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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꼭 사랑해야 할 사람, 포르테 시모

정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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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꼭 사랑해야 할 사람, 포르테 시모

 

 "언젠가는 저걸 타야 되겠지?"

나날이 보폭 좁아지고 걷는 속도 느려지면서

농담처럼 진담처럼 아내에게 던져보던 말

"타야 할 때가 되면 그때부터 알아봐도 돼."

쓸 데 없는 걱정 사서 하지 말라는 투다

이럴 때 아내는 나와 눈도 맞춰주지 않는다

 

내 살들은 나날이 힘을 잃어가고

내 두 팔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두 다리가 휘청댈 때마다 그 위에 얹힌 내 몸은 위태롭다

 

몸이 힘을 잃으면

마음마저 기운을 잃는다

대낮에는 혼자서 멀쩡하게 내려가던 계단도

어둠 속에서는 다리가 먼저 꼼짝하지 않는다

의식은 초롱초롱 걱정 말고 걸음을 옮겨놓으라고 말해보지만

정작 내 두 다리는 그 말을 따를 뜻이 없다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지팡이를 들려줘도 소용이 없다

발걸음 한 번 잘못 옮긴 대가로

주저앉는 것도 아니고

쓰러지는 것도 아니고

밑동 잘린 나무처럼 직각으로 넘어가고 마는

머리를 부딪고 얼굴을 긁히고 어떤 때는 턱뼈도 부서지고 마는

아팠던 선험들을 두 다리가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휠체어가 집에 들어오던 날

덩치 큰 장난감이라도 선물 받은 아이처럼

내 눈은 반짝반짝 빛을 냈다

바퀴 하나 달게 하고

바퀴 하나 더 붙이게 하고

양쪽 팔걸이 잡고 꾹 눌러서 의자 모양으로 펼쳐놓게 하고

발 얹는 쪽에 있는 보조바퀴 펴서 제자리 오게 하고

접혀 있는 등받이 펴게 하고

양쪽 팔걸이도 제자리 잡아주게 하고

그런 다음

"나 좀……"

내 말 떨어지기 무섭게 얼굴 앞으로 다가온 아내는

먼저 무릎 접어 자세를 낮추고

늘어진 내 두 팔 들어 자기 어깨 위에 얹고

두 손을 내 겨드랑이 사이에 집어넣었다

하나 두울 세엣!

바닥에서 공중으로 몸을 일으키는 순간

아내의 몸 위에 얹혀있던 내 팔은

아주 짧은 순간 솟구쳤다 가라앉는 아내의 억센 어깨근육을 읽어냈다

 

앉아보니 생각보다 편안했다

이제부터 아내가 내 뒤에서 휠체어를 밀어야 한다

휠체어 위에 몸을 얹은 나도

내 뒤에서 휠체어를 밀어야 하는 아내도

우선은 시선에 익숙해지는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소파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거실 중앙에 동그맣게 놓여 있는 휠체어로 자꾸만 눈이 갔다

가벼운 흥분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 나와 달리

내내 말을 아끼던 아내는 TV도 보지 않고 내 등 뒤에 숨어 있다

너무 조용해서 돌아보니 아내가 소리 죽여 울고 있다

"왜에? 탈 때 되면 타야 하는 거라더니……."

"그래도……."

코끝이 아렸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억지 웃음 지어 보였고

숨어서 울다 들킨 아내는 작정하고 참아둔 눈물 쏟아내기 시작했다

오늘, 휠체어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

이제 가야 한다

세상 속으로

 

*****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미안하다」전문 14

 

*****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내가 사랑하는 사람」전문 23

 

기차 타고 가는 문학기행이 잘못일 리 없고

영주의 천년 고찰 부석사가 죄 있을 리 없으며

함께 간다 소문난 정호승도 아무 죄 없고

읽는 이 마음에 이슬 같은 눈물 한 방울 툭 떨어뜨리고 가는 그의 시도 무죄다.

그렇지만 잘 참아오다가 느닷없고 턱없는 욕심 부린 너는 죄 있어도 아주 크다.

집으로 휠체어를 배달시켜 아내 가슴이 미어지고 무너지게 한 죄,

눈물짓는 아내 앞에서 철딱서니 없이 눈빛 반짝이며 호기심 내비친 죄,

절대로,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아서라고 너는 말하겠지만

마음의 빗장 풀고 그녀와 함께 엉엉 울어주지 못한 죄…….

 

(작성일: 2006년 4월 13일)

  • 정재호 이 글을 쓰신 분은 혜등 이현수 포교사님(16기)입니다..
    몸에 장애가 있어 사모님이 밀어주는 휠체어에 의존해서 이동을 하시고 각종 행사에 참여하십니다..
    이 분은 큰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항상 밝은 웃음을 잃지 않고 당신의 마음을 자판에 새기듯 담아 사바세계의 중생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분이 지니고 있는 법명처럼 최명숙포교사님도 밝은 지혜의 등이 되어 온세상을 은은히 밝혀 주시길 기원합니다..
    2012-10-05 11:50 댓글삭제
  • 김혜숙 _()_ 2012-10-05 18:54 댓글삭제
  • 최명숙 혜등 이현수 포교사님은 직지사에서 뵌 듯합니다 휠체어를 타고 계셔서 한눈에 들어오셨던 분이십니다. 정재호 포교사님!!! 저도 온 마음내서 정진하겠습니다 2012-10-05 22:25 댓글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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