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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불교 조동종 일제강점기 참회하고 용서를 빕니다.

강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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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불교 조동종 "일제 강점기 과오 참회, 용서를 빈다"

뉴시스 | 고석중 | 입력 2012.09.16 14:30 | 수정 2012.09.16 15:11

【군산=뉴시스】고석중 기자 = 일본불교 최대종단인
조동종 스님들이 일제강점기 일본정부에 협력하며
전쟁에 가담했던 과오를 참회하는비를 제막해 관심을 끌었다.

16일 현존하는 대한민국 유일의 일본식 사찰인
전북 군산 동국사를 찾은 일본 조동종 이치노헤 쇼코 스님은 "패전후 68년이 지났지만 일본 불교계는 스스로의 전쟁참여를 참회할 용기가 없었다"면서 "이점을 사죄하고 용서를 빌기 위해 방문했다"고 전했다.

또 조동종이 지난 1992년 참회문(懺謝文, 사죄와 용서의 글)을 공식 발표한 이후 대한민국에 건립되기까지 또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면서 일본 불교의 양심으로 받아들여준 한국 불교계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동국사는 일제 36년간 일본 승려들에 의해 운영된 이후에 광복을 맞아 한국의 품으로 돌아온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로 참회문 비 제막식은 동국사가 1909년 일본 조동종 승려 내전불관(內田佛觀)에 의해 추진하게 됐다.

참회비는 일본의 동지회(東支會,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 회장인 일호창황(一戶彰晃 이치노혜 쇼고) 스님이 주도했으며 비석크기는 가로 3m 높이 2.3m로 일어 원문과 한글 번역문을 병기했으며 원래 장문이었던 참사문을 발췌해 음각했다.

주요 내용은 "해외포교라는 미명하에 일제가 자행한 야욕에 수많은 아시아인이 인권침해, 문화 멸시를 당한 것은 불교적 교의에 어긋나는 행위로 석가세존과 역대 조사(祖師)의 이름으로 행했던 일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로 진심으로 사죄하며 참회한다"는 것이 골자다. 건립비용은 일본 불교계에서 전액 부담하고 석재는 최고급 황등석으로 전북 익산에서 제작됐다.

일본인 작가(도서출판 토향 대표) 도다 이쿠코는 축사를 통해 "한일간 역사의식을 둘러싼 큰 마찰이 생기고 있다. 그 모든 원인은 일본이 폐전한 후 자신이 범한 과오를 참회하기는 커녕 역사를 은폐하고 후세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면서 "침략의 역사는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커다란 죄과에 대해 참회하는 일본 불자의 성심을 숭고한 마음으로 받아들인 동국사와
군산시 관계자에게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동국사 종걸 스님은 "불교인들이 권력에 편승해 가해자 입장에서 포교했던 조동종의 해외 전도 과오를 진심으로 사죄하는 참사문 비를 세워짐에 따라 양국관계 복원과 발전을 도모하는 새로운 역사를 여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면서 "한일 불교의 진정한 우호관계가 계속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조동종은
명치유신 이후 태평양 전쟁 패전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당시의 정치권력이 자행한 아시아 지배야욕에 가담하거나 영합한 종단으로 1945년 일본 패망 당시 한국에 160여 개의 사원과 포교소를 거느린 거대 종단이었다.

현재 일본내에는 1만 5000여 개의 조동종 사찰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k9900@newsis.com

  • 강길형 일본 불교계가 참회하고 일본정치권도 참회하고 독도 문제로 더이상 바보스런 일들을 접기바랒다,
    우리 조상들은 끝임없이 일본에 고급문화를 전수하였으여 일본이 선진문화국이 된것을 잊지말기바란다,
    일본 천황폐하의 핏줄에도 백제인의 피가 흐르고 있고,일본의 현재국보 1호도 미륵반가사유상이 아닌가?,
    2012-09-16 17:53 댓글삭제
  • 강길형 독도는 한국땅, 다케시마는 일본땅, 진실은?

    한국인 모두가 독도는 한국 영토임을 주장하지만 일본이 순순히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일본과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타당한 사실(Fact)을 찾아 독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 주세요.

    최근 기사로 보는 한국 정부의 주장과 행동
    독도 ICJ 제소 거부’ 구술서 日에 전달
    정부 “노다 일본 총리 독도주장 철회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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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ICJ에 독도 단독 제소키로… 한일 여론전 돌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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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국민 48% "독도 문제, 강경대응해야
    "김치도 먹지마"...일본 내 반한 기류 확산
    2012-09-17 18:59 댓글삭제
  • 강길형 백두산은 머리, 대관령 척추, 영남 對馬와 호남 탐라를 양 발로"

    "대마도는 우리의 失地 회복… 일본인이 아무리 주장해도 역사는 어쩔 수 없다"
    미국과의 영토 협상에서 일본이 제시했던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령'으로 나와

    김상훈 대령은 “대한해협은 현재의 위치가 아닌 대마도의 남단에 있었다”고 주장했다./최보식 선임기자 김황식 총리가 국회에 출석해 "역사적 근거가 있다 해도 지금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말했다. 나도 같은 노선이었다.

    이 때문에 김상훈(54) 대령과 만나는 것은 "내가 극우주의자로 비칠 수도 있겠구나"를 감수하는 행위였다. 학자도 아닌 현역 군인인 그는 '대마도의 영유권' 연구에 미쳐있다. 몇 차례 논문을 발표했고, '일본이 숨겨오고 있는 대마도·독도의 비밀'이라는 책을 출간했으며, 국회에서 특별 강연도 했다.

    그는 근무처인 관동대 학군단(강릉 소재)에서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통화에서 듣던 격정적인 어조와는 달리, 반듯한 인상이었다.

    ―독도 문제 해결을 위해 전략적으로 대마도를 언급하는 것인가?

    "나는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객관적 증거 자료를 갖고서 말한다. 이런 사실 때문에 일본이 대마도를 감추기 위해 독도를 부각해왔는지 모른다."

    ―역사적으로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자료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대마도가 일본령으로 기록된 문서나 지도도 많다.

    "맞는 지적이다. 가령 1750년대 제작된 '해동지도'에 '백두산은 머리, 대관령은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와 호남의 탐라를 양 발로 삼는다(以白山爲頭 大嶺爲脊 嶺南之對馬 湖南之耽羅 爲兩趾)'고 적혀있다. 19세기에 작성된 경상도 행정지도에도 '대마군(郡)'으로 나온다. 하지만 나는 이런 고지도와 고문서로써 말하는 게 아니다."

    ― 당신이 말하는 결정적 증거 자료는 무엇인가?

    "일본의 개항 직후 미국은 일본 본토에서 1000여㎞쯤 떨어진 태평양의 무인도 '오가사와라'를 발견했다. 이를 미국령에 편입하려고 했다. 미·일 간 영토 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일본은 그 섬이 나와있는 자국의 지도(1785년)를 제시했다."

    ―일본은 이미 그런 지도까지 준비해놓고 있었는가?

    "지도 작성자는 하야시 시헤이(林子平)로, 일본의 영토 주권에 가장 먼저 눈떴던 인물이었다. 그는 '해상 방위를 튼튼히 하고 주위의 무인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을 정벌해 국가 방위의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고도 했다. 소위 정한론(征韓論)의 시조 격이다. 그는 일본과 주변국을 정찰해 지도 다섯 장을 제작했다."

    ―영토 협상에서 그 지도로 미국이 물러섰나?

    "미국은 하야시의 일본어판 지도로는 객관적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고심하던 일본 막부는 하야시의 지도를 번역한 '프랑스어판'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를 증거물로 내세워 영토 협상에 성공한다. 바로 그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령으로 되어있었다. 일본이 영토 협상에서 사용한 지도에 그렇게 나와있다는 뜻이다."

    ―그 지도를 직접 확인했나?

    "지금까지 발견된 필사본 지도에는 독도는 우리 땅, 대마도는 일본 땅으로 되어있다. 이를 근거로 일본서 귀화한 호사카 유지(세종대 독도연구소장) 교수가 '국제적으로 공인된 지도에 이렇게 나와있는 것이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리가 몰랐던 것은 그 지도에 독도뿐만 아니라 대마도도 우리 영토로 되어있었다는 점이다."

    ―앞뒤가 모순된다. 필사본은 모두 대마도가 일본 땅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 하지만 그 필사본은 모두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몇 년 전 국회도서관 206호실 독도특별전시관에서 프랑스어판 원본을 찾아낸 것이다.대마도가 우리 영토와 같은 색깔로 채색돼 있었다. 나는 이 지도를 원본이라고 확신한다."

    ―대마도가 우리 땅이면 원본이고, 그렇지 않은 필사본은 다 조작됐다는 주장이 과연 논리적일까?

    "기록에 따르면 1806년 한 네덜란드인이 하야시의 원본 지도 딱 한 부를 유럽으로 들고 갔다. 이를 갖고 클라프로토라는 동양학자가 현지 정찰 등을 한 뒤 1832년 프랑스어판을 찍었다. 국회도서관의 프랑스어판이 바로 그 지도다. 고자료 수집가인 한상복 선생이 국회도서관에 기증한 것이라고 했다."

    한상복(72)씨와 통화해보니, 1980년대 초 호주에서 구입한 것으로 '1832년 인쇄본'이 맞다고 했다. 하지만 한씨는 "지도에서 대마도가 같은 노란 색이라고 해서 우리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는 지는 의문이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 국회도서관에 보관된 것 말고 다른 프랑스어판 원본이 발견된 적은 없나?

    "프랑스어판은 수십 부를 찍은 걸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필사본 외에는 발견된 적 없다. '오가사와라' 섬을 둘러싸고 미국과 영토 협상을 벌였던 일본 대표가 1863년 프랑스 대사로 갔다. 그가 프랑스어판을 수거해서 폐기했을 공산이 높다. 그 직후 일본은 대마도를 자기네 영토에 귀속했다(1868년). 이때 전후로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표기한 필사본이 대량 만들어졌다고 본다."

    ―하야시의 일본어판 원본은 직접 본 적이 있나?

    "일본어판도 대마도가 일본 땅이라는 필사본만 돌아다닌다. 일본 도쿄의 국립도서관에 원본이 보관돼있다고 하는데 확인하진 못했다. 하지만 하야시가 제작한 다른 지도 '조선팔도지도'의 원본은 발견했다. 그의 고향인 센다이 소재 도호쿠(東北)대학 박물관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아냈다. 대학 측이 '원본'이라고 소개해놓았다. 그 지도에도 대마도는 조선령으로 나와있었다. 내가 이런 자료를 근거로 2010년 말 논문을 발표하자, 한 달도 안 돼 인터넷에 떠 있던 지도가 사라졌다. 그 공간을 '노 이미지(사진 없음)'로 비워놓았다."

    ―대마도 영유권보다, 현역 군인이 어떻게 해서 대마도에 빠져들게 됐는지가 더 궁금하다.

    "2008년 초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연수할 때였다. 뉴욕타임스에 김장훈씨가 낸 독도 광고를 봤다. 민간인도 이렇게 노력하는데 현역 군인으로서 뭔가 기여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조지워싱턴 대학은 이승만 대통령이 다녔고, 이분이 정부 수립 후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어떤 근거로 그랬는지 찾아내고 싶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 8월 15일) 사흘 뒤 첫 기자회견에서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다. 이듬해 연두 회견과 연말 회견에서도 "대마도는 우리의 실지(失地)를 회복하는 것이다. 일본인이 아무리 주장해도 역사는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압박에 일본 총리가 일왕(日王)에게 '한국인이 실제 2000명쯤 거주하고 있다'는 대마도 상황까지 보고했다. 하지만 여섯 달 뒤 6·25가 발발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무엇을 찾아냈나?

    "조지워싱턴대 도서관 7층 특수문서실에서 그의 1907년 졸업 앨범을 볼 수 있었다. 당시 같은 과 동문들이 '그에게 국적을 물을 때 실수하지 말라. 그는 우리 가운데 성적이 가장 우수하여 전 과목 A·B 학점을 받아 2년 반 만에 조기 졸업했다. 그는 YMCA와 역사·철학 등의 찬반 토론회에서 주요 멤버였다'는 글을 적어놓았다. 이분이 대학에서 역사학 두 과목을 이수했고, 그 뒤 하버드대(석사)와 프린스턴대(박사)에서도 역사 연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와 어떻게 연결되나?

    "이분이 미국 체류 시절 쓴 '저팬 인사이드 아웃(1941년)'을 봤다. 진주만 기습 7개월 전에 이미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으로 예측했다. 그 책에는 '일본과 한국 사이, 한국과 만주 사이 등에 경계선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린 듯하다. 일본이 이런 과거의 경계선을 하나둘씩 깨뜨리면서…'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분은 사실적 근거를 갖고 '과거의 경계선이 있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대마도 영유권' 주장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본다."

    ―당신은 그전에 이 분야를 전공하거나 공부한 적이 있었나?

    "전혀. 다만 그런 관심이 생기면서 미국의 한 고미술·지도 전시회에서 1864년 발행된 아시아 지도를 사게 됐다. 지도 하단에 '미국 페리 함대의 일본 현지 정찰과 측량으로 작성했다. 일본과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미 의회의 지시로 미국 정부에서 제작했다'고 나온다. 이 지도에는 대한해협이 현재의 위치가 아닌 대마도 남단에 있었다. 일본 영토에는 채색이 되어있었지만 대마도는 우리 땅과 똑같이 무색이었다. 그게 첫 단서였다."

    ―당시 미국으로서는 동양의 어느 나라에 어떤 섬이 소속됐는지 몰랐을 수도 있지 않은가?

    "페리 함대는 앞서 말한 '오가사와라'를 놓고 일본과 영토 분쟁을 했던 당사자다. 그때 일본이 하야시의 프랑스어판 지도를 제시해 협상에서 이겼다. 이를 근거로 미국 정부에서 제작한 지도였다. 그러니 대마도가 어느 영토에 속하는 지를 알았을 것이다."

    ―지도 하나로 너무 많은 것을 유추하고 있지 않나?

    "1855년 영국에서 제작된 지도에는 일본 각 지방을 구역별로 번호를 매겨놓았다. 그 지도의 하단에 '대마도와 이끼섬은 일본 왕국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나온다. 1945년 국내에서 발행된 '조선해방기념판 최신 조선전도'에도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표기해놓았다."

    ―하지만 2차대전 패전국 일본과 미국 등 전승국 간에 전후 처리를 위해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년)을 체결했다. 이 문안에 '독도'와 '대마도'는 명시되지 않았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도 날아갔던 셈이다.

    "우리는 '전승국' 신분이 아니어서 협상에 참여할 수 없었다. 또 6·25전쟁 중이었다. 외교적 제약이 많았다.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독도를 포함하는 '평화선'을 설정한 것이다. 하지만 대마도를 염두에 두고서 '이 경계선은 장래에 규명될 새로운 발견·연구 또는 권익의 출현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신정세에 맞추어 수정할 수 있음을 선언한다'고 했다."

    ―대마도 영유권 주장은 정말 현실성이 있다고 보나?

    "당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오가사와라' 섬이 미국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일본의 집요한 요구로 1968년 뒤집혔다. 미국이 과거의 합의를 받아들여 그 섬을 일본에 반환한 것이다. 당시 영토 협상의 기준이 됐던 지도에 의한다면 대마도 영유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그는 전혀 물러설 것 같지 않으니, 내가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2012-09-17 19:41 댓글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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