에서 파견된 독립투사 중 한 명이었다. 그녀와 함께 이 일을 도모한 인물에는 독립운동가 장덕진(張德震)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평양여고보를 중퇴한 안경신은 3·1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20여 일간 구류생활을 했고, 그 후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했으며 다시 상해임시정부 산하 광복군 총영의 전투대원이 되어 이 의거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오늘날 ‘미의원단 사건’으로 불리는 이 의거와 관련해 장덕진, 오동진(吳東振), 김예진(金禮鎭) 등 남성인물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임신한 여성의 몸으로 여기에 가담한 안경신의 공적은 광복 67주년이 되도록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안경신은 이 사건으로 검거된 뒤 1심에서 사형을 구형 받았다가 항소해 징역 10년을 선고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태어난 지 12일 만에 엄마와 함께 체포된 아이는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해 시력을 잃었다. 딸의 체포와 사형 구형을 지켜봐야 했던 그녀의 모친은 그녀가 구금된 지 석 달 만에 세상을 등졌다.
실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개인으로서의 비극적 운명을 묵묵히 감내해냈던 여성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불행보다 독립운동단체의 운명을 먼저 걱정했다. 1927년 12월 가석방된 안경신은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자식은 병신이오니 어느 것이 서럽지 않겠습니까마는 동지 장덕진씨의 비명(非命)을 듣고는 눈물이 앞을 가리어 세상이 모두 원수같이 생각됩니다”라고 말했다(‘평남도청 폭파범 안경신 여사 재작 출옥’, 동아일보, 1927.12.16).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2012-08-13 09:15
훌륭한 교육을받은 사람이 이렇게 망가져 조상을 욕보이고 소속당을 저질로 지탄받게 했을까?
어떻게 4선까지 했을끼?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지않고 변명에 변명을 거듭했을까?
조상의 이름을 더럽힌 죄를 어떻게 감당할지? 국민에게 유감이아닌 잘못을 솔직히 빌어야 할것이다. 2012-08-16 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