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를 비난 할 것인가? 존경할 것인가?
권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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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를 비난할 것인가? 깨닫고 비난하라. 경허를 옹호할 것인가? 깨닫고 옹호하라. 남의 일로 선악을 들추어 봄은 지난 경계이다. 깨달음을 왜 밖에서 찾으려 하는가? 모든 문제는 중생 구제에 있느냐에 잣대를 대어야 한다. 난 경허 선사를 존경하다 못해 나의 평생 스승으로 모시기 위해 나의 법호도 존경의 의미로 ‘虛’자를 따서 ‘影虛’로 하였다. 그러니 누군가가 “영 허빵이다.” 하였다. 맞는 말이다. 이 세상은 변하니 허빵임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하여 그 사람에게 내가 왜 허빵이냐? 나의 실체를 무시하느냐? 는 등등 어리석은 말로 비난은 하지 않는다. 경허의 깨달음과 주색잡기는 경허의 것이지 나의 것은 아니다. 나 또한 깨달음을 이루고 싶기도 하고 또한 주색잡기도 하고 싶은 맘은 있다. 경허처럼, 동전의 양면성처럼. 경허 입적 100년을 맞이하여 경허에 대한 다양한 논의는 오히려 경허를 더욱 알게 하고 경허를 더욱 존경하며 경허를 통해 나는 저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모든 사물이나 사람이나 양면성은 다 있는 법. 그것은 깨달은 자라 하더라도 가지고 있는 양면성이다. 그래서 착하기는 부처와 같고 악하기는 호랑이보다 더하다는 말을 하였을까? 시시비비가 오히려 부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한다. 한사람이 여러 관점을 두고 비판을 하였다면 또 다른 사람이 잘난 점을 말하면 될 것을, 이것으로 인해 글쓴이의 입을 막고 그 글을 읽어보는 자의 생각을 막을 수 있겠는가? 자기 관점으로 보아 잘못되었다 하여 아예 생각을 하지 못하게 머리를 자르려고 하는 어리석음이다. 이것이 어떤 물리적인 힘으로 될 말인가? 어리석고 우습다. 불교는 다양한 생각을 존중한다. 이것이 불교 사상이다. 설사 그것이 자신의 견해와 다르더라도 그 견해를 듣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면 된다. 이것을 거대한 조직이나 힘으로 막으려 한다면 그것처럼 못난 행동 또한 없을 것이다. 아직 우리는 불교를 제대로 배우질 못하였는가? 요즘의 사태를 보면 아쉽기 그지없다. 경허를 경허대로 두질 않고 자기 잣대로 왈가왈부 한다. 경허를 경허대로 보려면 경허 속으로 들어가 보라. 꽃 속에 누울 것인가? 취모검 위에 설 것인가?
학술지에 개재된 글이 문제가 있거나 다른 의견이 잇다면 반론과 자신의 논지를 설파하면 됩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담론을 형성해 나아 갈 수가 있습니다. 이 정도의 주장과 비판을 수용 또는 감내하지 못하는 허약한 일부 승가의 현실이 안쓰러워 글을 퍼올린 겁니다. 2012-10-04 15:25
깨우침을 얻고 나면 이 세상 중생들을 위하여 지혜로운 보시행을 향해야 한다는 말씀은 들었어도 주섹에 빠저도 된다는 말슴은 보지 못했다는 거지요..
그 분이 깨우친 선기와 주색잡이는 별도로 분리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돈오점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한다고 봅니다..
깨우침이 모든 것을 정당화 하지는 않습니다.. 파격이란 모순된 제도와 습관을 넘아서는 것이지 정당한 윤리와 절차를 건너 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또한 시시비비를 논하는 어쩔수 없는 중생놀음이라고 하겠지만 2500년전 싯다르타가 깨친 바른 법이 그랬을까요.. 2012-10-04 1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